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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티베이터 Apr 12. 2020

이제 그만, 수치심을 마음에서 내보내라  





얼마 전  타 부서 요청 업무로 입찰 평가에 평가위원으로 들어갔다. 교육 운영 업체를 선정하는 입찰이었다. 업체들의 프레젠테이션이 마쳤고 위원들이 모여 잠시 회의를 진행했다. 그때 직원 중 한 분이 전문가의 의견을 들어보고 싶다면서 나에게 물었다. 그 순간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눈이 일제히 나에게 쏠렸다. 나는 순간 입을 열지 못하고 잠시 굳었다. 의견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다. 다만 내가 정말 전문가로서의 자격이 있는지 의심이 들어서다. 


사실 나는 이런 경우가 많았다. 나의 능력이나 자격에 대해서 스스로 자주 의심했다. 이런 의심은 겸손함이 아니다. 그 근원은 수치심에 있다. 어린 시절에 심긴 수치심이 의심을 만들어 낸 것이다. 성인이 되어서도 남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스스로 만든 생각에 얼굴을 화끈거리고 몸과 마음이 굳은 적이 많다. 자긍심, 자부심 등이 자랐어야 할 자리에 수치심이 몰래 자라고 있었다. 


내게 숨겨진 수치심에 대해 생각하던 중 예전에 함께 일했던 직장 동료가 생각났다. 그 사람은 직장생활 적응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함께 대화를 나누거나 식사를 하는 자리를 피했고, 퇴근 시간이 되면 조용하게 먼저 자리를 떴다. 내가 그 직원에게 다가가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거나 업무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면 유독 긴장을 많이 했다. 내 입장에서는 도움을 주거나 협업을 위해 말을 걸었는데 상대가 많이 긴장하고 경계하는 모습을 보이니, 평소에 다가가기가 어려웠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 사람은 모든 상황을 자신에 대해 평가하는 상황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다 보니 모든 상황이 긴장의 연속이었던 것 같다. 


사람을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되지만, 내가 그렇게 생각한 이유가 있다. 나 또한 과거에 그랬기 때문이다. 현재는 누구와도 편하게 잘 지내고 오히려 분위기를 주도하는 편이지만, 대학시절은 전혀 달랐다. 나는 어떤 그룹에도 속하고 싶지 않아 했고, 친구나 선후배 관계를 발전하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동기나 후배들이 나에게 찾아와 가까워지고 나에 대해 알고 싶어 하면, 그런 상대의 태도에 부담을 느꼈다. 그 시절 나는 그냥 나를 감추기에 바빴다. 


그렇게 행동했던 원인은 수치심이다. 10대 후반에 겪은 개인적 어려움과 상처로 인해 나는 가면을 쓰기 시작했고, 그 가면 뒤로 끊임없이 숨으려 했다. 내면에 수치심이 형성됐기 때문이다. 평소에 아무렇지 않다가도 수치심이 발동되면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가치 없이 여겨졌다. 타인은 인정하고 칭찬하는 것 마저도 내 눈에는 부끄러운 일이 돼 버렸다. 누가 내 약점을 알거나 그것을 비난할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중고등학교 때는 항상 리더의 자리에 있었고, 사람들을 잘 챙기는 나였는데, 대학에 와서는 뒤로 숨는 일이 습관이 되었다. 


수치심 중독에 취약한 한국 사회 

수치심은 심리학에서 중요한 주제다. 우리 안에 숨겨진 수치심이 많은 심리적 문제들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수치심은 마음뿐만 아니라 몸에도 문제를 일으키며, 우울증, 불안장애, 공황장애 등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이러한 수치심에 한국사회는 취약하다. 나도 모르게 의식과 무의식에 수치심이 침투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한국 사회가 수치심에 취약한 이유는 먼저 부모의 과도한 기대 때문이다. 과거 오바마 미국 전 대통령이 미국 사회에 한국의 교육에 대해 칭찬한 적이 있다. 해외에서 우리의 교육이 우수사례로 언급되는 일은 기분 좋지만, 한편으론 씁쓸했다. 한국의 높은 교육열로 인해 수많은 학생들이 고통받고, 사교육비로 인해 많은 가정들이 가계경제에 부담을 느끼고, 도무지 끝을 모르는 경쟁 사회를 만들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듯, 이러한 교육열에는 부모들의 과도한 기대가 있다.

