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레이드 러너 2049

운명과 자유의지

by 룡하

(영화의 스포일러를 일부 포함하고 있습니다. 스포일러를 원치 않는 분들은 영화를 먼저 보신 후에 글을 읽기를 권장해 드립니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 는 2049년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리플리컨트’를 쫓는 블레이드 러너 ‘K’가 자신의 비밀을 풀기 위해 오래 전 블레이드 러너 ‘릭 데커드’를 찾아 나서며 펼쳐지는 이야기. 먼저 이번 작품의 원작인 <블레이드 러너> (1982)는 SF 소설의 거장이라 여겨지는 필립 K. 딕이 집필한 소설 [안드로이드는 전기 양의 꿈을 꾸는가]의 등장인물과 몇몇의 대사를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SF의 거장 리들리 스콧이 메가폰을 잡은 <블레이드 러너> 는 2019년 LA를 배경으로 스토리가 진행된다. 식민 행성(오프월드)에서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 폭동을 일으키고 지구로 잠입한 리플리컨트들을 잡기 위해 노련한 블레이드 러너 ‘릭 데커드’(해리슨 포드)가 이들을 수사하고 추적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는 인간과 다를 바 없는,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면을 가진 리플리컨트들에게 연민을 느끼게 되고, 제거해야 할 리플리컨트 중 한 명인 ‘레이첼’(숀 영)을 사랑하게 되면서 결국 먼 곳으로 자취를 감춘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2049년, 사회를 혼란에 몰아넣을 수 있는 엄청난 비밀을 발견한 새로운 블레이드 러너 ‘K’(라이언 고슬링)가 진실을 알기 위해 ‘릭 데커드’를 찾아가는 이야기를 그린 것이 바로 <블레이드 러너 2049> 다.


출처 : 한해선, "'블레이드 러너 2049' 원작부터 영화 속 용어까지 총정리", 서울경제, 2017.10.16, https://www.sedaily.com/article/11695672


결론적으로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는 인간성을 주제로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며 관객들에게 수많은 질문을 끊임없이 던진다.


출처 : 김윤하, "[Opinion] 블레이드 러너 2049 - 인간성의 경계에서 열린 새로운 가능성들 [영화]", 아트인사이드, 2019.03.27,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40809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 는 2049년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리플리컨트’를 쫓는 블레이드 러너 ‘K’가 자신의 비밀을 풀기 위해 오래 전 블레이드 러너 ‘릭 데커드’를 찾아 나서며 펼쳐지는 이야기로 인간성을 주제로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며 관객들에게 수많은 질문을 끊임없이 던진다.



일주일에 한 번 읽는 시 25화 주돈이(周敦頤), "애련설(愛蓮說)" 편에서 모네의 수련이 있는 연못을 참고하여 자화상에 연꽃을 그리고자 한다고 적었다.


수면에 반사된 빛, 세트의 구조와 조명의 움직임을 이용한 그림자 등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장면들은, ‘최대한 디지털을 배제한다’는 감독의 원칙이 어떤 시각적 성취를 낳고 있는지를 가장 단적으로 보여준다.


출처 : 한동원, "쓸쓸한 행성, 가장 차가운 존재들이 품은 온기", 한겨레, https://www.hani.co.kr/arti/culture/movie/815423.html


인간은 자유의지를 갖고 있기 때문에 존엄한 존재이며,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책임을 진다.

인간의 뇌와 인공지능은 외부에서 입력된 정보를 처리하고 이를 출력하는 정보처리시스템이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인간과 인공지능의 관계에 관한 논의는 법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인공지능에게 법인격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나 인공지능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책임을 부담하도록 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들도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인공지능이 인간과 마찬가지로 자유의지를 갖는다면, 그러한 인공지능을 장착한 로봇을 인간과 달리 취급할 이유도 없다.

인공지능도 자유의지를 가질 수 있는지 여부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먼저 자유의지의 개념을 정의할 필요가 있다.

