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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현 Oct 14. 2019

비평가

앞으로 내가 쓸 비평

 나는 땅에 묻히기 전에 비평가라는 꽃과 함께 묻히고 싶다. 비평가로서 인기와 명성을 얻어 많은 사람에게 인식되고 싶은 커다란 욕망 같은 것은 아니다.그저 날 알고 있는 몇몇의 주변인들이 나의 비평가적 기질을 인지해 줬으면 한다. 훌륭한 비평글을 썼다는 인정 또한 바라지 않는다. 그저 그들이 나의 이름 석자를 떠올렸을 때 비평가란 단어 또한 떠올려 줬으면 한다. 질 좋은 수의를 입고 싶은 욕망, 죽기 전에 꽃 한 송이 가슴에 올려놓고 죽는 아나키스트의 욕망 그... 비슷한 것을 나는 바란다.

 내가 쓴 비평글이 누군가에게 읽힐 것이다.(여기엔 나의 글이 충분히 읽을만한 가치가 있다는 거만함이 있다.) 여기서 나의 주관적인 비평의 정의에 대해서 말할 필요를 느꼈다. 최대한 독자와의 거리를 좁히기 위한 노력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침묵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침묵엔 혼자서 위대해지겠다는 결의가 서려있다. 서슬 퍼런 고독의 일침을 무한히 받아치며 속으로 외치는 것이다 '나는 위대하다' 내가 더 이상 비평을 쓰지 않을 때 나는 속으로 외치고 있을 것이다 '나는 위대하다'

 아직 침묵을 할 수 없으니 실컷 떠들어보자 비평글은 과연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느냐?라는 질문부터 해보자 훌륭한 예술을 경험하고 거기에 대한 자신의 감상을 정리하는 행위는 이해할 수 있다 해도 타인이 굳이 그 자전적 행위를 지켜봐야 할 이유는 무언가? 타인의 비평을 보기보단 자신이 직접 훌륭한 예술을 경험하는 것이 더욱 바람직하지 않은가? 비평을 보는 것이 자신의 경험 그 이상 혹은 그와 비등한 의미를 가지는 것인가? 비평에 그 정도의 의미가 존재하지 않다고 한다면 비평의 궁극적 목적은 자신이 경험한 예술을 널리 홍보하는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영화 평론가는 영화를 스포 하면서 까지 꿍얼꿍얼 긴 글을 적는 바보 같은 짓을 하는 것인가?(나는 세상 모든 것에 비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싶다 하지만 아직 역량이 안되니 영화에 한정되어있다. 안타깝게도 내가 드는 많은 예시는 영화비평에 관한 것이 많을 예정이다.) 요새 많이 생긴 유튜브 영화 소개 채널 같이 짧게 영화의 개요를 설명한다거나 흥미를 유발할 영화 속 장면들을 짜집기 하여 영화 예고편을 다시 제작하는 소모적인 일을 하거나 최대한 영화 스포를 하지 않기 위해서만 훌륭한 머리를 낭비하고 그것이 불가능할 때는 '스포 주의' 라는 '개 조심' 과 비슷한 경고 팻말을 쓰는 활동이 영화 비평가의 바보 같은 짓 보다 앞서 말한 궁극적 목적에 더욱 부합할 것이다.

(이주리 예술가의 살다)


 나는 여기서 잠시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에 도라지 꽃의 보라색이 소녀의 죽음을 암시한다는 비평의 의미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세간엔 황순원의 보라색에 대한 취향 때문에 소설에 등장한 것뿐이라며 과도한 해석 혹은 비평의 우스움을 나타내는 사례로 말해진다. 하지만 나의 생각은 다르다. '도라지 꽃이 이렇게 예쁜 줄은 몰랐네. 난 보랏빛이 좋아...' 소녀는 이렇게 말한다. 황순원의 소나기에서 소년과 소녀의 서로의 감정이 커지는 동시에 소녀의 죽음을 암시하는 수많은 복선의 등장은 독자의 가슴을 애달프게 만든다. 보라색을 죽음을 암시하는 색이라는 비평을 생각하며 위의 소녀의 말을 다시 곱씹어 보면 도라지 꽃의 아름다움을 이제 알게 된 소녀에게 죽음의 암시가 덧 씌워지는 소설의 수많은 복선 중에서도 가장 극적이며 서정적인 잔인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된다. 비평이 또 하나의 예술을 창조해낸 사례 중 하나이다. 황순원의 의도는 중요하지 않다.(왜곡하지 만 않으면 된다.) 우리 비평가가 예술가의 수수께끼를 풀어내는 게임의 참가자는 아니다. 아.. 고작 비평가를 그러한 역할을 수행하는 자로만 보는 것은 얼마나 애처로운 것인가. 무엇 때문에 예술가에게 그런 오만한 권리까지 지어 주어야 하는가 비평가가 예술가의 노리개나 노예까지 될 필요는 없다. 예술가의 피를 빨아먹는 거머리 정도의 취급으로 만족하자 적어도 거머리는 독립적인 삶을 살아가는 창의성을 지니고 있으니

