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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리댄 Jun 29. 2021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케이팝

고이 잠들어있던 사랑을 깨운 ‘문명특급’

SBS 자료화면. (위) 2PM 준호 (아래) 애프터스쿨

90년대생들이 ‘특급’열차를 타고 또 한 번 사랑에 빠졌다.​


TV 화제성 분석 기관 굿데이터코퍼레이션에 따르면 지난 12일 공개된 SBS <문명특급> '컴눈명 스페셜'은 2021년 6월 2주 차 비 드라마 TV 화제성 2위라는 성적을 거뒀다. 이는 SBS의 공중파 인기 예능 <런닝맨>, MBC의 효자 예능 <나 혼자 산다>보다도 높은 순위다. 이날 방송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시청자가 쏘아올린 작은 공

인기 웹 예능 <문명특급>이 지난 4월 1일 '컴눈명(다시 컴백해도 눈감아줄 명곡)' 프로젝트로 지난 10여 년 사이 나온 케이팝 그룹을 재조명하고 나섰다. <문명특급>의 제작진은 지난해 이미 ‘숨듣명(숨어서 듣는 명곡)’ 붐을 일으키며 티아라, 유키스 등을 재소환해 뜨거운 반응을 얻은 바 있다. 하지만 ‘컴눈명’을 처음 구상한 건 그들이 아니었다. 어느 시청자의 용기 있는 메일에서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지난 2월 <문명특급>의 유튜브 채널을 구독하고 있던 90년대생 이규인 시청자는 <문명특급> 제작진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그는 그 메일을 통해 ‘컴눈명’ 특집을 제안했다. 케이팝 역사에는 ‘숨듣명’ 만큼 다시 컴백해도 또 한 번 뜰 수 있는 ‘컴눈명’이 많다는 이유에서였다. 이규인 시청자는 K팝의 황금기를 재현하고 싶다며 제작진이 만들어줬으면 하는 프로젝트에 대해 기획안을 제시했다.​


제작진은 이 시청자의 제안을 가볍게 넘기지 않았다. 대전에 거주하는 이규인 시청자를 불러 방송에 전면으로 내세우는가 하면 기획자라는 호칭도 붙여주며 대우했다. 또 그가 자신의 아이디어를 더 자세히 설명할 수 있는 PT 기회도 마련해줬다. 그 자리에서 그는 자신이 꼽은 ‘컴눈명’ 후보곡들을 다양하게 언급하는가 하면 함께 컴눈명 프로젝트를 만들어줄 케이팝 전문가 군단, ‘케이팝 어벤져스’를 초청해달라고 요구했다. K팝과 <문명특급>을 사랑하는 시청자에서 방송 프로젝트를 이끌어가는 메인 기획자가 된 것이다.


후배들이 추린 ‘컴눈명’

이규인 기획자와의 만남 이후 <문명특급> 측은 발 빠르게 움직였다. 먼저 케이팝 어벤져스를 섭외했다. SBS 음악 프로그램 ‘인기가요’의 MC 출신 몬스타엑스 민혁을 비롯한 세븐틴의 부승관, 뉴이스트의 렌, 있지 채령, 아이즈원 예나가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현재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기도 한 이들은 한자리에 모여 '컴눈명'이 될 만한 곡들을 진지하게 추렸다. 컴백 당시 응원을 충분히 하지 못해 미련이 남는 노래나, 시기를 잘못 만난 너무 세련된 곡, 이대로 묻히기엔 퍼포먼스가 너무 아까운 곡 등이어야 했다.

애프터스쿨의 '뱅(Bang)'과 '디바(Diva)', 빅스의 사슬(chained up)', 샤이니의 '뷰(View)', F(X)의 4walls, 엑소의 '러브 미 라이트(Love me right)', 가인의 '카니발(Carnival)', 나인뮤지스의 '돌스(Dolls)', 오마이걸의 '한 발짝 두 발짝', 2PM의 '우리집' 등이 언급됐다. 많게는 10년, 적게는 5년 정도 전에 발매된 노래들이었다. K팝 어벤져스는 포인트 안무를 따라하며 추억에 젖다가도 2021년에 다시 컴백할 때 수정하고 나왔으면 하는 점들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했다. 소속사 선배들의 섭외에 직접 나서겠다고 약속하기도 했다​


