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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현 Oct 03. 2019

기생충 (영화)

‘저’ 세계 공포에서 ‘이’ 세계 공포까지

 ‘기생충... 역시 봉준호’ 연출, 시나리오, 음향, 배우와의 호흡 등이 훌륭하다 어쩌네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번 영화도 봉준호 영화다.’ 하지만 이 찬사의 서늘함은 봉준호 그 이상의 무엇을 보여주진 못했다는 의미가 있다. 어쨌든 나는 다른 관점에서 이 영화를 보고 싶다. 그렇기에 먼저 공포영화에 대해 글을 적어볼까 한다.

 로맨스, 스릴러, 코미디, 액션 등 영화를 장르별로 나누는 것의 의미는 관객이 영화를 좀 더 쉽게 선택하기 위함일 뿐 구분하는 엄밀한 기준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공포영화, 다큐멘터리 영화 이 두 장르의 영화는 앞서 말한 의미보다 더 많은 것들을 내포해 있다. 직관적으로 구분할 수 있는 특징들을 가지고 있으며 감독 또한 구분된 장르의 규칙 안에서 영화를 만들어 낸다. 그 중 공포영화는 최근 들어 꽤 견고하게 지켜졌던 규칙이 흔들리고 재정립이 요구되고 있다. 우리가 ‘저 영화는 공포영화야’라고 쉽게 판단할 수 있는 여러 특징들은 영화 자체가 관객에게 공포감을 주기 위한 감독의 의도가 담겨있기 때문에 나타난다. 여러 눈에 띄는 특징들이 정립되고 평가받으며 공포영화 장르가 탄생했다고 보는 것보단 이미 관객에게 공포심을 주기 위한 감독의 의도가 있었고 뒤이어 부수적인 특징들이 필요에 의해 생겨났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하나의 의문이 생긴다. 우리는 왜 구태여 공포라는 불쾌한 감정을 느끼기 위해 즉 감독의 의도를 충분히 인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포영화를 보는것일까? 또한 왜 감독은 의도적으로 공포감을 생성시키기 위해 노력하는가? 혹자는 말한다. 우리가 슬픈 영화 같은 불쾌한 감정을 주는 예술을 즐길 수 있는 이유가 그 대상과 나와의 적당한 거리가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저 영화 속 가련하게 죽어가는 사나이가 슬프지만 우린 저 사나이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의 삶에 실질적인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기에 즐길 수 있다고 말한다. 난 이런 비겁한 논리에 동의할 수가 없다. 나는 올드보이 오대수의 비극을 절절하게 느꼈고 해피투게더 여휘의 그 쓸쓸한 이별에 강인함을 느끼며 앞으로의 여휘의 인생을 축복했다. 나는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미친놈이 아니다. 나는 그저 훌륭한 영화에 거리를 두지 않고 몰입할 수 있는 감수성을 지닌 것뿐이다. 나는 내가 가진 이 감수성이 특별하다고 보지 않는다.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는 바보 같은 짓만 하지 않는다면 모두가 누릴 수 있는 보편적인 인간의 능력이라고 본다. 나는 훌륭하게 제작된 비극의 예술들 덕분에 실제로 비극을 느끼고 고통스러워한다. 그럼에도 그러한 것을 찾아보고 즐겨보는 이유는 그러한 종류의 비극을 내가 감당할 수 있다는 나의 내재된 힘을 느끼기 때문이다. 큰 슬픔 혹은 불쾌한 감정이 수용되는 동시에 해소되고 이해되기 위해 내 안에 있는 삶을 긍정하려는 힘은 부단히 싸우며 큰 성취를 이룩해낸다. 나는 여기서 커다란 흥분과 즐거움을 유희한다.(희극 또한 마찬가지라고 본다. 물론 비극보다 수용하기 쉬우며 그만큼 성취감이 줄어든다.) 그러니 나는 감독에게 찡얼찡얼 부탁하게 된다. ‘나를 당신의 예술에 몰입할 수 있게끔 도와달라 나는 열에 들뜨도록 그것을 원합니다.’

(오원배의 작품)


