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전 친정을 다녀오면서 장거리 운전에 지루하여 안부도 물을겸 어린시절 늘 함께 놀던 단짝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고속도로에서 홀로 운전하는 것은 항상 지루하다.
"뭐하니?"
하는 내 질문에 수업준비를 한다며 얘기가 봇물 쏟아지듯 한다. 예전 교사생활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원로교사들이 일을 하려고 하지 않아 젊은 교사들이 일을 도맡아 했었는데 지금 오십이 넘은 나이에 신규 교사들이 일을 하려고 하지 않아 나이 많은 교사들이 업무를 도맡아 한다고 하며, 그래서 나이가 많은 지금에도 맡은 업무가 많다고 한다.
게다가 업무스트레스도 많고 업무양도 많은데 대기업에 비해 급여가 너무 적다고 하며 쉬운 직장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교사들이 방학때 논다고 꿀직장이라는 말을 하는데 그렇다면 명퇴하는 교사들이 왜 있겠느냐며 교사생활이 녹녹치 않다며 끝도없이 얘기가 이어진다.
게다가 교사들은 연차도 마음대로 못 쓴다고 한다.
"방학 세달 쉬잖아?" 하니 방학때 쉬지 않고 그저 연차를 맘대로 쓰면 좋겠다는 말을 한다.
'그런가? 연차를 일년중 이십일일 내는 것과 일년중 세 달을 쉰다면 어떤 것을 선택할까? 난 세 달 쉬는 것을 선택할 것 같긴 한데.... 내 직장에서 반년동안 연차 평균 일수가 고작 이틀정도밖에 되지 않는데....'하는 생각을 했다.
친구가 교사여서 그런가?
본인 하고 싶은 말을 폭포처럼 쏟아낸다. 머리에 쥐가 날 것 같았다.
'아! 이 친구 정말 교사가 되길 정말 잘했구나!'
말을 저리 잘하니 교사가 된 것인가? 아니면 교사가 되고 나서 말을 저리 많이 잘 하게 된 것인가?
둘 다일 것 같다. 말에 소질이 있으니 교사가 되었고, 계속 말을 하다보니 말을 잘하게 된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이 친구는 예전부터 늘 일이 많고 도시 아이들이라 예전과 달리 많이 거칠고 험하며 업무가 많다며 얘기한다.
내 얘기는 드지 않고 자기 얘기를 폭포수처럼 쏟아내는 그 친구가 교사라면 아이들이 내 얘기를 듣는지 살펴보면서 말을 하면 더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 친구는 젊은 시절 나쁜 병에 걸렸었고, 그 병은 완치가 되었지만 후유증으로 여러 가지 합병증이 있다. 그래서 건강한 사람들에 비해서 힘이 들 것이다.
그런 그 친구에게 나는 일이 많고 몸도 좋지 않으니 조금 더 한가하고 평화로운 시골로 이동을 하는 것이 좋지 않는지 물어보면 그 친구는 구지 그렇게까지는 하고 싶지 않다고 한다.
일이 많고 삶이 각박하더라도 시골로 이사는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도시의 각박함과 업무폭증에 대해 전화할 때마다 토로하면서 대도시를 벗어나지 않고 버거워하는 것을 보면서 사람은 자기 살던 지역과 삶의 방식을 버린 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내가 있는 곳의 교사들 업무 스트레스가 없기야 하겠는가만 상대적으로 그 친구에 비해 평화롭게 보여진다.
업무는 많고 신규 교사는 업무를 가르쳐줘도 제대로 듣지도 않고 진중히 귀담아 듣지도 않으며 자신이 업무파악을 제대로 하지 않았음에도 부끄러워하거나 미안해 하지도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업무로 인해 몸도 좋지 않은 그 친구는 일을 하지 않으려는 젊은 교사들 대신에 일에 매몰되어서 각박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그 도시는 다 그렇다고 한다.
요즘은 사람들이 내일을 위해 오늘을 희생하기 보다 오늘 하루가 행복한 삶을 살길 원한다. 그러니 신규 교사들이 승진을 하기 위해 애쓰기보다 오늘 하루를 행복하고자 부장도 맡지 않으려 하고, 기관장에게 일을 하지 않겠다는 말을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급기야 "너도 신규교사처럼 몸이 좋지 않아 일을 하지 않겠다고 말을해!"라는 말을 던져버렸다. 그친구는 그렇게는 할 수 없다고 했다.
삶은 선택이다. 그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은 그 말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고,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건강이 좋지 않아도 꾸역꾸역 참고 해내겠다는 것이다.
폭포처럼 쏟아내는 그 친구의 말에 나는 참다못해
"너가 선택한 거잖아"
라고 말을 해버렸다. 머리에 쥐가 날 것 같아서 답답한 마음에 저런 단어들을 화살쏘듯이 던져버렸다.
좀 더 한가한 시골로 이동해서 살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대도시에서 사람들과 일에 치어서 사는 삶을 놓지 못하고 살면서 계속 자신에게 주어진 업무가 상대적으로 많고 그 도시의 삶이 모두 그렇다고 말하는 친구가 내 눈에는 갑갑해보였다.
그 삶을 놓지 않고 살거면 그것 또한 본인의 선택이니 분명 그 선택을 했는 이유가 있을 것이고, 그러면 그 삶을 선택한 이유에 촛점을 맞추어서 그 삶의 즐거움을 얘기하든가 아니면 그 삶이 부당하다 여기면 그곳을 벗어나 여유로운 곳으로 이동을 하던가 하는 것이 좋지 아니한가?
나는 흡사 그 친구가 서울쥐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풍요로운 음식을 먹을 수는 있지만 집주인과 고양이의 눈치를 봐가며 도망다니며 긴장을 놓지 못하는 삶을 살면서도 그곳을 벗어나지 못하는 서울쥐!
가난하지만 평화로운 시골로 가지 못하는 서울쥐!
무엇이 그 친구를 그 도시에 잡아두는지 모르겠으나, 시골로 이동을 한다고 해도 급여에는 변화가 없고 여유로운 삶을 살 수 있다 여겨지는데 그것은 오직 나만의 생각인가보다.
시골에 비해 상대적으로 경쟁률이 높은 대도시 교사시험을 통과한 것이 아까워서 놓지 못하나?
도시의 문화생활이 좋아서 놓지 못하나?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는 오늘 하루 내 삶이 평화롭고 풍요롭기를 원한다.
창밖에 초록 산이 있고, 초록 산에서 싱그러운 초록 바람에 빗물 향기가 들어오는 시골마을이 좋다. 퇴근후에는 술은 못마시지만 술자리에서 여유있게 취미를 함께 하는 사람들과 공통 관심사를 여유롭게 이야기를 하면서 웃음으로 하루의 고단함을 녹이는 그런 시간을 가지는 것이 좋다. 주말에 일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삶이 좋다. 나의 선택은 이것이다.
그래 삶은 선택이다.
내 삶은 이리 선택했고, 이것이 옳은 것이라 여긴다.
아마도 그 친구는 그런 삶을 선택했고, 그 삶이 최선이라 여길 것이다. 열심히 살아왔고, 힘든 고비를 많이도 넘겼고, 힘든 상황에서도 자신을 채찍질해가면서 정말 열심히 살아온 친구였기에 그 어려운 대도시 교사시험을 통과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힘든 서울쥐 같은 삶을 고집하는 것이 안타깝다.
가치관은 그 사람의 삶의 방향을 정하고 그 삶의 방식이 정해지면 쉽게 바꾸기가 어려운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