이들이 힘을 실어준 덕분일까. 섭외도 성공적이었다. 이규인 기획자가 '컴눈명' 아티스트로 강력 주장했던 샤이니부터 K팝 어벤져스의 선택을 받은 나인뮤지스, 오마이걸, 2PM, 애프터스쿨까지 불러 모았다. <문명특급>은 이들 아티스트 별로 특집 회차를 한 편씩 방영하며 기대감을 고조시켰다. 아티스트들은 그들의 특집 회차에 직접 출연해 본인들이 '컴눈명' 무대로 선보일 최종 곡을 선택했다. 샤이니는 가장 샤이니 다운 곡을, 나인뮤지스는 가장 나인뮤지스 느낌이 나는 곡을, 오마이걸은 가장 오마이걸을 잘 대변하는 곡을 직접 골라 재컴백에 나설 수 있었다. 특히 애프터스쿨의 경우 노래 '뱅(Bang)'과 '디바(Diva)'가 너무 치열하게 경쟁한 끝에 두 곡 모두 컴백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6월, 그들이 재컴백하는 '컴눈명 스페셜'이 베일을 벗었다.


'컴눈명'에 진심인 사람들

‘컴눈명 스페셜'은 지난해 방송된 '숨듣명(숨어 듣는 명곡) 콘서트'에 이어 두 번째로 SBS 공중파로 송출됐다. MC로는 <문명특급> 신드롬의 주역, 연반인(연예인+일반인) 재재와 샤이니의 키, 세븐틴의 부승관, 오마이걸의 승희가 자리를 빛냈다. K팝에 대한 애정부터 텐션까지 높은 네 MC들의 호들갑은 해당 특집을 더 맛깔스럽게 만들었다. 또 솔로 가수 전소미, 위키미키 최유정, AB6IX 이대휘 등 현재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이 게스트로 등장해 컴눈명 아티스트들에 대한 팬심을 드러냈다.​


<문명특급> 측의 열정은 MC와 게스트 섭외에서만 드러나지 않았다. 그들은 오직 '컴눈명'만을 위한 세트장을 만드는가 하면 10년 전에 SBS '인기가요'를 이끈 촬영팀을 소환하는 진심을 보였다. 촬영팀은 위아래를 오가는 현란한 카메라 무빙과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줌 촬영으로 당시 감성을 재현해냈다. 무대 설치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PPL 광고도 진행했다. 이런 제작진만큼이나 간절하게 이 방송에 임했던 존재들이 있었으니, 바로 해당 아티스트들이었다.


애프터스쿨부터 오마이걸까지

11년 전, 고적대 콘셉트로 등장해 이 악물고 북을 치던 애프터스쿨 언니들이 여전한 안광을 빛내며 재컴백했다. 그들은 북 대신 팬들의 심장을 마구 치며 '뱅(Bang)'과 '디바(Diva)'를 열창했다. 청량미를 뽐내는 아이돌 사이에서 '짐승돌'로 우뚝 선 2PM은 '우리집'으로 한층 성숙해진 분위기를 뽐냈다. 노래가 나온 지 6년 만이었다. 샤이니도 6년이 지나도 세련된 곡인 '뷰(View)'를 부르며 성공적으로 재컴백했다. 이 노래를 작사한 종현은 비록 함께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그런가 하면 2019년 해체한 나인뮤지스도 흰 슈트를 빼입고 아쉽게 흘러가버린 명곡 '돌스(Dolls)'를 가창했다. '컴눈명' 아티스트로는 제일 연령대가 어린 오마이걸도 '클로저(Closer)'로 요정 매력을 뽐냈다. MC 재재도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았다. '컴눈명'으로 언급됐던 가인의 '카니발'로 솔로 무대를 꾸몄다. 또 코미디언 장도연, K팝 어벤져스로도 활동한 아이즈원 예나와 뭉쳐 '도재나'로 등장, 또 다른 '컴눈명' 후보곡인 빅스의 2015년 발매곡 '사슬'로 무대를 장악했다.​