 내가 공포영화 장르에 관심을 갖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공포영화는 끊임없이 관객이 영화에 몰입할 수 있게끔 많은 실험적인 연출을 시도했다. 심지어 허구적인 이형의 존재를 상정하며 그 조차도 관객이 만족스러운 몰입감과 함께 수용할 수 있게끔 말이다. 그 결과 우리는 사람 피를 빨아먹으며 살아가는 박쥐인간, 텔레비전을 뚫고 우리에게  기어 오는 여자, 괴상한 빨간 머리에 식칼을 든 인형 등에 공포를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과거의 영광일 뿐이다. 우리는 더 이상 공포영화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여름에 뜨거운 삼계탕 한번 먹듯이 습관 삼아 소비할 뿐이다. 무엇이 우리를 공포영화에 등을 돌리게 만들었는가? 나는 그 이유를 이형적 존재들의 변천에서 찾고 싶다. 우리는 단순히 이형의 존재이기 때문에 무서움을 느끼지는 않는다. 북유럽 신화, 그리스 로마 신화, 인도 신화 등 전설적 신화 속 이형의 존재들에게 공포영화에서 느낄 수 있는 무서움을 기대하기는 힘들다. 무서움보다 경외심에 가까운 감정을 느낄 수 있다. 그들은 커다란 힘을 상징한다. 관대함과 폭력이 혼재하며 도덕조차 발 아래 둘 정도의 거만함, 한낱 인간으로서 예측하기 힘든 변덕스러움, 명령과 복종이라는 질 낮은 상하관계조차 초월할 정도의 강력한 힘을 그들은 지니고 있다.이런 존재에게 공포를 느낄 여유 조차 없다. 그저 무겁게 짓눌리는 압박감 혹은 우리에게 시선조차 던지지 않는 잔혹한 아름다움을 느낄 뿐이다. 공포는 다가옴이란 운동이 있어야 생성된다. 공포적 존재와 가까울수록 공포는 증가된다. 그들은 그렇지 못하다. 거리감 조차 느껴지지 않을 만큼 아득할 뿐이다.

 이러한 강력한 힘을 소유한 그들을 방구석에 조용히 먼지가 쌓이길 기다리는 피규어 신세를 지게끔 만든 존재가 있다. 그리스도교의 출현이다. 가시로 된 왕관을 쓰질 않나 채찍질당하며 이리저리 끌려다니고 심지어 나무 판때기에 못이 박혀 박제가 되기까지 한다. 과연 이 이형의 신은 무슨 힘으로 이 세계를 제패하였을까? 그는 압도적인 힘을 내려놓고 인간계로 떨어졌다. 그렇게 나약한 신을 자처 하며 그는 인간의 삶에 개입을 하였고 도덕이란 계율을 이룩했다. 도덕적인 것이 곧 힘이 되는 경이로운 마술을 선보였다. 나는 이 도덕이 힘이 되는 과정의 틈에서 우리가 공포영화에서 볼 수 있는 이형의 존재들이 탄생했다고 본다. 공포영화에서 볼 수 있는 이형의 존재들의 공통점을 생각해 보자면 끈덕끈덕한 원한에 사무 친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아시아 쪽에서는 귀신으로 유럽 쪽에서는 엑소시스트나 악귀로 흔히 묘사된다. 그들의 힘의 원천은 삶에 대한 강한 집착이다. 이러한 삶에 대한 집착적인 모습은 이데아를 꿈꾸며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최대한 도덕적으로 살아가는데 목표를 두고 있는 그리스도교 입장에서 본다면 바보들이며 그 정도가 지나쳐 위협이 되면 무서운 존재로 여겨진다. 또한 그들의 신념조차 흔들어 버린다. (그렇기에 그리스도교들에게 그렇게나 많은 유혹들이 존재하고 거기에 맞서 싸우나 보다.) 도덕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행위가 아니다. 그러니 우리는 지켜야 한다고 힘껏외치거나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한다. 자연스러움에서 벗어날수록 우리가 딛고 서 있는 대지에서 우리의 발은 붕 뜨게된다. 대지와 우리의 발 사이의 틈에서 온갖 이형의 존재들이 쏟아져 나온다. 이형의 존재들은 끊임없이 우리 발을 끌어 당긴다. 발을 다시 지면에 닿게하기위한 욕망과 더 높이 올라가려는 욕망의 싸움이 끊임없이 벌어진다.

 자 이제 여기서 니체의 사상을 인용해보자 니체는 신이 죽었다고 선언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영화 속 이형의 존재들이 과거의 영광으로만 빛을 내는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니체의 선언으로 우리는 쓰는법을 잊어버린 발을 다시 쓰도록 강요받았다. 이미 퇴화해버린 근육을 다시 써야 한다니....우리는 삶을 살아갈 의욕을 잃었으며 니힐리즘과 냉소주의 사상이 지배하기 시작했다. 거기서 니체는 외친다 삶을 긍정하는 강한 힘을 가지라고!

(박상희의 고린도전서 13장14절)


 니체의 신이 죽었다는 선언에 우리는 동의할 수 있다. 아니 동의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온몸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있다. 우리는 여전히 유토피아를 꿈꾸고 우리를 이끌어 줄 존재를 원한다. 니힐리즘과 냉소주의가 판치는 세계에 살아간다는 것은 너덜너덜한 걸레의 인생을,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하고 죽어가는 벌레의 인생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어찌 저 불구덩이 속으로 당당하게 발을 뻗을 수 있겠는가 어찌 저 괴상망측한 영화 속 이형의 존재가 되고 싶겠는가 니체는 발을 뻗은 이들에게 삶을 긍정하는 강한 힘을 가지라는 지푸라기 조차 안 되는 충고 하나 던져 줄 뿐이다. 고독, 기만, 불평등, 폭력, 절망 등은 스스로 이겨내야 한다. 이 모든 아픔은 강하기에 이겨낼 수 있는 것들이 아닌 이겨내면 강해지는 것이기에 무엇 하나 쉬운 것 따윈 없다. 신이 죽었다는 것에 동의하는 순간 뒤로 물러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앞으로 전진하든가 자신의 비겁함에 질식할 뿐이다.