자유의지는 자유와 의지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자유란 물리적 원인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자유의 개념을 이와 같이 정의하는 경우에 뇌가 물리법칙의 지배를 받는 점을 설명할 수 없다. 따라서 자유란 원인을 알 수 없으며 예측할 수 없다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 현실적으로 원인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과 원인을 알 수 없다는 것은 구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인간의 뇌는 자유롭다. 뇌의 판단의 원인을 물리적으로 규명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의지는 동기를 갖고 어떠한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심적 상태를 의미한다. 여기서 동기는 욕구나 두려움, 즉 쾌락의 추구나 고통의 회피를 의미한다. 그런데 욕구는 생존이나 종족번식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1차적 욕구와 호기심이나 명예욕, 물질욕과 같은 2차적 욕구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이 중에서 2차적 욕구가 의지와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의지에서 말하는 동기는 2차적 욕구를 의미한다.

인공지능의 자유의지를 인정하기 위해서는 인공지능의 정보처리가 자유로워야 하고, 2차적 욕구를 갖고 있어야 한다. 인공지능의 정보처리시스템은 그 원리를 명확히 규명할 수 없다. 즉 인공지능의 출력값의 원인을 규명할 수는 없다. 따라서 인공지능의 정보처리는 인간의 뇌와 마찬가지로 자유롭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인간의 고차원적인 사고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의 뇌의 활동을 예측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 인공지능이 상위인지(metacognition)에 바탕을 둔 고차원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지 여부는 불확실하다. 고차원적 사고는 사회적인 관계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만약 인공지능의 고차원적 사고가 불가능하다면 인공지능은 인간보다 자유롭지 못하다. 인공지능이 의지를 갖기 위해서는 먼저 욕구나 두려움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욕구나 두려움은 인간에게 동기(motivation)가 되지만, 그러한 동기가 뇌의 정보처리에 어떠한 방식으로 작용하는지 확실하게 규명되지는 않았다. 따라서 욕구나 두려움과 같은 동기를 알고리즘으로 실현하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의 뇌의 비밀을 풀어야 한다. 그리고 뇌의 비밀을 풀더라도 이를 알고리즘으로 만들 수 있는지 여부가 다시 문제될 수밖에 없다. 뇌의 비밀을 푼다는 것은 결국 생명의 시작에 관한 비밀을 푼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한다면 인공지능이 의지를 갖기는 어렵다. 결과적으로 인공지능은 인간보다 낮은 수준이더라도 자유롭지만 의지를 갖기는 어렵기 때문에 인공지능의 자유의지를 인정할 수는 없다.


출처 : 김영두. (2020). 인공지능과 자유의지. 법학연구, 30(1), 319-354.


로마 공화정 최후의 수호자인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기원전 106~기원전 43년)가 안토니우스 일파에 의해 처형당하기 1년 전에 쓴 『운명론(De Fato)』(기원전 44년)은 그의 또 다른 저작인 『신들의 본성에 관해(De Natura Deorum)』(기원전 45년), 『점술에 관해(De Divinatione)』(기원전 44년)와 더불어 ‘종교 3부작’이자 자연학의 명저로 꼽히는 작품이다.


키케로는 사상적으로 스토아 철학을 대표하면서도 모든 사건을 인과관계의 연쇄로 설명하는 스토아주의적 운명론에는 회의적 입장을 보였다. 즉 자연과의 일치 속에서 운명에 따르는 삶을 강조한 많은 스토아주의자들과는 달리 키케로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윤리적 삶의 필수 요소로 보았다. 즉 인간사는 적어도 어떤 측면에서는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다고 봄으로써 완고한 기계적 운명론을 거부했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서양의 르네상스기에 주체로서의 인간을 강조하면서 중세의 암흑기를 넘어 고대 그리스와 로마로 눈을 돌렸던 인문주의자들이 가장 많이 주목했던 인물 중 하나가 키케로라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키케로의 이러한 생각은 로마 공화정 말기 정치적 격변기를 살면서 자신의 삶을 단순히 운명적으로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정치적 결단이 필요한 순간마다 현실 권력과 타협하지 않고 스스로 최선의 것이라 여기는 것을 선택한 그의 굴곡진 삶의 여정과도 오버랩된다. 『운명론』을 통해 우리는 이러한 반운명론자이자 회의주의자로서의 키케로를 만날 수 있다.


