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정현 Oct 29. 2019

마을에 부는 산들바람(영화)

광적인 사랑은 아름다운 정신병 중 일부이다

미래를 계획하기 위해 지식과 경험을 쌓은 결과 삶을 살아갈 용기를 잃어버렸다 아등바등하며 치열하게 살아갈수록 내가 동경하는 미래의 삶은 더욱 거대해져 갔으며 나에게서 더욱 멀어졌다 한발 한발 내딛을 때마다 아득함이 느껴졌고 다리는 후들후들 떨리기 시작했다. 머리는 둔해졌고 가슴은 냉정해졌으며 다리는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모든 것이 정체되었고 자괴감이 들기 시작했을 때 나는 이 모든 것에 익숙해져야만 했다. 나는 의도치 않게 소확행을 실천했다. 출근할 때 귀에 급하게 때려 박는 아름다운 음악 직장동료와의 천박한 농담으로 유지되는 따뜻한 유대관계 출근할 때 느끼는 잠깐의 자유로움 그 후에 2~3시간 정도의 여유로운 시간과 지친 몸을 침대에 내 던지며 즐기는 5시간의 잠. 이 모든 소소한 즐거움을 감사해하며 나는 나의 욕망과 욕심을 죽였다. 어느 순간 내가 사는 사회는 소확행이 건전한 삶이라고 장려하며 소확행을 실천하는 이들의 사상을 이해하고 공감하기 시작했다. 한순간 삶을 대하는 나의 태도는 동경의 대상이 되었고 나는 나의 소확행적 태도를 마구 드러내며 자랑스러워했다. 하지만 나 자신은 알고 있었다, 소확행은 자기 자신을 기만하는 소악행이 집대성한 결과인 것을 급하게 때려 박는 음악은 몇 분 후에 돈 버는 기계로 전락할 자신을 다독이는 것이며 동료들과의 따뜻한 유대관계는 천박한 자신의 상황을 이해해주는 것에 대한 고마움이며 출근할 때 느끼는 자유로움은 자신이 구속되었었음을 처절하게 느낀 것일 뿐이며 2~3시간의 여유로움은... 2~3시간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없기에 여유로울 수밖에 없는 것이며 5시간의 잠은 다시 돈 버는 기계가 되어야겠다는 슬픈 결심인 것이다.

(이재삼의 달빛)

 소확행, 작지만 확실한 행복 행복은 결코 작을 수 없다. 확실한이란 단어에선 '나는 적어도 이건 가지고 있어!!' 라고 외치는 가진 거 없는 자의 슬픈 자기 위안이 보인다. 이런 개 같음을 직시했을 때 나는 미칠 듯이 외로워졌고 사랑을 갈구하기 시작했다. 밤거리를 배회했으며 이성과 눈이 마주치면 껄떡댔다. 가리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이성과 만날 기회만 생기면 '감사합니다' 하고 최선을 다해 자신을 뽐냈다. 결국 사랑을 시작했고 내 선택은 옳은 것이었다. 사랑이란 행복은 너무 컸기에 작은 행복 따윈 눈에 치이지도 않는다. 확실한 행복? 나의 행복은 전적으로 상대에게 의존하고 있다. 오만하게 상대에게 확실함을 요구할 순 없다. 그 불확실함이 날 더 들뜨게 했다. 날 더 뜨겁게 했다. 사랑은 순식간에 시체처럼 굳어 있던 나의 삶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이든 하지 않을 수 있다. 그렇게 역동적으로 살고 있을 때 본 영화가 '마을에 부는 산들바람' 이다.

 영화 제목부터 포스터까지 어떤 영화일지 예상이 뻔히 되었고 굳이 볼 필요가 있을까 하는 영화였다. 그럼에도 볼 수 있는 영화는 다 섭렵하자는 비평가의 탐욕스러움으로 보기 시작했다. 한 학교에 학생 수가 6명밖에 없을 정도의 시골 학교에 도쿄에서 살던 히로미가 전학을 온다. 소소한 삶을 사는 순박한 시골 사람들이 도쿄에서 온 히로미와(그의 엄마도) 대조되면서 재미를 주는, 소소한 갈등으로 도시 사람이 분탕질하다가 시골의 순박함에 적응하는 정말 뻔한 내러티브를 가진 영화이다. 마지막 장면을 보기 전 까진....  

영화에서 히로미와 소요의 풋풋한 사랑이 진행된다. 히로미는 소요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자신이 원하는 고등학교의 진학을 포기한다. 원하지 않는 빡빡머리를 하면서 말이다. 이에 감동을 한 소요는 선물로 히로미에게 키스를 한다. 키스를 선물 받은 히로미는 진심이 안 느껴진다고 투덜대고 소요는 머쓱해하며 "결국 들켰네" 하며 말한다. 그러곤 자신이 졸업하게 될 학교 칠판에 진한 키스를 한다. 엄청난 충격이었다. 이 장면을 보기 전까진 나는 이 영화가 소소한 행복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흔한 영화라고 생각했다. 이미 소확행의 무익성을 알고 있던 나는 살짝 경멸 섞인 시선으로 영화를 보다 뒤통수가 터질 정도로 얻어맞았다. 내가 익히 알고 있는 이런 종류의 영화는 남 여 주인공이 풋풋하게 입맞춤을 하고 관계가 깊어지고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다. '마을에 부는 산들바람' 역시 남 여 주인공의 관계가 깊어지며 해피엔딩으로 끝이 나지만 어딘가 모를 찝찝함을 준다. 소요의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들켰다고 말하는 저 소름 끼치는 대사는 무언가?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기 전 히로미와 그의 엄마가 아무 위화감 없이 마을에 적응해 있는 흔히 볼 수 있는 해피엔딩 장면이 왜 나에게 이토록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걸까?