 나는 비평이 또 하나의 예술적 활동이라고 말하고 싶다. 물론 예술가의 존재에 절대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겸손한 생각은 가지고 있다. 비평가는 예술가와 운명을 같이한다. 예술가의 부재 시 비평가는 더 이상 창의적인 삶을 꾸릴 수 없게 된다. 창의성이 거세된 삶은 얼마나 끔찍한가 남성과 여성의 저 끊을 모르는 무의미한 성욕을 보라 창의성이 거세된 인생을 살아가는 자들의 저 뻔뻔한 매춘행위를 보자 자식이라는 유일한 해방구에 비비적되는 꼴을 보라 창의성을 살려내기 위한 슬픈 절규가 느껴지지 않는가? 그렇기에 비평가는 형편없는 예술에 사냥개 마냥 헐뜯고 무지막지한 공격성을 보이며 훌륭한 예술에 한없이 따뜻한 시선을 던지며 애정과 존경을 보인다. 비참한가? 그렇지 않다. 자신의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은 충분히 축복받은 인생이다. 사실 비평가의 비참함은 오랜 역사에도 불구하고 비평을 온전히 유희할 자의 수가 적다는 데 있다. 나는 오직 비평활동을 통해서만 먹고 살길 바랬다. 하지만 터무니없는 꿈이란 것을 직시하였다. 비평은 하나의 예술적 활동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온전한 비평가로서 비평을 쓴 자는 알 것이다. 자신의 행위가 예술이다라는 것을 하지만 예술가의 아우라에 짓눌리고 주변의 시선에 경도되어 당당함을 잃었다. 그 결과 글의 주제를 선택할 권리를 빼앗겼으며 예술가의 인터뷰나 하는 똥개 신세로 전락해 버렸다. 비평가라는 작자부터 이 지경이니 올바른 수용자가 생길 리가 있겠는가? 똥개는 쓰다듬음을 기대할 순 있어도 애정을 바랄 순 없다.

우리는 주변에서 평론가가 추천한 영화는 재미없어라는 말을 흔히 듣는다. 이 말을 좀 더 풀어보고자 한다 비평가가 아니라 평론가라 지칭된 거부터 이미 비평가가 얼마나 자신의 꼬리를 낮추었는지 알 수 있다. 추천이라니! 우리가 고작 추천이나 하는 쓸개 빠진 것들인가? 재미없다라... 예술가의 뒤치다 꺼리를 자처한 결과 자신의 독자와 얼마나 많은 거리가 벌어졌는지 느껴지는가? 혹자는 저 말을 듣고는 자신의 교양 수준이 범인의 수준을 띄어 넘었다며 기뻐하는 자가 있다. 나는 당당히 그 자를 정신이 나간 놈이라 말한다. 우리 비평가는 저 뼈아픈 말을 똑바로 곱씹어 보고 반성을 해야 한다. 재미없다... 나는 이 말에 특별히 더 큰 아픔을 느낀다. 그래서 한번 더 꼬집어 볼까 한다. 나는 정성일 비평가의 비평을 읽는 것을 좋아한다. 철학적, 기술적 방대한 지식을 활용하여 영화에 새로운 숨결을 부여하는 그의 비평 스타일에 넘볼 수 없는 아우라를 느낀다. 하지만 아쉬운 점을 지적할까 한다. 정성일 비평가의 글에 정성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재미없다... 라는 말엔 비평가가 훌륭하다 외치는 소리가 독자에게 공감과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의미가 있다. 그야 그렇것이 대부분이 비평글에 자신을 드러내는 용기를 보여주진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자신이 예술가의 거머리라는 것을 똑바로 직시하지 못해 쓸데없이 더욱 겸손한 태도를 취하여 뻗대는 비평가의 비겁함을 볼 수 있다. 많은 비평가는 자신의 글에 본인이 예술을 보고 느낀 솔직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수치로 여긴다. 자신의 감정을 예술가 혹은 수용자에게로 떠넘기며 간을 보는 변태적인 글을 쓴다. 그러면서 자신의 중립적인 평가를 봐달라며 귀엽게 수줍은 미소를 띄운다. 나는 정성일 비평가를 이들과 같은 자로 여길 정도로 거만하진 않다. 나는 그가 감히 넘 보기 힘든 큰 산 같은 존재라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천재성과 방대한 지식에 필요 이상으로 의존하고 있으며 독자가 비평가에게 공감과 이해를 하고 싶어 하는 욕구를 게으른 시선으로 바라본다. 나는 아이돌이 팬들에게 보여주는 천성 맞은 정성까지 바라는 것이 아니다. 우리 비평가는 자신을 좀 더 드러내어 독자와 같이 호흡을 맞출 필요가 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아직 우리들의 독자는 이해하기 힘든 영화를 보면 반짝이는 눈을 하며 우리 비평가를 찾는다. 더 이상 그들의 눈을 동태로 만들지 말자