(김태권 화백의 가시밭)


나는 영화 속 이형의 존재들이 더 이상 관객에게 무서움을 주지 않게 된 것을 보았을 때 다들 훌륭하게 전진하고 있음을 느꼈다. 공포 영화의 기묘한 사건들의 원인을 이형의 존재로 삼는 순간 관객은 몰입하기가 힘들어진다. 더 이상 그들은 무섭지가 않다. 영화 분장기술의 진보로 더 잔인하게 더 사실성 있게 꾸며도 역겨울 뿐 무섭지가 않다. 우리는 신이 죽었다는 것을 알아 버렸고 꽤나 전진해버렸다. 이제 이 같은 이형의 존재는 코미디적 요소 혹은 영웅적 요소로 재 사용되고 있으며 스릴러적 요소로 간간이 위엄을 보일 뿐이다. 이렇게 이전에 비해 훨씬 친근하게 여겨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공포감을 주기 위한 감독의 의도는 어떻게 해소되어야 하는가? 이렇게 공포영화는 사장되어야 하는가? 나는 이 같은 질문의 해결로서 기생충을 보고 싶다. 부잣집에 기생하는 영화 속 인물들의 삶에 대한 강한 집착 이전 공포영화에서는 이형의 존재로 표현되던 것이 이제 엄연한 사람으로, 우리들로 표현되고 있다. 그들의 삶에 대한 강한 집착에서 뿜어져 나오는 온갖 혐오스러운 행동에 무서움이 서려 있다. 그들의 행동에 단순히 눈쌀만 찌푸리는 관객이 존재할까? 혹여 있다면 그들은 자신의 삶을 살아가지 않는 죽은 자들일 것이다. 영화 속 기생충들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갖가지 행동 혹은 생각들은 우리 역시 가지고 있다. 부자를 혐오하는 동시에 선망하는 비열함,  나의 아늑함을 위해 남의 고통쯤이야 짓이기는 무관심, 살인까지 저지를 수 있는 폭력성 등 이 모든 기질은 우리 안에서도 도사리고 있다. 우리와 저 영화 속 인물들 간의 차이점이 불명확해질 때 무서움이 생긴다. 지면에 발을 딛고 산다는 것은 자신의 발이 더러워진다는 것 까지 감수한다는 것이다. 끊임없이 저 더럽고 추악한 감정을 받아들이고 포용하며 이겨내야 한다. 진정 저 이는 저 같은 추악함을 가지고 사는 것인가? 진정 이 추악함이 나에게 존재하는 것인가? 직시하는 순간 무서움은 당연한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훌륭하게 전진해야 한다.

(박능생의 산타기)


 기생충은 공포영화의 장래에 밝은 길 하나를 제시해 주었다. 이 점에서 ‘갯 아웃’ 역시 큰 역할을 했지만 ‘갯 아웃’에서는 아직 커다란 힘에 대한 미신적 열망이 남아 있다는 점을 본다면 기생충이 더 훌륭하다 평하고 싶다. (물론 연출이나 다른 관점으로 두 영화를 비교하면 우열을 가리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두 영화 다 훌륭하다.) 굳이 ‘갯 아웃’을 폄하하며 기생충을 띄울 필요는 없지만 이것이 나의 추악함이니 어쩔 수 없다.

 앞에 주절주절 길게 떠들게 만든 것은 사실 기정의 죽음에 대한 의문이었다. 기택 가족의 악행에 대한 일침이라기엔 감독이 기택 가족을 바라보는 시선에 존경과 사랑이 묻어 있고 관객에게 슬픔을 고조시키기 위해서이기엔 기정의 죽음에 특별한 연출이 소모되지 않았다. 기택의 살인에 대한 개연성 때문이었을까? 사실 기택의 분노는 자신의 삶을 한없이 경멸하는 동익의 태도였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기정의 죽음은 영화 속에서 큰 의미가 없다고 보여진다. 그럼에도 감독이 기정의 죽음을 택한 이유는 기정이 가족 구성원 중 삶에 대한 집착이 가장 나약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영화에서 정확히 명시하진 않았지만 기정이 자신의 삶을 도피했거나 혹은 도피하고 있다는 암시가 기우와 민혁의 대화에서 감지된다. 또한 가족끼리 술을 마시는 장면에서도 그러한 뉘앙스를 다분히 풍기고 있다. 감독은 삶에 도피적인 기정의 태도에 존경과 사랑을 담은 죽음을 선사한다 이렇게 기정의 죽음을 해석하는 것이 과한 해석에 비약적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것이 또한 나의 추악함이니 어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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