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왼손잡이앤 Mar 17. 2022

사라진 줄 알았던 그 남자는 멋진 가장으로 돌아왔다.

어설픈 여자의 결혼 이야기 16

그날도 아이들을 재우고 거실로 나왔다. 벌써 밤 12시

2시간마다 이유 없이 깨서 울었으니 이제 딱 2시간의 여유가 생겼다.

싱크대 가득한 설거지와 빨래들 그리고 엉망인 거실들.... 이제 집안일을 할 시간이다.

나는 맨 정신으로는 힘들어서 냉장고에서 맥주 한 캔을 꺼내서 조용히 식탁에 올려놓았다.


삐삐 삑~ 철컥

그 남자가 퇴근을 하나보다.

그 남자가 불을 켜고는 깜짝 놀라서 나를 쳐다봤다.

나는 불도 켜지 않은 채 캔맥주를 앞에 두고서 혼자 식탁에 앉아있었으니 놀랄만도 하다.


조용히 다가와서는 나는 안아주었다.

"미안해 00야, 내가 결혼하자고 꼬셔놓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나는 네가 돈걱정 안 하고 살고 싶다고 해서 진짜 열심히 일하는 중이야.

내가 많이 못 도와줘서 미안해. 하지만 나랑 살면서 평생 돈 걱정은 안 하게 해 줄게."


나는 눈물을 닦으면서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이야? 내가 언제?"

그 남자는 맥주 캔을 대신 따서 주면서 대답했다.

"그리고 조금만 더 기다려줘. 우리도 길 건너 더 넓은 평수로 이사할 수 있을 거야"




2014년 1월 1일


새해 첫날 우리는 해돋이를 보기 위해서 새벽 3시부터 호미곶에 도착해서 벌벌 떨면서 서있었다.

"너는 소원이 뭐야?"

"저요? 글쎄요?

 음~~~ 살면서 내내 돈 걱정하면서 살았던 거 같아요. 언젠가는 돈 걱정 안 하고 살 수 있겠죠?"

나는 별생각 없이 말했는데 그 남자가 갑자기 나를 꼭 안아주었다.


연애할 당시 내가 했던 말인데... 설마.... 이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던 건가?





2017년 8월


"어디야? 뭐해? 애들은?"

그 남자가 묻는 3종 세트 질문이었다.


"오늘은 길 건너 00 언니 집에 놀러 왔는데 여긴 우리 집보다 거실이 엄청 넓고 좋아."

내가 무심코 내뱉었던 그 말을  그 남자는 내내 생각했던 것이다.

 

그 당시 우린 24평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나는 32평 동네 언니네 집에 가보니 거실이 진짜로 넓어 보여서 그냥 감탄한 것뿐이었는데..

그 남자는 그 걸 또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그렇게 그 남자는 나의 말 때문에 일 중독자처럼 일을 많이 했나 보다.

그 남자는 허투루 말한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 남자는 그렇게 혼자서 가장이 되어 갔다.


결국 우린 2018년 8월 길 건너에 있는 32평 아파트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2018년 9월

"오빠는 괌이 어딨는 줄 알아? 오늘 같이 일했던 선생님이 괌에 다녀왔는데 그렇게 좋다고 하시던데,

그 선생님이 준 초콜릿이야. 먹어봐 엄청 맛있어."


나는 그 당시 괌이 어딘지 몰랐고 그냥 진짜 물어본 거였다.

그렇게 나는 난생처음 고디바 초콜릿을 맛보면서 그 남자에게 반을 먹여주었다.


나는 그게 부러워서 그렇게 말한 게 아니었지만, 그 남자 귀에는 다르게 들렸나 보다.

그 남자는 혼자서 내내 또 그렇게 준비를 했나 보다.


2019년 9월

우리는 괌으로 가족여행을 가게 되었다.


나는 그 뒤로 그 남자의 스타일을 알게 되어서 항상 말조심을 했다.

뭐가 좋다더라 누가 부럽더라 누가 어디 갔다던데 이런 말을 일절 하지 않았다.

나의 소소한 수다가 그 남자에게는

'나도 가고 싶다 , 나도 갖고 싶다,  너무 부럽다 '

이렇게 인식이 되는 거 같아서 최대한 말을 아꼈다.





연애할 때 그 멋지던 오빠는 임신 출산을 겪으면서 사라져 버렸다.

그 남자를 다시는 볼 수 없음에 나는 참 많이도 울었다.

내가 왜 결혼이란 걸 선택했을까 하는 철없는 생각도 많이 했었다.


하지만 그건 내 착각이었다.


민들레꽃이 피고 나서 꽃잎들이 다 시들어 버리면 다 사라진 거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모인 꽃 사개 잎이 길어져서 씨앗이 여물 때까지 씨앗을 지킨다.

꽃이 지고 10일이 지나면 씨앗이 여물고 나면 하얀 갓털이 핀다.

그 하얀 갓털은 바람이 불기를 기다리고는 날아간다.


결코 사라진 게 아니라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코스모스 같던 내가 사라지고 강한 엄마로 태어났듯이

멋진 그 남자도 사라지고 그 자리에 책임감 강한 가장 태어난 것이다.


결혼이라는 게

어찌 보면 예쁜 꽃같이 보일지도 모른다

그저 향기롭고 예쁘고...


하지만 막상 결혼을 하게 되니

그 꽃은 피우기 위해서 땅속에 뿌리들이 얼마나 많은 시간

차디찬 땅속에서 스스로를 지켜내는지를 알게 된다.


우리는 그렇게 진짜 어른이 되어가는 것 같다.



이전 15화 육아는 나를 벼랑으로 밀었지만 나는 넘어지지 않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