(권민경의 연애만이 살 길이다)

 이 영화는 사랑을 부정한다. 기독교적으로 사랑은 타락이니 어쩌구 하며 나이브한 방식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강력함을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그것의 불필요함 또한 보여준다. 처음부터 영화를 다시 보자 감독의 사랑에 대한 냉철한 시선이 보이기 시작했다. 사랑 때문에 투신자살을 선택한 히로미 엄마의 친구, 이혼한 뒤 몸이 쇠약해져 귀향을 한 히로미 엄마, 소요 아빠의 불륜을 담담히 넘기는 소요 엄마, 이성 간의 사랑에 들떠있는 히로미를 공동체로 포함시키는 소요 우리는 사랑의 강력함을 익히 알고 있다. 수많은 예술 작품은 사랑을 숭배한다. 사람의 감정 중에서 이성 간의 사랑 만큼(나는 동성연애에 특별한 관점을 가지고 있지 않다. 내가 해보지 않았기에 무슨 감정인지 나는 알 수 없다. 아마 내가 말하는 이성 간의 사랑에 포함되는 비슷한 감정일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확신은 할 수 없기에 이성 간의 사랑이라고 편협한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변칙적이며 열정적인 것은 없다. 그렇기에 흥미롭고 역동적이다. 장진 감독의 '아는 여자'에서 사랑하는 애인을 죽인 여인에 대해 나오는데 형사는 "사랑하면 그러기도 해요" 라고 한다. 우리는 '사랑하면 그럴 수 있다' 하며 별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

마을에 부는 산들바람' 은 이 지점을 꼬집는다. 공동체적 사랑이 충분히 발현되는 사회에서는 광적인 이성 간의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 히로미를 다시 보지 못할 수도 있음을 안 소요는 울면서 히로미의 교복 단추를 꿰매 준다. 만약 히로미가 다시 돌아오는 선택을 하지 않았더라도 소요는 광적인 선택을 하지 않을 것이다. 충분히 슬퍼하며, 교복 단추를 꿰매 주며 히로미의 밝은 미래를 응원할 것이다. 그러곤 자신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 소요의 이 건강함이 비정상적으로 보인다면 우리는 사랑의 노예 신세인 것이다. 사랑의 노예가 아름다운 말인 것 같은가? 바로 이 아름다운 말에서 미저리가 탄생하고 스토커, 바바리맨, 연애 폭력, 강간 등 끔찍한 일들이 벌어진다. 우리가 사는 사회가 공동체적 사랑이 부족하면 부족할수록 사랑은 강력해지고 광적이게 된다. 굶주림에 허덕이는 노숙자에게 줄 수도 있는 사랑을 아껴 자신의 파트너에게 쏟는다. 독거노인의 고독함을 공감해 줄 수도 있는 사랑을 아껴 자신의 파트너에게 쏟는다. 사랑은 절대 이기적인 것이 아니다. 아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아꼈다고 생각하는 사랑은 집착이며 오만한 소유욕으로 변질된다. 사랑이 강력한 것은 둘만의 경험임에도 불구하고 넘쳐흘러 이기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우리의 이기적인 사랑은 상대를 놓쳤을 때 밀려오는 아픔을 이겨내지 못하는 나약함과 그 나약함을 품어주지 못하는 삭막한 사회에서 기인한다. 소요를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한 히로미의 열정적인 사랑에 소요는 휘둘리지 않고 '들켰다' 하고 앙증스럽게 말한다. 그럼에도 히로미는 소요를 사랑하고 소요 또한 히로미를 사랑한다.

 여자 친구와 열정적인 사랑을 하고 있었으며 여자 친구의 사소한 반응 하나하나에 울고 웃으며 이것이 진정한 사랑이다 하며 살아오고 있던 나는 많은 충격을 받았다. 이 영화 덕분에 나는 여자 친구와의 이별을 이겨 낼 수 있었다. 소확행으로 정체하지 않고도 사랑으로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붙지 않고도 나의 삶을 향해 발을 디딜 수 있는 힘을 나는 얻었다. 영화는 공동체적 사랑을 제시한다. 이것은 나 혼자 이룩할 수 없으며 긴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먼저 나 스스로 강해지기를 선택했다. 삶에 초연하게 한걸음 내딛는 것이다. 사랑을 받는 존재가 아닌 사랑을 주는 존재가 되기 위해 초연하게 한 걸음 내딛는 것이다. 이것이 공동체적 사랑의 시작이 될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오래된 인력거(영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