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발견한 하루? 어쩌다 발견한 위로
이런 드라마는 처음이다. 순정만화의 주인공을 주연으로 내세우는 드라마는 봤어도, 조연이, 그중에서 이름도 없는 등장인물이 주연인드라마는 지금까지 본 적 없었다. 초기 설정도 신선했다. 만화 속 주인공들이 자아를 하나 둘 찾게 되어 운명을 바꾸겠다는 목표를 가지게 되고, 그 거대한 목적의식하에 극이 전개되는 것. <어쩌다 발견한 하루>는웹툰 <어쩌다 발견한 7월>을 드라마화한 것이라 대부분의 설정은 서로가 공유하고 있었음에도, 신선한 연출과 탄탄한 출연진들의 연기력은 시청자들의 기대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어쩌다 발견한 하루>는마냥 재미있는 연애 학원물로만 다가오지 않는다. 장면마다 새겨져 있는 세심한 연출은 물론, 제게 주어진 고정관념적인 설정값을 탈피하려는 은단오의 주체적인 모습과, 주연이 아닌 조연임에도 자아를 찾고, 지워지지 않으려고 애쓰는 인물들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도 많이 닮아있어 묘하게 끌린다.
너무 당연하게 모든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 주인공이 아니라, 조연도 이리 당찰 수 있음을 보여주고, 또 그러한 모습을 집중 조명하는 <어쩌다 발견한 하루>. 시청자들이 여기에 공감하고 또 위로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웹툰 속의 은단오와 13번은 철저한 조연이다. 특히 13 번은 만화 속에서 이름도 가지지 않은, 심지어는 외형상 눈과 코, 입도 제대로 그려지지 않은 군집 속의 한 명일뿐이다. 단오는 그에 비하면 차라리 이름은 가지고 있어 낫다고 보아야 할까, 허나 주어진 설정값을 살펴보면 꼭 그렇지도 않았다. 예컨대 어려서부터 어머니를 잃고, 앓아온 심장병은 계속 악화되고 있으며 몇 년간 짝사랑해 온 약혼 상대는 저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 정말이지 단오의 극 중 대사를 빌려서 말하자면, 정말 ‘불쌍하기 짝이 없는’ 설정이다.
그래서 자아를 찾게 된 단오는 이리도 기구한 제 운명을 바꿔놓겠다는 다짐을 한다. 보통의 캐릭터라면, 그렇게 한 다짐은 주인공을 향한 열망으로 구체화된다. 시대와 국가를 막론한 모든 콘텐츠에 담긴 이야기의 전개 양상이 그러했다. ‘내 운명을 바꾸어보겠어’의 다짐은 대체로 조연에 머물러있는 제 위치를 전복시키겠다는 의미로 주연의 모든 설정을 답습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허나 은단오는 달랐다.
10년 짝사랑이라는 백경을 향한 애달픈 관계를 바꾸기보다, 조연밖에 되지 않는 제 처지를 주인공으로 바꾸려 하기보다, 뛰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제 심장을 살리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애초에 만화가 전개되는 ‘스테이지’와 극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쉐도우’라는 양분된 공간 자체를 부수고자 한다. 극적 효과를 위해 작가가 부여한 설정값이라면 분명 바꾸는 것도 가능하다고 믿는 단오의 신념은 꽤 완고하다. 이처럼 은단오는 전형적이지 않다. 기존 서사가 채택하는 조연 내지 비주류의 모습과는 상이한 결을 가지고 그 속에서 계속해서 성장해나간다.
그리고 그 중심엔 13번이 있다. 앞서서도 말했듯 13번은 이름도 가지고 있지 않은, 굳이 따지자면 단오보다 더 존재감이 없는 조연이다. 아니, 조연도 아닌 차라리 스쳐 지나가는 찰나의 순간에만 등장하는 엑스트라에 가깝다. 하지만 단오가 간혹 예지 할 수 있는 미래의 장면이, 이 13번을 만나면 변화한다. 그래서 단오는 13번을 계속해서 찾아 나선다.
