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가 두 명 이상인 집은 공감 갈지 모르겠다. 지금 집에는 나밖에 없는데도 꼭 엄마 배에 먼저 기거했던 입주자들이 모두 불리고 나서야 내 차례가 돌아왔다.
재일아 재이야
아이고
재삼아
하지만 내가 뭐로 불리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니는 왜 엄마가 부르는데도 대답을 안하노”
라는 짜증 섞인 소리를 듣기 전에 빨리 엄마한테 가보는 게 중요하다. 나를 왜 불렀는지만 알아보면 된다.
병의 이름을 알고 싶었던 것도 그랬다. 왜 아픈지, 어떻게 해야 대체 낫는건지 알고 싶었다.
길거리 고양이처럼 나를 간택한 통증에 다가가보니 뿌연 이름표를 달고 있다. 허리가 아프기 6개월 전쯤 내가 마음대로 붙여놓은 이름표였다. 그때 이상근 증후군이라는 이름을 알게 됐다.
엉덩이가 욱신거렸다. 짱구 춤을 씰룩쌜룩할 때 가장 툭 튀어나온 엉덩이 옆 부위. 하루종일 스터디카페에 앉아있다 저녁이 되면 누가 엉덩이 양 옆을 막대기로 쿡쿡 찌르는 듯했다. 그 통증에 붙일 이름표가 필요하다. 유튜브에 엉덩이 통증이라고 검색하니, 고관절 통증, 좌골신경통, 이상근 증후군 이런 이름들이 연달아 나온다. ‘집에서 따라할 수 있는 이상근증후군 5분 스트레칭’ 덕인지 걷기 운동하시는 아줌마 아저씨들에게 엉덩이를 들이미는 부끄러움을 참으며 한 스쿼트 덕인지 다행히 통증이 줄었다.
그렇게 그 이름표는 어디에 뒀는지도 잊어버렸다.
알고보니 엉덩이 통증 그 녀석이 가장 약체였다. 도미노 쓰러지듯 몸 곳곳이 비명을 질렀다. 다음 타자는 발목이었고 5개월을 헤매다 결국 허리까지 나가버렸다.
정형외과에서 내가 마음대로 적은 이름 위에 새 이름표를 붙여줬다. 이름하여 허리디스크. 그런데 조금 이상하다. 뒤에 뭐가 더 적혀있다. 허리디스크가 있는 ‘것 같아요’? 허리디스크인 것도, 아닌 것도 아니고, ‘같은 건’ 뭘까. 엑스레이로는 정확하게 허리디스크 진단을 할 수 없는 모양이라고 받아들였다. 그렇게 내 이름표에 적힌 두 번째 이름은 ‘디스크인지 아닌지’가 됐다.
어쨌거나 ‘디스크’라는 무시무시한 단어가 붙어버렸다. 디스크라니. 허리 수술 1,700만 원의 짤의 주인공. 김종국을 운동밖에 모르는 바보로 만들어버린, 그 질환 아닌가. 큰일 나는 병에 걸린 것 같았다. 겁을 먹고 그 이름을 검색해 보니 더 무섭다. 다리 힘 빠짐, 마비, ‘철심’ 박는 수술 ……. 공포성 글의 무더기에서 따라 할만한 방법을 몇 개 건졌다. 걷기, 수영, 신전운동, 맥켄지 운동……
그런데 슬슬 이상하다. 나 디스크가 맞나?
"분명 처음에는 옆 단지까지 걸었거든? 그런데 지금은 우리 아파트 동 주변 밖에 못 걷겠어."
"왜?"
"다리가 터질 것 같아.
종아리가, 다리가, 너무 무겁고 끊어질 듯이 팽팽해.
그러다 더 걸으면 갑자기 다리에 통증이 올라오는데, 온 전신이 덥고 달아올라.
다음날 또 걸어보면 통증 오는 거리가 전날보다는 더 짧아져있구......"
이런 대화를 친구와 했던 것 같다. 걸을수록 좋아진다는 디스크가 점점 안 좋아졌다.