  

한국 사회는 학력위주의 사회이다. 시대가 변했다고 하지만 여전히 학벌주의는 엄연히 존재한다. 이런 사회에서 부모들의 기본적인 소망은 자신들의 자녀가 좋은 대학에 가주길 바란다. 대학 정원은 정해져 있고, 소위 명문대라고 일컬어지는 대학들의 수도 정해져 있지만 부모들의 기대와 욕망은 객관적인 현실 앞에 굽힐 줄을 모른다. 내 자녀가 다른 자녀들과의 경쟁에서 이겨서 누구에게 말해도 부끄럽지 않을 대학에 가 줄길 기대한다. 그러다 보니 소수의 학생을 제외하고, 상대적으로 많은 학생들은 부모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결과를 안고 대학생활을 시작한다. 


학생들은 그 오랜 시간 참고 견디며 공부하고 치열하게 공부했지만, 얻어진 결과는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함’이다. 이런 구조에서 학생들은 쉽게 수치심에 노출된다. 자신의 노력을 정당하게 평가받기보다는 ‘나는 뭔가 부족해’, ‘나는 사회에서 뒤떨어졌어’라는 잘못된 인식을 갖고 대학생활과 사회생활을 시작한다. 부모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괴로움은 사람들의 인정으로부터 끊임없이 목말라하고, 자신에 대한 불신을 만든다. 부모의 기대와 욕망이 자녀들을 수치심에 중독시키고 있는 것이다. 


부모의 욕심만이 아니다. 한국 사회의 미디어와 광고, SNS는 사람들의 욕망을 자극하고, 수치심을 권한다. 드라마 예능 프로그램, 광고에 등장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마음껏 외적 매력을 발산한다. 많은  시청자들이 그들의 외모와 매력에 열광하고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기울인다. 수많은 광고가 상품 판매를 위해 모델의 외모와 성적 매력을 부각하고, 사람들을 매혹시킨다. 또한 외적 매력을 갖추고 있어야 이 사회에서 행복해질 수 있다고 속삭인다. 

 

그러나 현실은 미디어 속 세계와 엄연히 다르다. 드라마와 예능은 엄청난 돈과 인력, 시간이 만들어낸 연출된 세계다. 현실은 그렇지 않다. 각자의 삶의 모습이 있고 각자의 생김이 다르다. 그 나름대로 가치 있고 인정받아야 한다. 그런데 이제는 일반인들도 SNS를 통해 연예인과 같이 자신의 외모를 자랑하려 하고, 타인과 구별된 특별한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치장한다. 그리고 SNS를 이용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사진과 영상을 보며 자신이 삶은 그들에 비해 매우 평범하고 보잘것없다고 생각한다. 참으로 이상한 현상이다. 

 

미디어 SNS가 만들어내는 수치심 중독의 가운데는 외모가 자리하고 있다. 끊임없이 외모를 내세우고 평가함으로, 일정 수준 이상의 외모가 사회적 가치평가의 기준인 것처럼 속인다. 이런 환경에서 자신의 외모에 대한 왜곡된 생각은 수치심을 형성한다. 이는 타인의 외모에 대한 동경이 커질수록 더욱 심해진다. 자신 스스로 외모에 대한 사회적 기준을 만들고, 자신이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판단은 스스로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타인 사이에서 뒤로 숨고 싶은 욕망을 자극한다. 



수치심을 마음 밖으로 쫓아내야 한다. 


수치심이 무서운 이유는 수치심은 그 정체를 잘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수치심은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여러 감정 뒤로 숨어 버린다. 숨어서는 우리 생각과 감정을 왜곡시킴으로 우리를 고통으로 몰아넣는다. 수치심을 발견하고 내어 쫓지 않으면, 수치심은 잡초와 같이 급속하게 자라 우리의 마음밭을 망쳐 버린다.  


따라서 수치심은 제거해야 할 대상이다. 특히 어떤 일을 진행하거나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노력할 때는 더욱 그러하다. 수치심은 한순간에 모든 걸 마비시킨다. 내가 목표를 삼고 계획했던 일을 진행하다가도 수치심을 만나면, 모든 것이 의미 없이 여겨진다. 내가 했던 노력을 정당하게 평가하고 그로부터 성취감을 얻어야 에너지 동력을 얻을 수 있다. 그런데 수치심은 나 스스로를 가치없이 여기게 함으로, 내가 했던 모든 일도 의미 없게 만든다. 수치심은 비현실적인 기준을 제시하고 나와 내가 한 노력이 그 기준에 미치지 못했다고 속삭인다. 