 앞서 꾸준히 말해 왔듯이 나는 비평이 또 하나의 예술을 창조하는 활동이라고 주장한다. 비평을 예술적 활동으로 끌어올렸을 때 비평의 존재 의미나 그 가치를 논할 필요는 없어진다. 재밌기 때문에 존재에 의미가 있는 것이고 그 자체로 가치를 띄게 된다. 영화를 왜 만드나요? 그림을 왜 그리죠? 같이 멍청한 질문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예술에 어떤 특정한 목표나 기치를 걸게 되었을 때 예술이 타락하게 되는 경우를 수 없이 봐왔다. 예술활동에 특별한 이유는 존재할 수 없으며 그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며 건강하다. 우린 그 건강함을 유희하며 즐기면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비평의 무용성에 손을 들어 찬성하는 이들의 증가에 노파심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래서 비평이 예술계에 미치는 순기능에 대해서 살펴보는 치졸한 글을 써 볼까 한다.

 'K-POP과 HIPHOP의 거리감 그 유래를 비평의 건강함에서 찾아보자' 라는 허접한 소제목으로 글을 이어 나가 보자 K-POP은 모든 음악적 장르를 흡수해내는 괴물이 되었다. 한국 음악 시장을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모든 장르의 음악을 소화하기 시작했다.처음엔 질적으로 떨어졌지만 어느 순간 극복하였다.더 이상 아이돌을 아기자기한 춤을 추면서 애교나 떠는 인형으로 보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 어엿한 아티스트의 행보를 걷는 아이돌 역시 많아졌다. 결국 K-POP은 한국 HIPHOP문화까지 손을 뻗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힙합 아이돌 그룹이라는 타이틀을 내걸고 방탄소년단이 등장했다. 방탄소년단의 등장은 한국 힙합 문화에 위협적인 존재로 인식되었고 엄청난 거부반응을 보였다. 수많은 래퍼와 힙합팬들은 방탄소년단을 인정하지 않았고 힙합 문화를 더럽힌다고 비방을 하였다. 하지만 방탄소년단 이후 블락비, 위너, 아이콘 등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는 힙합 아이돌 그룹에 자신 있게 이들을 힙합과 구분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목소리는 작아져 갔다. 거기다 아이돌 그룹에서 힙합 아티스트로 훌륭하게 변모한 산이(?), 지코, 송민호, 바비 등의 등장과 아이돌로 지원하다 래퍼가 된 산이(?), 아이언, EK, 올티 등의 등장은 우리에게 K-POP과 HIPHOP의 구분을 더 혼란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현재 우리는 K-POP문화에 흡수될 위협을 당당히 이겨냈을 뿐 아니라 아이돌 문화와 함께 한국 음악 문화를 이끌고 있는 저 견고한 한국 힙합을 보고 있다. 혹자는 쇼미 더 머니의 등장이 큰 역할을 했다고 보지만 처음 쇼미 더 머니의 등장은 한국 힙합이 K-POP문화에 흡수당할 뻔한 커다란 위기였다. 하지만 한국 힙합은 이 위기를 역으로 이용해버리는 강력함을 보이며 엄청난 발전을 선보였다. 그렇다면 이 강력함은 어디서 나올 수 있었던 걸까? 나의 답은 한국 힙합에 존재하고 있는 건강한 비평 문화에서 나올 수 있었다고 본다. 한국 힙합은 인터넷 커뮤니티를 발판으로 커뮤니티 내에서의 수많은 토론과 비평을 수용하면서 같이 성장해 왔다. 30년 정도의 건강한 비평 문화는 한국 힙합 문화의 내구성을 충분히 견고하게 만들었다. 물론 자신의 문화를 발전시키고 지키기 위한 수많은 아티스트들의 노력이 먼저 선행되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현재 한국 힙합 문화엔 아티스트의 의도를 빠르고 정확하게 알아채고 새로운 아티스트의 발견 또한 해내는 매우 질 높은 수용자들이 존재한다. 이는 아티스트들에게 정말 큰 위안을 주고 감사한 환경을 제공해 준다. 예술과 비평이 건강하게 작동된다면 그 잠재성은 무궁무진하다. 물론 한국 힙합 문화에 비평가라는 개념의 존재는 약하다. 몇 명의 비평가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팬이 커뮤니티에서 건설적인 토의를 통해 비평이 이루어진다. 그러니 위의 내가 쓴 글은 좋은 결과의 원인을 내 입맛에 맞추어 지어낸 싸구려 글일 수 있다. 한국 힙합은 비평가를 필요로 하지 않고 애정 어린 팬을 원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형태가 어찌 되었든(비평가의 존재 유무는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닐 수 있다) 지금까지 보여준 한국 힙합 문화의 행보에서 건강한 비평 문화의 힘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비평은 기본적으로 비교를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어떤 작품이 어떤 작품보다 훌륭하다. 즉 하나의 비평엔 언제나 2개 이상의 작품이 포함되어 있다. 혹자들은 비교하는 것에 불편해한다. 어린 시절 대다수는 비교당하는 불쾌한 경험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불쾌한 경험은 비교 때문이 아니라 비교를 하는 잣대의 편협함 때문이다. 공부를 못하는 아이도 다른 관점으로 보면 누구보다 훌륭한 아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비평가의 유일한 권력이 나온다. 모든 관찰엔 권위가 있고 모든 판단엔 자의성이 존재한다. 비평가는 훌륭함의 잣대를 설정할 수 있다. 이 권력을 악용했을 때 흠집을 내지 못할 작품은 존재하지 않는다.(이상하게도 반대로 모든 영화를 훌륭하다고 평을 내리기에는 힘이 든다.) 그렇기에 비평가가 예술가의 의도를 대략적으로 라도 파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예술가의 의도를 의도치 않게 혹은 고의적으로 왜곡하여 작품을 암흑 속으로 던져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술가 입장에선 속이 터질 노릇이다. 비평가는 예술가의 의도를 먼저 파악하고 그것에 대한 입장 표명한 후에 자신의 창작 활동을 시작하는 예술가에 대한 존경을 보여야 한다.(일종의 권력 견제랄까?) 예술가가 자신의 의도를 알쏭달쏭하게 숨기는 게임을 제시한다면 비평가는 그것에 성내지 말고 어느 정도는 어울려 줘야 한다. 예술가가 자신의 의도를 드러내는 것을 꺼려한다면 더욱 철저하게 파고들어 끄집어내야 한다. 예술가가 자신의 의도 자체가 없다면? 만들어내야 하나? 아니다 무시해 버리자 철저하게 무시해 버리자 괜히 이러한 예술가의 작품에 비평을 해 버리면 치졸한 싸구려 글이 나오거나 눈 뜨고 보기 힘들 정도의 권위적인 글이 나온다. 예술가의 의도가 담겨있지 않은 작품은 타 작품을 모방한 것이거나 그것의 치졸한 짜집기일 뿐이다. 예술의 기원이 모방이라고 하니 그것에 대해 호되게 욕할 필요는 없다. 다만 비평할 가치가 없을 뿐이다. 비평가라고 해서 모든 작품에 비평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비평할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파악하는 것 또한 비평가의 올바른 태도이다.

