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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현 Oct 22. 2019

오래된 인력거(영화)

다큐멘터리는 개인을 다뤄서는 안 된다.

앞으로 쓸 글은 내가 느낀 매스꺼움에 대해서 적을 것이다. 물론 그 원인은 '오래된 인력거' 를 봤기 때문이다. 나는 최선을 다해 이 영화를 씹을 것이다. 그렇기에 먼저 '오래된 인력거' 를 제작하기 위해 10년의 시간을 쏟은 감독의 열정에 존경이 가득한 박수를 보내고 시작하고자 한다. 짝! 짝!

 '오래된 인력거' 는 인도 캘커타시에서 인력거 꾼으로 살고 있는 살림의 삶을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인력거 꾼이란 식민지의 아픈 기억, 계급사회의 불평등, 빈부격차에서 오는 가난, 개발도상국의 인권유린 등 다양한 사회적 문제의 피해자이며 동시에 고발자로서 자리를 잡고 있다.   이 때문인지 인도는 캘커타 시의 인력거를 금지시킨다. 정부의 개입이든 시대의 흐름이든 언젠가 사라질 인력거 꾼을 영화는 살림의 삶을 통해 관객에게 보여준다. 이 영화가 매스꺼운 이유가 여기서 기인한다. 영화는 인력거 꾼의 삶을 찍는 것이 아니라 살림 개인을 보여준다. 이는 다큐멘터리 영화라는 장르를 심하게 오역한 결과임을 보여준다. 다큐멘터리는 개인을 다뤄서는 안 된다.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개인의 기쁨을 다루게 되면 관객에게 어떠한 매력도 주지 못하는 내러티브를 선사하는 시답잖은 영화가 탄생한다.(감독 역시 매력을 느끼지 않기에 이런 영화는 나오지 않는다.) 반대로 개인의 고통에 대해서 다루게 되면 관객에게 호소력 짙은 내러티브를 선사하지만 같잖은 동정심을 유발하는 나약한 영화가 된다. 다큐멘터리 감독은 호소력 짙은 내러티브에만 매력을 느껴 카메라를 들이대면 안 된다. 예전에 영화 라디오 진행자가 '60만 번의 트라이' 라는 다큐멘터리 영화에 대해서 "내 아이가 저런 환경에 있지 않아서 다행이다" 라는 말을 했다가 다른 사람들에게 질타를 받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같잖은 동정심은 바로 저 진행자의 망언과 같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천박한 심정이다. 나는 저 진행자를 욕하고 싶지 않다. 우리는 다 저 같은 천박한 마음을 지니고 있다. 어떤 영화를 보고  그 같이 느꼈다면 영화가 그것을 유발한 것이다. 그 영화가 다큐멘터리 영화라면 실존하는 사람에게 폭력적인 시선을 던지게 만드는 영화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다큐멘터리 감독은 이점을 특히나 조심해야 한다. 자신의 고통스러운 삶을 누군가 불쌍하다 듯이 바라보는 것은 정말 끔찍한 경험이다. 동정은 자격을 갖춘 자가 아니라면 해서는 안된다. 살다 보면 이 사람에게는 동정을 받고 싶다 하는 사람을 우리는 만나다. 그 사람 외에는 같잖은 동정 따윈 허용해서는 안된다. 아무에게나 동정을 호소하는 것은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하는 것이며 또한 그것을 극복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용하려는 토악질 나오는 행위이다. 이 지경까지 됐다면 앞으로의 인생은 끝없는 자기 비하로 추락을 맛보게 될 것이다. 옳지 못한 다큐멘터리는 피사체에게 아무에게나 동정을 호소하는 짓을 강요시킨다. 내가 살림을 보고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픈 것은 그의 삶의 고난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고통을 타인에게 선보여야 함을 감독에게 강요당했기 때문이다. 살림은 이 점을 본능적으로 깨우치고 감독에게 항의한다. '오래된 인력거' 는 살림이 감독에게 더 이상 찍지 말라며 성을 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자신의 아픔을 찍지 말아 달라며 한 없이 나약해져서 호소한다. 하지만 이 썩어빠진  영화는 살림의 간절한 부탁을 보고 "살림은 무너졌다" 하며 역겨운 내레이션을 집어넣는다. 심지어 감독은 감언이설로 살림을 설득한다. 살림이 감독의 말에 설득당할 때 나는 분노했고 심한 매스꺼움을 느꼈다. 살림 조차 싫어진 것이다.

