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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현 Oct 16. 2019

악질(영화)

폭력성의 감지

적당한 연출 실력을 갖춘 감독이 반들반들하게 만든 영화, 적당히 재밌지만 별 감흥을 주지 못하는 영화만 보다가 '악질'이란 영화를 알게 되었다. 영화 포스터에서부터 강한 자극을 느꼈다. "씨발!"하고 외치기 직전의 표정을 하고 있는 사람의 얼굴에 덕지덕지 조잡한 장난질을 해놓아 인간의 분노에 대한 조롱이 느껴졌다. 거기다 '이게 영화냐?' 라는 글에서 실험적인 영화라는 인상을 주며 기대감을 높였다. 하지만 대다수의 실험적인 영화들이 그렇듯 자극적이기만 하고 실속 없는 영화 일 수도 있으니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영화를  다 보고 바로 다른 사람들의 영화평을 살피기 시작했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 대다수의 사람들이 불쾌감을 드러냈다. 심지어 경찰에 신고한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의 의도가 무엇인지 나 또한 정확히 판단할 수 없었다. 그만큼 악질은 모호한 영화는 아니면서 자의적 해석을 유도하는 기이한 영화이다. 하지만 나는 많은 이들이 감독의 의도를 똑바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악질'은 영화의 주인공인 전과자가 직접 카메라를 들고 촬영을 한다. 일종의 몰래카메라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카메라 감독이자 주인공인 전과자를 앵글 안에 담겨있는 배우들이 속이는 영화이다. 구성부터 매우 재기 발랄하며 실험적이지만 사실 눈에 띄는 것은 실제 전과자의 등장과 속이는 과정 속에서 영화에 등장하게 되는 굉장히 날것의 폭력적인 장면들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것에 시선을 뺏겼고 영화가 쓰레기다 라며 혹평을 쏟아낸다. 나 또한 그것에 흥미를 느껴 영화를 보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영화를 보기 시작하면서 나의 흥미는 다른 곳으로 흘러 갔다. 나는 전과자라는 타이틀보다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카메라를 아마추어에게 맡긴다는 대담성에 신경이 쓰였고 감독의 연출 아래 벌어지는 폭력적인 장면에는 감독과 같이 낄낄거리며 감상했다. (박시현 감독은 동네 나쁜 형들을 쉽게 연상할 수 있게 끔 건들건들 거리며 낄낄된다.) 여성을 강간하고 사람을 묶은 뒤 고문을 하고 매춘을 한다. 이런 장면을 보고 어떻게 웃을 수 있냐고 비난할 수 있다. 하지만 진행과정에서 불편할 정도의 강제성은 없었고 영화 안에 서로 합이 짜인 장면이라는 것이 관객이 알 수 있게끔 표현되며 어설프지만 감독의 통제하에 진행되니 흥미롭게 감상을 했지 화가 나거나 불쾌하지는 않았다. 나는 그저 또 자극적이기 만한 영화인 것으로 마무리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컸을 뿐이었다. 하지만 배우 이연('악질'에서 연 역을 맡는다)의 등장 이후 편하게 웃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감독의 통제력은 약해지고 줄곧 카메라로 영화를 촬영하던 전과자가 영화에 미치는 영향이 점점 커진다. 전과자는 자신의 눈앞에 벌어지는 상황에 호기심을 드러내며 상황의 진행에 제안을 하기 시작한다. 감독은 "형은 찍기만 해" 라고 하며 통제하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그러면서 전과자는 이연의 은밀한 신체부위에 카메라 앵글을 고정하고 이연에게 카메라를 보고 움직이지 말라는 강압적인 요구를 한다. 이연이 혼자 화장실을 이용할 때 전과자는 이연에게 다가가 화장실 문을 열어 보라고 호소한다. 이때 감독이 더 이상 통제를 할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결국 전과자는 한 여성을 폭행하기 시작하고 감독은 잃어버린 통제력을 찾기 위해 그 여성을 본인이 더욱 가혹하게 폭행한다. 그렇게 감독과 전과자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씩씩되더니 "여기서 그만하자"라는 감독의 말로 서로 헤어진다. 충격적이었다. 이연의 등장 전 보여지던 폭력적인 장면이 훨씬 자극적이었지만 이연의 등장 후 보여지는 장면은 꺼림칙한 냄새가 풍기기 시작하면서 공포감을 주었다. 폭력성이 무언지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william kentridge의 five themes)


 이연의 등장 전 장면은 폭력성 짙은 장면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액션 영화에서 느낄 수 있는 통쾌함을 느낄 수 있다. 폭력을 가하는 사람과 폭력을 당하는 사람이 합을 맞추어 앵글 안에 담겨있다. 통쾌함이 크지 않은 이유는 합이 엉성하며 일방적인 폭력이 행해지기 때문이다. 거칠게 말하면 못 만든 액션 영화 정도이다. 액션 영화에는 폭력적인 장면이 포함되어 있지만 우리가 흔히 불쾌해하는 폭력성은 느끼기 힘들다. 크로우즈 제로와 폭력써클 두 영화를 비교해보자 둘 다 학창 시절 남성호르몬을 강하게 자극시켜주는 영화다. 법의 제약에 어느 정도의 자유로움과 사회적 책임에 등한시할 수 있는 일정 시기를 맘껏 누리며 누가 더 강한지 증명해내는 영화 속 인물들은 꽤나 낭만적이며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준다.(법은 일정 부분 가장 자연스러운 인간성을 말소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할 부분인 거 같다. 나중에 한번 다뤄볼 계획이다.)

