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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리댄 Nov 29. 2020

밤쉘, 세상을 향한 묵직한 한 방

네이버 영화 ‘밤쉘’ 포스터

제이 로치 2019.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 셰익스피어의 희곡에 등장한 말이다. 왕관을 쓴 자는 그에 맞는 막중한 책임을 갖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 무게가 성별에 따라 다르다면 어떨까. 커리어를 쌓는 여성에게 견디도록 요구된 무게는 매력적인 외모와 친절한 미소일 때도, 심지어는 성적 요구일 때도 있다.

 2016년, 한 스캔들이 미국 방송계를 뜨겁게 달궜다. 시사토크쇼 '폭스 앤 프렌즈'의 진행자였던 그레첸 칼슨이 자신이 몸담았던 대형 언론사 '폭스뉴스'(이하 ‘폭스’)의 CEO 로저 에일스를 성희롱 혐의로 고소한 것이다. 이후 폭스의 메인 앵커인 메긴 켈리를 비롯 직원 20여 명이 동참해 에일스의 성추행 사실을 차례로 폭로했다. 전 세계 미투 운동의 시발점이라 할 수 있는 2017년 유명 영화 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의 성추행 사건보다도 1년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제이 로치 감독의 영화 <밤쉘: 세상을 바꾼 폭탄선언>은 미국 거대 방송사의 절대 권력 CEO를 무너뜨린 여성들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네이버 영화 ‘밤쉘’ 스틸컷


영화는 폭스의 메인 앵커 메긴 켈리(샤를리즈 테론)가 분주하고 위계적인 방송국 내부를 브리핑하는 형식으로 시작된다. 캘리는 여성 혐오 발언을 일삼는 트럼프와 TV 토론회에서 설전을 벌인다. 공화당을 지지하는 논조의 폭스 사의 간판 앵커의 행보치고는 참으로 맹랑하다. 그럼에도 그는 사석에서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이라는 말을 습관적으로 뱉는다.


네이버 영화 ‘밤쉘’ 스틸컷


 한편 그레첸 칼슨(니콜 키드먼)은 미스 아메리카 출신의 한때 잘 나갔던 또 다른 폭스 앵커로, 한 시사 프로그램에서 남성 패널의 여성 혐오 발언에 대응하다 좌천된 인물이다. 얼마 되지 않아 그는 폭스 사에서 해고되었다. 이에 그레첸 칼슨은 CEO 로저 에일스의 성적 요구를 거부해 해고를 당했다고 폭로하며 미국을 뒤흔들었다. 각종 언론사에서 해당 스캔들을 일제히 메인 기사로 보도했다. 정작 회사 내부에서는 아무도 칼슨의 발언에 동참하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다.


 한 번 미운털이 박히면 재기하기 힘든 미디어 업계의 특수성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거대 권력에 대응하는 피해자에게 쏠리는 관심이 무서워서, 동료에게 피해가 갈까 봐, 그 파렴치한이 주는 월급으로 먹고살아야 하는 보편적인 우리 을들의 입장이기에 눈을 감았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실제로 직장 내 성추행 사건이 일어나면 어김없이 '피해자 꽃뱀설'이 등장한다. 직원들의 반응을 예상이라도 한 듯 에일스는 뻔뻔하게 대응했다. 그는 유쾌한 농담 몇 마디 건넸을 뿐이라며 성희롱 혐의는 축소하고 성폭행 혐의는 부인했다. 노련한 언론사 수장이니만큼 정치적 공략이 아니냐며 이른바 '물타기'를 하기도 했다.


네이버 영화 ‘밤쉘’ 스틸컷



칼슨의 패배가 될 뻔한 사건의 판을 뒤집은 이는 바로 메긴 캘리. 그는 자신의 가족과 위치, 쏟아질 의문들이 두려워 고민하다 결국 칼슨의 손을 잡기로 했다. 그는 10여 년 전 자신이 에일스에게 당한 성추행을 폭로했다. 인기 메인 앵커가 폭탄 심지에 불을 붙이자 고민하던 여성들은 비로소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네이버 영화 ‘밤쉘’ 스틸컷



 여성들 중에는 꿈에 그리던 폭스에 입사해 톱 진행자라는 야망을 키우다 최근 에일스의 눈에 든 케일라 포스피실(마고 로비)도 있었다. 늘 몸매가 드러내는 치마나 원피스 입기를 추구했던 그는 스트라이프 티셔츠와 청바지 차림으로 퇴사한다. 에일스의 사임을 발표하는 날이었다. 승리했지만 동시에 꿈을 잃어버린 청춘의 모습은 미투 운동에 참여했던 여러 여성들을 닮아 있었다. 피해자로 사는 삶은 그 이전만큼이나 이후도 녹록지 않다.



 영화에서 성추행을 직접적으로 묘사하는 장면은 오직 하나였다. 케일라 포스피실이 에일스에게 인사를 하러 간 날을 그린 장면이었다. 남성 감독인 제이 로치는 이 장면은 불필요하다며 삭제하고자 했지만 오히려 여성인 캘리 역의 샤를리즈 테론은 해당 장면을 넣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그 수치심을 관객들이 함께 경험하고 분노하게 해야 된다는 목적에서다. 실제로 효과가 있었다. 관음하는 에일스의 표정과 울먹거리는 피해자의 표정이 교차될 때마다 관객들은 착잡해하며 한숨을 쉬었다. 메인 캐릭터 중 유일하게 케일라 포스피실만 가상인물로 처리한 점에서 제작진의 배려가 돋보였다. 자칫 피해자에게 또 한 번 상처를 줄 수 있는 부분이었으니 말이다.



 여성의 치마를 끝없이 올리려고 했던 무소불위의 권력자 에일스와 그런 그를 끌어내리려던 용기 있는 여성 직장인들의 연대를 보여준 영화 <밤쉘>. 이 영화의 가치는 보편성에 있다. 각 나라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2020년 현재 남성들과 함께 직장을 다니고 경쟁하는 여성들의 모습을 우리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회사가 여성에게 요구하는 충성심(Royalty)과 남성의 충성심이 다를 때도 쉽게 마주해버리고 만다. 2020년 대한민국에서도 위력형 성폭력은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우리는 이 영화 제목에서 영화의 주제이자 답답한 현실의 해답을 찾을 수 있다. 'Bombshell'은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는 단어다. 폭탄선언. 그리고 아주 섹시한 금발 여자. 여성은 성적 대상화를 당하는 입장이지만 권력자를 두렵게 할 수 있는 주체가 될 수도 있다. 목소리를 내고 연대하며 무엇보다 서로 믿어준다면.



 개인적으로는 여성 연대를 그린 영화 <밤쉘>의 감독이 남성이었던 만큼 여성의 손을 잡아주는 남성과 그를 같은 편으로 여겨주는 여성이 늘어나길 희망한다. 세상이 더 변해야 한다고 느끼는 남성은 여성의 썩 괜찮은 동료가 될 수 있다.

 

영화 초반부와 후반부에 같은 멜로디의 아카펠라 음악이 흐른다. 혼자서는 연약했던 소리가 합쳐질수록 풍성하고 단단해졌다. 영화 <밤쉘>이 착잡한 현실에 풍성하고 단단한 연대를 불러일으킬 폭탄이 될 수 있기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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