 다큐멘터리는 개인을 다뤄서는 안 된다.

 지아장커 감독의 '24시티' 가 이점을 잘 묘사한다. 팩토리 420이라는 국영 공장에 50년 정도의 개인들의 삶이 재개발로 인해 손쉽게 짓이겨지는 순간을 담은 영화이다. '24시티' 는 팩토리 420에 몸담았던 인물들을 인터뷰한다. 그곳에서의 삶 동안 겪었던 슬픔, 기쁨, 애착 등을 담담하게 인터뷰 형식으로 영화에 담아낸다. 재밌는 지점은 인터뷰 대상 중 일부는 배우인 점이다. 배우는 마치 자기가 겪은 일인 것 마냥 능청스럽게 연기하고 감독 또한 능청스럽게 찍는다. '24시티' 는 현재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에 벌어지는 사건에 대해서 찍고 있는 것이다. 카메라의 초점은 개인에게 맞추어져 있지만 영화 전체의 초점은 끈질기게 사건 자체를 상기시킨다. 이 점을 봐다라는 듯이 감독은 배우를 인터뷰 대상으로 섭외하는 귀여운 장난을 친다. 이런 식으로 지아장커는 개인의 아픔을 충분히 포용하는 동시에 폭력적인 동점심을 배제해버린다.

 동정심을 억제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자신보다 못하다 여겨지는 이를 동정하며 자신의 우월성을 증명하고 싶은 욕망은 굉장히 매력적이다.(자신의 우월성을 이만큼이나 쉽게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할까?) 하지만 이 같은 행위가 추악하다는 것을 알기에 우리는 견제하고 억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오래된 인력거' 는 일말의 노력 조차 보이지 않는다. 마노즈의 아픈 과거를 알게 되자 가차 없이 옛 영상을 뒤져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하는 어린 시절 마노즈를 보여준다. 살림의 셔츠가 찢어지면 어김없이 앵글은 그 지점에 고정된다. 심지어 비가 억수로 내리는 날에 몸을 흠뻑 젓시며 인력거를 모는 살림을 '돈을 많이 벌 수 있어 행복한 살림' 같은 식의 내레이션을 넣는 역겨운 장난을 친다.

 '오래된 인력거는 살림 개인의 고통에 초점을 맞추었기에 정부와 릭샤왈라(인력거 인부) 와의 대립과 인도의 극심한 빈부격차를 수박 겉햩기 식으로 밖에 다루지 못한다. 그렇기에 감독은 10년 동안 살림을 찍기만 했다는 도덕적인 비판을 받게 된다. 나는 이러한 비판에는 동조할 수 없다. 나는 예술에는 도덕적인 판단을 배제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생각한다. 캐빈 카터의 '독수리와 소녀' 를 생각해보자 캐빈 카터가 설령 사진을 찍은 후 소녀를 구하였다 하여도 캐빈 카터가 카메라를 들고 셧터를 누르는 순간에는 캐빈 카터에게 윤리는 개입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웅장하며 가슴 아픈 위대한 사진을 건질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오래된 인력거' 는 도덕적 판단을 배제한 결과가 같잖은 동정심을 유발하는 영화인 것이다. 이렇게 된 이상 도덕적 비판 또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오래된 인력거'를 씹었다. 나는 영화를 보는 도중에 그만 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끝까지 보았고 감독에게 가슴 아픈 비평을 적고 있다. 내가 끝까지 영화를 본 이유는 영화 중간중간 볼 수 있는 살림의 너털웃음 때문이다. 그 웃음에 살림의 감함과 건강함을 볼 수 있었다. 감독은 이 점을 느꼈음에도(나는 감독이 살림을 선택한 이유가 이 점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똑바로 다루지 못하였다. 그렇기에 나는 안타까움에, 아쉬움에 가득한 비평을 적었다. 매스꺼움엔 아쉬움을 동반한다. 철저한 거부 반응인 토악질과는 다른 것이다. 아쉬움에 위에서 간질거리고 니글거리고 불편함을 주는 것이다. 어찌 되었든 나는 감독이 건네 준 음식을 꼭꼭 삼켰다. 소화하기 매우 불편하였지만... 잘 먹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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