하지만 두 영화는 묘한 차이를 보인다. 폭력써클에는 사람의 다리를 당구대 위에 걸친 다음 몽둥이로 내리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 이후 폭력써클은 크로우즈 제로와 결을 달리하는 영화가 된다. 상대에게 지워지지 않는 폭력의 얼룩을 대담하게 남기는 가학성에서 불쾌한 폭력성을 다분히 느낄 수 있다. 문명화된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도덕이나 인간으로서의 도리 같은 인간의 청결성을 요구받는다. 가끔 우리는 비 문명인이 되어 짐승같이 포효할 수 있지만 다시 문명인으로 돌아가려는 청결성을 지니고 있다. 이 청결성이 더럽혀지는 순간순간 폭력성이 드러난다. 하얀 옷에 얼룩이 묻는다. 어떤 얼룩은 지워지지 않는다. 얼룩이 늘어날수록 청결성은 무뎌지고 폭력성은 증가된다. ‘악질’에서 전과자의 존재는 단순히 자극적인 요소로 이용되는 것이 아니라 얼룩이 덕지덕지 묻은 사람을 가장 일반 적이며 피상적으로 대표한다. 이연의 등장 후 영화는 이 얼룩진 사람의 얼룩을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인간의 폭력성이 발현되는 것을 묘사하기 위한 영화라고 한다면 주인공을 전과자로 설정할 타당한 이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 폭력적인 설정을 즉 폭력을 유발할만한 것들을 배치해 놓은 상태에선 그 주인공이 전과자이든 평범한 인물이든 인물의 설정은 중요한 것이 아니게 된다. 오히려 전과자로 설정했을 경우 인간을 편협하게 바라보는 쓰레기 영화가 된다. 중요한 점은 ‘악질’은 전과자란 설정을 이용하여 전과자의 얼룩을 바라보게 한다는 것이다. 악질에서 전과자는 실직적인 폭력을 행하지 않는다. 모든 폭력은 감독이 행한다. (전과자가 여성을 폭행하는 장면이 있지만 감독은 전과자를 말리면서 본인이 더욱  그 여성을 폭행한다.) 그럼에도 이 전과자의 존재에서 폭력성을 느끼게 된다. 전과자의 얼룩이 조금씩 묘사되면서 이것이 발현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느끼게 한다. 자신의 청결성을 지켜내려 할수록 이 전과자의 얼룩은 위협이 되고 존재감이 커져만 간다. 감독은 초반에 자신의 청결성을 더럽히며 즐기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뒤로 갈수록 본인 또한 청결성을 지키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자 감독에게 전과자는 가장 신뢰하는 형에서 순식간에 불결한 존재로 전락해 버리고 폭력성을 주는 존재로 바뀐다. 이후 이 존재 앞에서 감독은 자신의 청결성을 지키려고 즉 전과자의 얼룩이 자신에게 옮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 고군분투하는 장면이 나온다. 나는 자신의 청결성을 신경쓰지 않았던 감독의 모습이 더 당당해보였으며 자연스러워 보였다.... 감독은 영화 마지막 부분에 악질을 만들게 된 동기를 설명한다. "인간은 누구나 욕망을 가지고 있잖아? 저 사람이 어떤 욕망에 의해 살인을 했는지 왜 그런 욕망을 가졌는지 궁금하다" 여기서 저 사람이란 전과자가 아니라 자신의 청결성을 지키려는 우리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악질'은 청결성을 지키려는 우리의 행동이 강한 자의 행동인지 약한 자의 행동인지 어려운 질문을 던진다.

'악질'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전과자와 헤어지자 이연은 차 안에서 서럽게 울기 시작하고 감독은 미묘한 웃음을 짓는 장면이다. 감독의 미묘한 웃음이 힘든 과정이었음에도 만족스러운 결과에 대한 보상의 웃음이 었다면 이연의 울음은 안도감에서 터져 나오는 기쁨의 울음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 감독 본인이 휘둘리고 당했다는 패배적인 허탈한 웃음이라면 이연의 울음은 서러운 울음이 된다. 이연의 울음은 가슴 아플정도로 서러워 보였다. 누가 누구를 몰래카메라 했는지 뒤죽박죽이 돼버렸다. 카메라맨이 자신을 전과자라 속이고 자신들의 청결성을 지키려 아둥바둥하는 저들을 찍은 것이 아닐까? 전과자가 카메라 앵글 안에 속하는 피사체가 아니라 카메라 맨이었다는 단순한 진실, 카메라는 앵글 안에 속한 피사체를 묘사한다는 단순한 진실을 이연의 울음을 서럽게 본 나는 단순하게 받아들인다.

(야묘도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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