수치심에서 벗어나기 위한 연습을 시작한다. 



수치심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다면, 한 번에 벗어나려는 생각보다는 벗어나기 위한 연습을 해야 한다. 수치심으로부터 한 번에 벗어나기란 어렵다. 한순간에 달라지고 싶다는 기대는 오히려 조급함을 만들고, 더욱 깊은 수치심으로 들어가는 덫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우리에겐 전략적인 연습이 필요하다. 


수치심에서 벗어나기 위한 여러 전략이 있겠지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두 가지 전략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첫째, 나의 연약하고 취약한 부분을 오픈하고, 타인으로부터 공감을 얻어야 한다. 수치심은 감추려 하면 자란다. 수치심의 공격이 두려워 나를 숨기면 잠시 동안은 안전할 수 있다. 그러나 이내 수치심은 더욱 강력한 공격을 준비하며, 오랫동안 나를 괴롭힌다. 수치심 연구의 권위자 브레네 브라운은 수치심의 공격을 이겨내려면,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있는 사람을 찾아야 한다고 한다. 그들에게 자신의 취약한 부분을 오픈하고, 공감을 얻으라고 이야기한다. 나만 이런 일을 겪고, 나만 이런 연약함이 있다는 생각은 수치심이 우리를 공격하는 핵심전략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히려 적극적으로 나의 연약함과 상황을 오픈하고 나눔으로, 그런 연약함은 많은 사람들이 지니고 있고, 또 그런 상황도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임을 인지해야 한다.


둘째로는 내 욕망, 내가 원하는 일과 타인의 것을 구별해야 한다. 수치심에 중독된 사람일수록 타인이 원하는 것을 따르려고 한다. 어느 순간 그 일이 내가 원하는 일이라고 착각하면서 말이다. 이는 부모의 기대를 따르고 그 인정에 목말라 있던 사람일수록 더하다. 이런 문제는 타인이 만족하면 나도 만족하고, 행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커다란 착각에서 비롯된다. 한국사회의 집단주의 문화는 이런 착각을 더욱 부추긴다.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지역은 집단주의적 문화이다. 개인의 가치, 욕구, 개인의 생각이 중요하기보다는 집단의 평가나 집단의 기준이 중요한 사회이다. 이런 사회일수록 내 생각, 내 바람을 이야기하고 앞세우는 일이 미덕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쉽게 내 가치, 내 바람, 내 욕망을 타인 또는 집단의 것과 구별하지 못한다. 


타인이 원하는 일을 내가 원하는 일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은 타인에게 맞추기에 급급하다. 내 생각, 내가 원하는 일은 따로 있음에도 타인에게 맞추는 일에 전전긍긍한다. 그러나 타인에게 완벽하게 맞출 수는 없다. 그러한 삶에는 만족감과 행복이 찾아오지 못한다. 과도하게 타인에게 맞추려는 이들에게는 오히려 수치심이 찾아온다. 타인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나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이제 그만 타인의 욕망을 추구하기를 멈춰야 한다. 물론 배려 차원에서는 타인에게 맞추는 일은 필요하다. 그러나 수치심의 문제를 겪고 있다면 지금부터라도 내가 원하는 일이 무엇인지에 집중해야 한다. 내가 원하는 일, 바라는 것을 발견했다면 작은 일부터 실천해 보라. 작은 일부터 실천하면서 내가 원하는 일을 했을 때 얻는 만족감이 무엇인지를 경험해야 한다. 그런 실제적인 감각적 경험들이 쌓여 타인과 나의 바람을 구별하는 감각을 길러야 한다. 


나 또한 오랜 시간 수치심으로 고통받았다. 그 고통은 발전하여 나의 생산성을 빼앗아갔다. 에너지를 갉아먹었다. 내가 하는 일, 이뤄낸 성과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방해했기 때문이다. 목표를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하는 동기 시스템을 망가트린 것이다. 수치심을 쫓지 못하면 동기는 원활하게 작동하지 못한다.


반면 수치심을 걷어내면 그 자리에 만족감, 자긍심, 자부심이 자라난다. 이러한 감정들은 주저함 없이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그 일에 대한 끈기와 지속성을 만든다. 그래서 결국 내가 원하는 것을 얻게 한다. 수치심은 쉽게 중독된다. 그리고 매우 위험하다. 이제부터라도 수치심에서 벗어나는 연습을 하고, 그 빈자리에 새로운 감정이 자라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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