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필요한 연 Apr 16. 2021

0. 나의 경력은 자살시도다

프롤로그


  우리 집 마당에는 바다가 산다.

  창문을 열면은 새파란 바다와 마주한다. 바닷바람이 적막한 방 안으로 슬그머니 놀러 와 바깥으로 나가자며 손짓을 한다. 이끌려 현관을 나서면, 탁 트인 탐스러운 바다가 눈 앞에 생생하게 살아있다. 걸을수록 한결 더 가까워지며, 다섯 보만 걸어도 하얀 모래톱이 발끝에 차인다. 만질 수 있는 바다의 피부는 물감을 풀어놓은듯한 에메랄드색이다. 하늘에서 흩뿌려놓은 보석 알갱이들이 마구 굴러다닌다. 어떤 사람보다, 어떤 바다보다 윤나고 반짝이는 그것을 바라볼 때면 어김없이 카메라를 들게 된다. 비록 사진에는 반 절도 담아낼 수  없지만, 그럼에도 반드시 찍고 싶어 지는 아름다움이 곳곳에 널려있다. 눈에 보이도록 오래오래 남겨두고 싶어서일까.


  손을 뻗고 걸음을 옮기면 맞닿을  있는 피부를 지나헤엄쳐야 만져지는 속내가 보인다. 그것의 색깔은 한눈에 다르다. 투명한 에메랄드 색과는 달리 아주 새파랗고, 농도가 짙다. 비슷하지만 서로 다른  색깔이 다정하게 포개어진, 내가 목격한 어떤 바다보다 낭만적인 색채의  바다는, 바로 나의  앞에 영원히 살아있다.  곳은  속의  우도다. 무작정 도망쳐온 여기에는,  바깥의 삶이 넘실대고 있었다.


-첫날에 마주친 바다 풍경.

 

   프롤로그. 나의 경력은 자살시도다

         

  내 인생을 쓴다면 몇 페이지나 나올까. 어느 날 문득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한 페이지, 두 페이지, 열 페이지... 세어보다 이내 관두었다. 어차피 아무도 펼쳐주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자세히 들여다보아야만 읽을 수 있는 내용보다는, 확연히 증명할 수 있는 표지가 훨씬 중요할 게 당연했다. 언젠가 엄마의 장례식장에 조문을 와준 친구 중 한 명은 와줘서 고맙다는 내 말에 아니야, 당연히 와야지.라고 답해주었다. 나는 거기에 세상에 당연한 일이 어디 있겠어, 당연한 게 아니라서 더 고마워.라고 말했던 것 같은데, 사실 당연한 일들은 이 세상에 적잖이 숨어있었다. 그리고 그 몇 없는 당연한 것들은 하나같이 나를 슬프게 했다.

    

  누구든 해내는 집 근처 고등학교 졸업, 그다지 뛰어나지도 딱히 구리 지도 않은 그저 그런 대학교의 휴학생. 이렇게나 보편적인 경력이 나의 전부다. 좀 더 성의 있고 세세하게 써봐라, 아주 사소하고 미약한 성공이라도 좋으니까- 라는 아량을 베풀어준다면 몇 줄 더 덧붙일 수는 있겠지만,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본편을 쓰기 위해서는 짚고 가야 하는 단락이 있는데, 이것도 경력이라 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러든가 말든가, 내 멋대로 셈하자면 우울증이나 불면증이나 자살시도 같은 것들이 나의 숨은 경력이다. 겪어온 불행이나 우울감도 인정받는 자격이 될 수만 있다면 나는 적어도 중견기업에는 취업할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이마저도 절대적인 기준으로 등급을 나눈다면 곰비임비 밀려날지도 몰라서, 차마 대기업까지는 자신이 없다. 그러나 절대적인 기준이라 게 과연 어디 있을까? 내가 겪은 불행이, 내가 겪은 절망이 나에게는 가장 묵직하고 처절한데. 그래서 나는 우울 따위의 부정적이고 우중충한 감정들을 마냥 미워하지는 않는다. 무엇보다 상대적이며, 가장 공평한 것이 아닌가.     


  스무 살부터 나는 경기도의 소도시와 강원도의 촌구석 사이를 오가며 지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이곳이든 저곳이든 여기에서는 도저히 살 수 없을 것만 같다는 일념이 나를 강하게 사로잡았다. 나는 그것에 질질 끌려다니기도 하고, 목숨을 조금 내어주기도 하면서 결국에는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몇 번의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뒤, 죽기 전에 마지막이라 생각한 여행에서 나는 그곳을 처음 만났다. 제주도 자체가 처음이었지만, 고등어회가 아주 맛있다는 것 말고는 별다른 인상을 주지 못했던 제주도와 달리 아무런 기대 없이 따라갔던 우도에서 나는 희미한 희망과 선명한 아름다움을 보았다. 어쩌면 이곳에서라면 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푸르른 낭만을 훔쳐 먹으면서. 아무런 근거도 확신도 없는 그 찰나의 감상에 나는 내 시간과 밑천과 한 가지의 미련을, 나의 전부를 내걸기로 하였다.     


  2021년 4월, 나는 모두와의 연을 거두고 중형 캐리어와 작은 배낭 하나만을 챙긴 채 섬마을로 떠났다.

이 글은 그 섬에서 너울거릴 바람의 기록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