유튜브에 올라온 '컴눈명 스페셜' 공식 영상들은 22일 기준 모두 100만 회를 가볍게 넘기며 주목을 받고 있다. 특히 애프터스쿨의 '뱅(Bang)' 무대는 668만 회를 기록하며 여전한 인기를 증명했다. '컴눈명'(다시 컴백해도 눈감아줄 명곡)은 90년대생의 '토토가'라 해도 과언이 아닌 이유다.​


성공적으로 프로젝트를 마친 <문명특급>. 하지만 <문명특급>의 인기는 최근 급상승한 게 아니다. 2018년 2월 첫 방송된 후 꾸준히 입소문을 탔던 이 프로그램은 작년부터는 대세 예능으로 분류됐다. MC 재재는 공중파에서도 활약하는 스타로 거듭났다.​​


앞서 건넨 질문을 조금 바꿔야겠다. 특정한 회차에 무슨 일이 있었나가 아니라 우리는 왜 웹예능<문명특급>에 열광하는가로 말이다.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케이팝

90년대 제일 끝자락에 태어난 이들이 이제 스물셋. 결코 어리다고만 할 수 없는 나이가 됐다. 빠르게 세월은 흘렀고, 매일 흥얼거리던 노래도 뒷전으로 밀려났다.​


<문명특급> '컴눈명 스페셜'을 보고 있자니 10년 전 내 모습이 떠오른다. 중학교 체험학습 날, 버스 안에서 MP3로 카라의 '허니(Honey)' 그리고 '프리티걸(Pretty girl)'을 들었다. 축제 때 진지한 표정으로 엠블랙의 'Y'에 맞춰 춤을 췄다. 비슷한 시기에 대비한 비스트(현 하이라이트)와 엠블랙은 그 당시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며 소녀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같은 날, 다른 반 친구들은 소녀시대가 그랬듯 컬러 스키니진을 입고 'Gee'를 공연했다. 통 넓은 와이드 팬츠를 사랑하는 요즘 세대와는 확실히 다른 감성이었다. 하굣길 노래방에 들르면 꼭 투애니원(2NE1) 노래를 메들리로 불러줘야 했다. 지드래곤 사진을 인쇄해 지우개 겉면이나 철제 필통 뒷면에 붙여두는 친구들도 있었다.​


시간이 흘러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열정은 식지 않았다. 쉬는 시간마다 반 친구들과 함께 학급마다 비치된 컴퓨터와 TV를 닮은 대형 모니터를 통해 음악 방송 클립을 봤다. 그중에서도 에프엑스(F(x))는 신세계였다. 미국 드라마에서 본 것 같은 세련된 무대 의상, 절도 있는 안무까지 소위 '입덕 포인트'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교내 댄스 동아리원들은 미쓰에이와 씨스타로 변신해 땀을 흘렸다.

MBC 자료화면. 차례로 카라 강지영, 2NE1, 빅뱅 지드래곤

교복을 입던 그 시절 우리는 K팝을 무척 사랑했다. 아는 아이돌이 끝을 모르고 늘어날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활발하게 활동하는 아이돌과 나이가 비슷해져 갔고 가요계는 하루하루 어려졌다. 싱겁게 아이돌 평균 나이를 역전한 우리 90년대생은 음악방송을 챙겨 보기 힘든 성인이 되고 말았다.

예전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MC가 "소녀시대 멤버 수는?"이란 문제를 낼 때 너무 쉽다며 피식하고 웃어버렸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방탄소년단의 멤버 수도 헷갈린 적이 있을 정도로 변했다. 그런 데다 이상하게 K팝을 좋아하면 왠지 힙하지 않다는 분위기가 자리 잡기도 했다. SNS에 플레이리스트를 찍어 올릴 때면 꼭 몇 곡을 지우고 올렸다. 그렇게 익숙했던 취향과 비트가 점점 흐릿해져 갔다.


​​​

K-흥을 끌어올린 <문명특급>

그런 우리에게 한 줄기 빛처럼 등장한 프로그램이 바로 <문명특급>이다. <문명특급>의 재간둥이 재재는 그 시절 우리가 열광했던 아티스트들을 소환했다. K팝에 무심하고 싶은 우리와 달리 재재는 당당했다.​

스브스뉴스 자료화면. <문명특급> MC 재재

재재는 추억의 그룹 유키스를 여우 손동작(유키스 멤버 알렉산더가 '만만하니' 노래를 부를 당시, '여우 같은 gir(걸)'이라는 노랫말과 함께 특유의 손동작을 해 화제를 모았다)으로 스스럼없이 끌어올렸다. '숨듣명'(숨어서 듣는 명곡)의 최대 지분 소유자 티아라를 한데 모아 난해했던 과거 안무들을 다시 추게 했다.


