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연유도 없이 우주는 생겨났습니다. 45억 6700만년 전 우주의 어딘가에 생겨났다는 지구는 스스로 회전하며 어느 부분은 밝아지고, 어느 부분은 칠흑같은 어둠에 휩싸이기를 반복합니다. 무한에 가까운 반복. 이 미지의 질서를 인간은 시간이라는 개념으로 쪼개어 묶었습니다.
그 개념에 따르면 지금은 오전 7시입니다.
높고 가파른 알람소리가 여자 지구인 a의 뺨을 때립니다.
간밤에는 얕은 두통과 함께 짧은 잠이 반복되었습니다. a가 기억하기로는 정확히 만 25세가 지날 무렵부터 아침을 들어올리는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젊음의 허리를 두 동강 낸 것만 같은 25세. 그 25세를 기점으로 세상은 한꺼풀 벗겨졌습니다. 왜 벗겨져야만 했을까요, a는 10년동안 그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30대 중반을 넘어가는 나이만큼 일터의 열정은 낡아서 바스라져가고 있었지만 a는 회사를 그만두지 못했습니다.
a의 옷장은 무채색입니다.
오늘은 a가 가장 좋아하는 검은 원피스를 입고 출근을 합니다.
‘더 나이 들기 전에’ 좀 화려한 색의 옷을 입어보자고 굳은 결심을 하고 쇼핑에 나서도 손에 들려 있는 물건은 검거나 희거나 그 중간 어디쯤의 색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느 시점 이후로 a는 자신이 무채색 인간임을 인정하기로 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이 검은 원피스는 상의는 니트로 되어 있고 하의는 면으로 되어 있어 오묘한 질감의 차이를 느낄 수 있었고 허리춤에는 가녀린 허리끈이 달려 있었습니다. 상의는 심연처럼 검었지만 하의는 약간의 부드러운 먹색을 품고 있었습니다. a는 이 옷처럼 살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검은 원피스는 화려한 삶을 살면서 남들의 선망을 받고 쟁취할수록 갈구하는 욕망덩어리 인간보다는 구태여 곰곰히 뜯어보고 들춰봐야지만 그 내실을 알 수 있는 조용한 사람의 태도와 닮아 있다고 느꼈습니다.
물론 그것도 일종의 허영이라는 것을 a는 모릅니다. 게다가 a는 마음에 드는 옷이 있으면 꼭 두 벌씩 사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한 벌이 점차 번들거리고 낡아가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조바심을 느끼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아마 자녀를 두 명 이상 낳는 부모의 마음과 어느 정도 비슷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a의 머리를 스쳐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