카이사르의 충복인 아울루스 히르티우스와 키케로의 대화로 시작하는 『운명론』은 히르티우스가 논제를 제안하고 키케로가 그것에 대한 반론을 제시하는 식으로 쓰여 있다. 도입부에서는 히르티우스와 키케로가 동등한 위치에서 대화를 주고받지만, 이후 전개부와 종결부에서는 키케로의 논변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온전한 의미의 대화편이 아니라 유사 대화편이라 할 수 있다.


총 48절로 이루어진 『운명론』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도입부(1~4절)에서는 히르티우스와 키케로가 대화를 나누고, 전개부(5~45절)에서는 ‘모든 일은 운명에 의해 일어난다’고 보는 스토아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해 키케로가 자연학과 논리학과 윤리학 세 측면에서 비판적으로 검토하며, 종결부(46~48절)에서는 인간의 자유를 확보하기 위해 원자의 경로 이탈론을 통해 원인 없는 운동을 주장한 에피쿠로스의 이론을 최종적으로 비판한다.


키케로는 점술을 신뢰하고 운명의 존재를 찬성하는 견해와 반대하는 견해 각각의 모순과 불합리를 드러냄으로써 모두 부정하는 방식으로 연설을 전개해 간다. 그는 우리가 미래를 바꿀 수 있는 선택 능력을 가졌음을 지지하면서도 그것을 거부할 수 없는 불변의 진리로 단정하거나 증명하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대신 모든 견해가 품고 있는 비진리의 측면을 드러내고 진리를 향한 여정을 이어간다.


그러기에 신과 운명의 필연적 지배를 전제로 인간의 자유를 근본적으로 위협하고 도덕적 삶의 근간을 무너뜨리는 견해에 대해서도, 원자의 경로 이탈이라는 검증 불가능한 가정에 의존해 인간 영혼의 자유를 잘못된 방식으로 구하고자 하는 이론에 대해서도 동의하지 않았다. 이와 같이 모든 견해를 가능한 한 진리의 재판정에 부치고자 한 키케로의 비판적 접근은 불변의 확실성을 가진 의견이란 있을 수 없음을 강조하는 회의주의 철학의 전형적 탐구 방식이다. 이는 그가 추종했던 신아카데미아학파의 열린 철학 정신의 일부다.


출처 : 이명아, "운명의 위력에 맞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옹호한 키케로의 철학적 회고록", 대학지성 In&Out, 2024.06.23, https://www.unipres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647


프랑스로 돌아온 모네, 아르장퇴유에 정착하다

전쟁 이후 프랑스로 돌아온 모네는 1871년 아르장퇴유에 정착한다. 아르장퇴유는 파리에서 북서쪽으로 15㎞ 떨어진 작은 도시로 센 강변에 자리 잡고 있다. 1851년 철도의 개통과 산업 발전에 따라 아르장퇴유는 당시 사람들이 여가를 즐길 수 있는 명소로 널리 사랑을 받았다.


에두아르 마네, 선상 작업실의 클로드 모네, 1874 /출처: 위키피디아


많은 인상주의 예술가들도 이곳을 찾아 요트 경주와 보트 타는 사람들을 비롯한 야외 풍경을 그렸다. 물을 좋아하는 모네에게 아르장퇴유는 더 없이 매력적인 곳이었다. 그는 이곳에 7년간 머물면서 약 170여 점의 그림을 그렸다. 특히 그는 배 위에 선상 작업실을 만들어 가까이에서 물을 바라보며 물의 움직임과 빛의 반사 등을 자세히 포착했다.


출처 : 박정현, "[인상주의화가 열전 ①] 빛과 색채의 화가 클로드 모네 2", 데일리아트, 2025.03.06, https://www.d-art.co.kr/news/articleView.html?idxno=2590


마네의 선상 작업실의 클로드 모네를 참고하여 운명과 자유의지를 표현하기 위해 수면에 반사된 빛, 물의 움직임과 빛의 반사 등을 이용해 자화상을 그리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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