체면 대신 흥을 선택한 재재. 그의 모습은 의외로 있어 보이기까지 한다. 유행과 상관없이 빨간 머리를 고수하고 가수들보다 더 신이 나서 열창하는 그가 힙해보인달까. 유행어나 유머 트렌드를 기민하게 캐치하고 반영한 자막과 시대적 흐름을 읽고자 노력한 티가 나는 인터뷰도 방송의 호감을 더한다.

물론 재재가 나서기 전에도 우리 90년대생들은 가끔 2000년대에 발매된 노래를 꺼내 듣곤 했다. 앞서 말했듯 티를 내지 않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추억 속 수많은 명곡에 ‘숨듣명’, 그리고 ‘컴눈명’이라는 새 이름을 붙여주는 것은 물론 그 곡들의 부흥을 이끌고 케이팝 리스너들의 어깨까지 끌어올린 주역은 역시 <문명특급> 그리고 재재다.

이번 ‘컴눈명’ 프로젝트를 기획했던 이규인도 기획 발표 자리에서 “이건(‘컴눈명’ 프로젝트는) <문명특급> 밖에 할 수 없다고 생각해 메일을 보냈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문명특급>에 대한 깊은 신뢰가 드러나는 말이었다.​


<문명특급>에 대한 믿음을 갖는 건 그뿐만이 아니다. 다른 시청자들도 “문특(문명특급)에 나온 가수들은 유난히 더 호감이 간다. 본격 입덕 유발 방송이다”, “포인트를 진짜 잘 살린다”라는 호의의 댓글을 달며 <문명특급>의 센스에 박수를 보낸다. 방송이 회차를 거듭할 때마다 우리 90년대생들의 경계심은 급속도로 풀린다. 말도 안 되는 영어 가사와 10초 분량의 자료 화면에 박장대소한다. 직접 우리만의 아이돌을 찾아 나설 정도로 적극적으로 변한다.​


2PM 준호의 '우리집' 무대를 셔츠 색깔로 구별하며 감상한다. 어느 무대가 <열린음악회>였는지 <인기가요>였는지는 가물가물해도 '빨간 셔츠 준호', '비 오는 날 준호'는 장기 기억 저장소로 넘긴다. ‘달콤히 찍어 문 빛의 퐁듀’. 샤이니의 'View' 가사를 한 줄 한 줄 읊어보며 새삼 '샤이니는 시인이었구나' 감탄한다. 고이 잠들어 있던 사랑이 깨어난 것이다. 그 시절 ‘특급’ 비트와 함께.


새로운 우리 관계

유월 초 방송된 애프터스쿨 편에서 리더인 가희는 "안녕하세요 애프터스쿨입니다"라는 인사 한 마디를 채 끝내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정아도 "엄마로만 살았는데..."라면서 행복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을 보는 내 눈가가 덩달아 촉촉해졌다.​


이제껏 출연한 다른 아티스트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본인들이 밈(대개 모방 형태로 인터넷을 통해 사람에서 사람 사이 전파되는 어떤 생각, 스타일, 행동 따위를 말한다)이 되는 것에 개의치 않는다. 오히려 물개 박수로 즐거워한다. 관객들에게 무언가를 남겼다는 사실에, 팬들이 자신들을 기억해 주고 다시 불러줬다는 것에 진심으로 감동한다. 우리는 그들의 인간적인 모습을 보며 또 한 번 사랑에 빠진다. 동경하던 그들과 새로운 관계를 형성한다.​


2014년 당시 MBC 예능 <무한도전>의 '토토가(토요일 토요일은 가수다)' 특집은 지금도 회자되는 예능계 전설이다. 당시 관객들이 왜 S.E.S.를 보고, 쿨을 보고, 엄정화를 보고 크게 웃었는지, 그만큼 크게 울었는지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오마이뉴스에도 기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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