닿지 않을 것 같던 13번과의 만남은 언제나 그렇듯 단오가 도움이 필요한 순간마다 찾아온다. 이번엔 놓치지 않으리라는 다짐에 결국 13번을 붙잡은 단오는 자신을 까먹지 말라며 제 소개를 하고., 그 소개는 매번의 만남마다 이어진다. ‘안녕, 난 은단오야’로 시작되는 만남은 시간이 지나면서 켜켜이 쌓여가고, 둘은 점점 가까워지고, 그리고 단오는 13번에게 이름을 지어준다. 바로 하루.
명명이란 생각보다 꽤 큰 의미를 갖는다. 특히나 그것이 원래는 이름조차 없었던 대상에게 부여되는 행위라면 더욱 그러하다. 하루라고 지어진 이름은 단순히 13번이라는 인물을 식별하는 기능을 넘어, 존재 가능성 자체를 증명해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말인즉슨 스테이지와 쉐도우 속에서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던 엑스트라에게 함께 걸어 나올 수 있도록 손을 내민 것과 같다는 것으로, 일종의 변화의 첫걸음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극 중에선 진미채가 화를 낸다. 본디 이름도 없었던 것들에게 이름을 붙여주게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아느냐고, 모든 것이 뒤틀리게 되고 또 변하게 될 것이라고. 하지만 그럼에도 단오는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하루라고 이름을 부른다.
이름조차 없는 엑스트라에게 이름을 지어주며 함께 사라지지 말자고, 이전처럼 돌아가지 말고 우리에게 주어진 운명을 바꾸어보자고 하는 단오를 보며 마음이 괜히 시큰했던 건 왜일까. 마치 지금의 세상에서도 너무 당연한 것조차 얻지 못하고 순응해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해 던지는 격려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 건 왜일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모든 것의 내용은 이름을 통해 비로소 이해될 수 있다. 허나 그러한 이름조차 알 수 없다면 그것은 더욱 애달플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있어서 이름을 안다는 것은 존재 가치의 증명과도 같지 않을까, 명명은 이처럼 단순히 이름을 지정하는 것을 넘어 기억 못 해주는 세상에서 나만큼은 널 기억하겠다는 모든 엑스트라들을 향한 묵직한 한 방의 메시지가 된다.
사실 모두가 그렇게 살아간다. 적어도 그러한 경험은 해 본 적 있을 것이다. 온전한 내 인생을 살아간다고 생각했지만, 정신 차려보니 이도 저도 아닌 곳에 속한 애매한 들러리로 사는 것 같고, 화려하게만 보였던 현실이 사실은 더 비중 있는 주인공을 위해 철저히 계획되어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적. 어떤 거창한 설정이 아닌 단오의 세계는 우리의 세계와도 많이 닮아있다. 그래서 더더욱 공감이 갈 수밖에 없다.
코믹한 순간과 두근거리는 순간, 안타까운 순간과 답답한 순간 등이 연달아 등장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서로가 서로를 놓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오로지 조연들이 직접 제 운명들을 결정하고 개척해나가며 또 성장해나가는 순간만큼은 아무도 그들을 방해하지 않았으면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철저한 조연들만의 공간 속에서 살아가는 이 세상의 모든 조연들이 행복할 수 있기를, 그것을 바라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널 중심으로 세상을 봐,
그러면 네가 주인공이니까.
그래서 단오가 한 이 말이 참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모든 것이 변화하고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없어 보여도, 심지어는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 해도 결국엔 정해진 답이 있는 것 마냥 흘러갈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잃어서는 안 된다. 흔들리는 중심 속에서도 오로지 자신을 중심에 두고 살펴야 한다.
그래서, <어쩌다 발견한 하루>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작은 것들을 위한 시이기도 하다. 아직 8회까지밖에 방영이 되지 않은 시점에서 모든 스토리들을 알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자아를 가지게 된 조연들의 이야기라는 것, 그러한 모두에게 던지는 위로라는 것만은 어렴풋이 짐작이 간다.
모든 조연과 엑스트라를 위해, 불문율로 지켜지는 세상의 섭리를 벗어나 당당하게 내 중심을 지켜내자고 말하는 단오, 그런 단오를, 하루를 응원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러한 당신을 응원한다.
조금 작은 우리들은 분명 해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