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해가 가려진 파도 위에서 물질하는 해녀를 보았다. 도저히 낮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해는 구름을 타고 넘어가 있었고 비는 내 머리 바로 위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저렇게 사나운 바다에서 물질을 해도 괜찮은 걸까. 어째서 당신은 이렇게나 고된 날씨에 물질을 하고 있을까. 꼭 물질을 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을까. 왜 하필 그것이 오늘이며 혼자서라도 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을까.
바다와 하늘이 닮은 이유가 궁금한 만큼 그 해녀의 물질이 궁금했다.
바로 전날에는 해녀박물관에 갔었다. 모든 해녀들의 삶과 인생과 모든 생활들이 그려져 있었다. 특히 그곳에서 재생되는 그들의 인터뷰는 그 모든 것의 총집합이었다.
물질을 보고 처음 시작했을 때부터, 그것이 직업이 되고 인생이 되고 일생이 되기까지. 그들의 물질은 바다를 안는 것뿐만이 아니라 가족 모두를 안는 것이었다. 출산날까지도 물질을 했고, 아이를 보고도 5일이 인되어서 바다에 들어갔다고 한다. 어째서 그렇게나 물질을 했을까.
그들에게 물질은 당연한 것이었다. 바다가 곧 일생이었다. 그렇게 했어야만 했던 것이다.
또한 그들의 물질은 한이었다. 한국인의 "한의 정서"는 그들 역시 포함이었다. 바다가 고요한 노래를 부르든 세차게 소리를 치든 그들에게는 그저 물질 한 번이었다. 때문에 일생이었고 한이었다. 그래서 육지에서 논을 가는 것처럼 그들도 노래도 부르고 굿도 했다.
"이여사나 이어도 사나
이여사나 이어도 사나
우리 배는 잘도 간다
솔솔 가는 건 솔남의 배여
잘잘 가는 건 잡남의 배여
어서 가자 어서어서"
어머니에게서 딸로 이어지는 해녀는 "이어 사는 삶"이고 "이어도 사는 삶"이다. 그들의 물질은 이상향을 향한 물질이었다. 삶을 영위하고 이상향을 바라보는 행위. 육지에서 살아가는 20대인 나는 그것을 상상하기가 힘들다.
"저승에서 벌어 이승에서 쓰는 직업"
흔히들 해녀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들의 의지를 어머니로서, 부모로서의 의지인 걸까 비다와 한평생을 살겠다는 의지인 걸까.
바다를 꿈꾸는 나에게 바다와 일생을 같이 한 그들이 점점 더 거대해 보였다. 지금 내 눈앞의 물질을 하는 한 어머니가 거대해 보였다.
낮의 햇살 대신 비를 맞고
바닷바람 대신 파도를 맞고
이부자리 대신 바닷속을 보고
자식들을 안는 대신 물살을 안았다.
이여사나 이어도 사나
이어
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