 마지막으로 비평가는 예술을 제대로 유희할 수 있는가? 라는 회의적인 질문에 대한 나의 입장을 적는 걸로 마무리하려 한다. 먼저 내 입장을 밝히자면 그렇지 않다라는 것이다. 비평가는 일반 수용자보다 예술을 즐기지 못한다. 예술은 수용되고 그것에 즐거움을 느끼는 이 단순한 과정이 가장 건강한 유희 방법이다. 하지만 비평가는 예술을 수용하는 동시에 많은 것들을 생각해야 한다. 타 작품 과의 비교부터 시작해서 비평 글을 적을만한 소재를 찾아내려 한다. 즐거움을 느끼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그 원인을 파헤치려 한다. 예술을 유희할 수 있는 감수성을 지녔음에도 자발적으로 그 사랑스러운 능력을 걷어차 버린다. 결국 웬만한 작품에는 별 감흥도 느끼지 못하는 좀비가 된다. 그럼에도 비평가의 위치를 고수하는 것은 나 또한 예술가로서 창작활동을 한다는 새로운 유희 때문이다. 비평가 자신이 예술가라는 의식이 없다면 비평가는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직업이다. 거기다 비평가는 좀비가 사람을 뜯어먹을 때의 광적인 즐거움을 가끔 느낀다. 종종 비평을 해야 한다는 의식조차 날려 버릴 정도의 작품을 경험하곤 한다. 극도의 굶주림이 충족되는 쾌락이 얼마나 즐거운 것인지 설명할 필요는 없겠다. 그렇기에 나는 끊임없이 헤맨다. 나의 굶주림을 채워 줄 작품을 만나기 위하여 그것이 이루어질 때 나는 침묵할 것이다.

(김건일 예술가의 leaf and bamb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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