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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와 달과 풀 Mar 31. 2024

아버지

컴퓨터 모니터를 보느라 눈이 시린 와중에 폰이 울렸다.  폰의 발신자를 보니 아버지였다.  

어머니가 세상을 등지기 전에는 전혀 전화를 하지 않으셨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 몇 달에 한 번씩은 내게 전화를 하신다.

전화를 하시는 목적은 먼 곳에 있는 막내 딸아이가 잘 있는지 걱정이 되기도 하고, 아버지 안부를 자주 묻지도 궁금해 하지도 않는 딸아이를 은근 원망하시는 마음도 있는 눈치였다.

자라면서 "아버지 진지 잡수세요." "아버지 잘 다녀오세요". "아버지 다녀왔습니다." 이런 문장 외에 대화라는 것을 아버지와 해 본 적이 없다. 그런 아버지에게 나는 애틋한 마음이 별로 생기지 않았다.

가부장적인 가정환경에서 자라시고 학교에 다니지 않으신 아버지는 오로지 어린 시절부터 들어오셨던 것은 양반으로서의 도리였다.

이 시대에 무슨 양반타령이냐고 묻는 이가 많겠지만 나의 아버지는 그러하시다.  학교에 다녀본 적이 없으시고 사회생활을 하지 않으신 그 긴 인생의 지침서는 오로지 양반으로서의 도리가 전부였다.

그리하여 그 양반답게 행동해야 한다는 생각에 자식들을 나무라셨고 그 외의 딸아이들의 교육은 필요없다고 생각하셨다.

그런 생각을 하셨던 아버지에게 딸들은 그저 무탈하게 자라서 시집만 가면 되는 존재였었다.  

내가 직장을 다니면서 밤에 야간대학교를 다닌다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다.  그때 아버지는 "여자가 무슨 대학교를 가노?  그냥 시집만 잘 가면 되지" 하시던 아버지가 못내 서운했었다.

그런 아버지가 사무실에서 일하는 내게 전화를 하셔서 나의 대학생인 딸아이들에 대해 공부는 잘 하는지를 물으시더니 뜬금없이 내 딸아이들을 대학원을 보내라고 하셨다.  큰 오빠의 딸인 한나가 결혼을 하고 난 후 시댁 어른이 대학원을 보내주셨다고 뿌듯하여 할아버지께 말씀을 드렸나보다.

어머니가 떠나시고 몸도 불편하신 아버지는 홀로 시간을 보내시면서 손녀가 손녀의 시댁어른 덕에 대학원을 다니게 되었고 그 기쁜 소식을 전해들으시고는 달리 생각한 바가 있으셨던 것 같다. 

사람의 사고는 좀처럼 바뀌지 않는데 손녀가 대학원을 가게 되었고, 그 손녀가 주부로서만 살지 않고 직장을 다니며 자기계발을 하는 것을 보며 아흔이 되신 아버지의 가치관이 바뀌셨나보다.

내게 "너는 둘이 벌어서 돈이 여유가 있으니 애들 둘이 대학원 보내라. 한나 보니 시아버지가 돈을 줘서 대학원을 다닌다고 하더라."하셨다.

평생을 여자는 교육도 별로 필요 없고 그저 시집만 잘 가면 되다고 주장하시던 아버지가 그런 생각을 하시게 된 것은 엄청난 변화가 아닐 수 없었다.

자라면서 나는 부모님이 이해가 되지 않았던 때가 종종 있었다. 어찌 교육을 제대로 받지 않은 여자가 시집인들 제대로 잘 갈 수 있을까?  그래서 어머니께 제대로 기본적인 교육도 못 시킬 거면서 왜 그리 많이 나았냐고모진 말을 했었다.

딸들을 제대로 교육을 못 시킨 어머니는 늘 마음에 그늘이 있으셨고, 내 말을 들은 어머니는 아픈 가슴에 더 아픈 말로 생채기를 내는 나의 말로 인해 속이 상해 둘째 언니께 하소연을 하셨었나보다.  후일 둘째 언니가 내게 어머니가 그렇게 말하시더라며 무엇하러 그런 말을 했느냐고 원망을 내게 했다.

가난은 밝게 뛰어놀아야 하고, 미래를 위해 공부를 해야 할 아이들이 방직공장에서 홀대당하며 밤낮없이 일하게 만들었다.  그런 것을 평생 보아온 부모님의 마음은 흡사 죄를 짓는 마음이 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가난이 죄는 아니지만 죄스런 맘을 가질 수 있다고 여겨졌다.

큰언니가 초등학교 졸업하고 방직공장을 다녔어야 했고, 둘째 언니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방직공장에 다녔었고, 막내인 나는 방직공장으로 가라는 부모님 말씀을 듣지 않고 고등학교를 입학해버렸다. 

그리고 학벌이 낮은 두 언니들은 자신의 인생을 개척하기엔 세상은 냉혹했고, 제대로 된 직장을 갖지 못하고 가난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아버지 눈에는 이런 두 딸들의 삶이 평온해 보이고 만족스러우신 것인지 잘 모르겠다. 내 생각에 아버지는 딸들의 삶이 불행해 보이진 않으셨는 것 같다. 

그러나 내 눈에 비친 두 언니들은 힘든 방직공장을 그만두고 가난하고 비슷한 학력의 형부들을 만나서 결혼하고 평생을 가난하게 살고 있다.  물론 학벌이 낮다고 하여 모두 가난하진 않다.  그러나 달리 재주가 없는 나의 언니들은 방직공장을 벗어난 후 가난을 벗어날 수 있는 제대로 된 직장을 가질 수 없었고 평생을 넉넉치 못하게 살고 있다.

이제 자식들에게 더 이상 그 무엇도 해주실 수 없는 아흔이 된 아버지가 오남매중 막내딸인 나에게 전화를 하셔서 외손녀 둘을 대학원 보내라고 하시는 그 마음이 안타깝다.

나는 아버지의 손 발을 기억한다.

두 손가락에는 하얀 테이프가 늘 감겨있었고, 뒤꿈치는 갈라져서 역시 테이프를 열십자 모양으로 여러겹 붙여놓으셨다.  내 눈에 비친 아버지의 손 발이 그러하셨는데 한 번도 아프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

내가 자라면서 겨울에 손이 터서 손끝이 갈라지고 발 뒤꿈치가 갈라진 적이 있는데 그때 나는 마치 날카로운 무언가로 갈라진 내 살들이 찔리는 듯 아팠던 기억이 있다.  조금 터서 갈라져도 그리 아팠는데 아버지는 그 손발로 늘 일을 나가셨고, 그 일은 쉬는 날이 별로 없으셨다.

이제 아버지는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는 몸이 되셨다.  이제는 마음의 짐을 내려놓으시고 계시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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