간헐성 파행증. 다리에 힘이 빠지고, 터질듯한 다리 통증 때문에 걷다가도 앉아 쉬는 걸 반복하는 증상이었다. 다만 앉아서 조금 쉰다고 바로 편하게 걸어지진 않는다는 점이 인터넷 설명과 나의 차이였다.
이 얘기를 세 번째로 바꾼 한의원에 말했더니 그건 “‘협착증’ 증상인데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새로운 이름이 등장했다. ‘디스크’는 말 그대로 척추 사이의 에어백 같은 디스크가 밀려 나와 신경을 누르는 병이고, ‘척추관 협착증’은 척추관이 좁아지면서 관 안에 지나가던 신경이 눌리는 병이다. 문제는 척추관 협착증은 주변 인대나 관절이 노후화로 두꺼워지며 생기는 병이라, 아직 20대(만 나이 도입 만세!)에게는 굉장히 드문 병이었다.
하지만 새 이름이 등장하기 무색하게 치료 방식은 그다지 변한 게 없어 보였다.
의아해서 찾아봤지만, 더 혼란스러웠다. 정선근 교수님은 협착증도 역시 디스크 병의 일종이라고 했다. 그런데 또 다른 채널, 이경석 원장님은 협착증과 디스크의 치료법은 달라야 한다고 말한다.
이쯤 되니 이름표 자체를 갖다 버리고 싶어진다. 내 병이 추간판탈출증(디스크)이든 협착증이든 이상근증후군이든 뭐로 진단 내리는지는 의미가 없어 보였다. 다른 병은 아직 안 걸려봤지만(제발), 의사마다 말을 가장 다르게 하는 분야가 뭐냐고 투표하면 아슬아슬하게 허리질환 부문이 1위를 할 게 분명했다. (왠지 압도적이진 않을 것 같다) 심지어 이상근 증후군은 아직 병의 존재 자체가 논쟁 대상이다.
어쨌든 비워둘 수 없어서 ‘디스크’라는 이름을 임의로 붙였다. 게다가 협착도 디스크에 포함되는 질환이라는 정선근 교수님 말을 믿는 편이 비수술적 치료를 택할 수 있어 더 수월해 보였다.
하지만 2편을 보면 알다시피, MRI가 휘갈겨 써준 글자는
“디스크 아님”
‘우리가 질병에 붙이는 이름은 올바른 약을 찾는 데는 유용하지만 질병의 근본 원인을 찾거나 치료 전략을 마련하는 데는 적절하지 않다.‘
<질병은 없다>의 저자는 병의 이름은 현대의학이 병을 분류화하고, 그에 맞는 약을 처방하기 위해 만들어진 체계일 뿐이라고 말한다.
현대 의학은 질병의 단일한 원인인 세균과 이를 죽이는 항생제를 발견해 냈다. 그러나 이 의료 시스템은 바이러스에 걸려 촌각을 다투는 환자에게는 적절하지만, 나처럼 오랜 기간 통증을 호소하는 환자에게는 맞지 않는다. 나는 세균 때문에 허리가 아픈 게 아니기 때문이다. 몸이 하나의 회사라면 만성질환은 어떤 한 부서에 문제가 생긴 게 아니다. 회사 시스템이 무너진 원인을 찾는 데 초점을 둬야 했다.
다른 환자와 마찬가지로, 나 역시 내게 딱 맞는 진단명을 알고 싶어 미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병명 찾기 게임에 중독될수록 이름을 찾게 된 이유에서는 멀어졌다. 거칠게 분류해 놓은 이름으로는 몸의 시스템이 망가진 원인을 알 수 없었다. 같은 병이라도 사람마다 다 다른 병리적인 이유가 있다.
써브웨이 알바생 꿀조합은 빵부터 소스까지 일일이 물어봐야 그 맛을 볼 수 있다. 토핑을 골라 조합하는 형식이라서 이름만으로는 같은 메뉴를 시키기 어렵다. 병 역시나 내가 어떤 습관이 있고, 어떤 병을 앓아왔고, 어떻게 살아왔는지 질문할 때 진짜 병의 모습을 알 수 있었다. 이 질문에내 병만의 고유한 이야기가 담겨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