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임하사 휴가가기
2011년 육군 부사관에 임관하고 초임하사 시절 저의 결혼 날짜가 잡혔습니다.
육군 부사관으로 입대한지 9개월이 흐른 후였습니다. 부사관은 중대에 행정보급관이 부사관 간부들 중 중대에 큰 영향을 주고 힘이 있습니다. 대선배라고 나할까요.? 어렵고도 경험이많은 선배 부사관이죠. 그 당시 상급부대에선 사단장님이 바뀌면서 지휘스타일이 '강한육군'으로 정해지며 5주간의 훈련이 생겼답니다. 5주간 부대를 떠나 훈련과 사격을 병행하며 텐트에서 먹고 자다보면 금방지치고 힘들어 간부들도 긴 훈련은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꺼리게 마련이죠.
그런데 하필 훈련날짜와 결혼식날짜가 비슷해지면서 훈련계획이 공교롭게도 3주 훈련 후 결혼식, 또 2주 훈련이 이어지는 갑갑한 일정이었습니다. 결혼식이야 훈련이 있어도 가겠지만 신혼여행은 휴가를 받아야하는데 이번 5주 훈련은 사단장님 지시로 병.간부를 막론하고 열외를 허용치 않는 분위기가 매우 강해서 걱정이 앞서게 되었답니다.
부사관은 휴가를 가려면 먼저 부사관계통인 행정보급관에게 보고 후 허락을 받고 중대장님에게 허락을 또 받아야 하는데 저희 행정보급관이 먼저 훈련 때문에 그러니 결혼식만2.3일 다녀온 후 신혼여행은 훈련 종료후 날짜를 맞춰보자며 설득하기 시작했습니다. 순간짜증이 확나더군요. 물론 속으로요. 입대한지 9개월밖에 안된 초임하사라 뭐라 크게 말도 못하고 끙끙 앓았습니다.
지금의 아내에게 그때 상황을 설명하자 무척서운해하며 불평을 늘어놓았죠. (아니 평생 한번 있는 결혼식과 신혼여행인데 아무리 군인이라지만 긴 훈련 때문에 그걸 마음대로 정할수 없다니..신혼여행은 무조건 해외로 가야되고 평생 지금 아니면 못 갈수도 있잖아.)라고 말하는 아내에게 저는 너무 미안한 마음에 그저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간부 숙소에서 룸메이트인 선임에게 이 사실을 말했더니 펄쩍 뛰며 제게 말했습니다. (아니. 00행보관[행정보급관] 너무하네. 자기는 결혼할 때 그 핑계로 훈련도 빠지고 결혼준비로 휴가도 다녀왔고 신혼여행도 길게 다녀왔으면서 막내 후임하사 결혼한다는데 그 정도 힘도 안 써주나?)
그러면서 그 선임중사님은 자기가 씩씩대며 (야! 이건 훈련이 중요한게 아니야! 내일당장 행정보급관님에게 다시말해봐!)라고 했습니다.
(예.알겠습니다) 행정보급관의 성격을 알고 있던 터라 마음이 무거웠지만 (결혼후 신혼여행 가는데 왜 이리 힘들어야 되지?) 란 생각에 용기를 내서 다음날 다시 말씀드렸습니다.
(충성! 행보관님. 결혼식휴가로 드릴말씀이 있습니다.)
그러자 대뜸 짜증섞인 말투로 화를 내시더군요.
(내가 지난번 그렇게 얘기했는데 휴가 조금만 참았다가 훈련 끝나고 보내준다니깐?)
(예.행보관님 그런데, 아내와 통화하고 상의해봤는데 아무래도 결혼식후 바로 신혼여행 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한숨을 쉬던 행보관님은 그래 니 맘대로해봐라.하시더니 중대장님에게 보고해보라며 퉁명스레 말했습니다.
중대장님은 제얘기를듣더니..
(음 안하사 결혼식 훈련이지만 가야지 당연히..하지만 신혼여행은 3일만 갔다가 복귀하면 안될까? 훈련종료후 다음에 나눠가면 되지않을까? 이번 5주훈련으로 사단장님 지시도 완강하시고..아참 행보관은 뭐라던가?)
(예.중대장님과 비슷한 말을 하셨습니다.)
(안하사가 이번엔 좀 이해해줬으면 좋겠네)
하지만 제 이성은 전혀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평소 행보관님과 중대장님은 꽉 막힌 스타일이라 대화가 더 이상 진전되지 못했고 그날 저녁 룸메이트 선임중사님이 제게 다시 말했습니다.
(야! 너 그러다 영영 신혼여행 못간다. 훈련 끝나고 휴가 못 나올수도 있고).. 말바꾸기 달인이라며 행보관님의 과거 전적?을 말해주는데 이대로면 희망이 없었습니다.
룸메이트 선임중사님이 한참 고민하더니 제게 방법을 설명해주셨습니다.
(어차피 군대는 계급이 깡패니까 우리부대 대장인 대대장님에 건의 드려봐) 라고 말했습니다.
대대장님은 최근에 바뀌어서 아직 어떤 분인지 잘 알지 못하는 상태였고 더군다나 저는 짬밥도 여린 9개월차 초임하사에다가 꽉 막힌 직속상관 행보관과 중대장에게 이미 건의했다가 본전도 못 찾았기에 지푸라기도 잡는 심정으로 대대장님실 앞에서 심호흡하며 어떤 말을 어떻게 해야 결혼식후 신혼여행을 바로갈수 있을지 생각을 머릿속으로 짜내고 있었습니다.
바로그때! 대대장님실 앞에서 서성이던 저를 지나가던 행보관님이 보더니
(야 너 거기서 뭐하냐?)라고 물었습니다. 전 이제 갈때까지 가보자는 심정으로 당당히 거짓말로 (네.대대장님이 초임하사 면담으로 불렀습니다.)라고 얼버무렸습니다.
대대장님실에 노크 후 관등성명을 대고 문을 박차고 들어가 경례를 했습니다.
충성!(대대장님은 반갑게 맞아주시고 무슨 용무인지 물으셨습니다. 자초지종을 간략히 설명 드린 후 결혼식날짜와 휴가에 대해 이야기 하며 슬며시 청첩장을 건네 드렸습니다.
대대장님께선 (어 그래, 나도 알고 있다.)
(안하사! 결혼식장이 지방이고 내가 훈련 중이라 갈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래 준비는 잘하고 있나?)
저는 여기서 대답을 잘해야 했습니다. 휴가날짜도 대대장님 허락으로 못을 밖고 중대 행보관님 심기도 건드리지 않는 게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중대장과 행보관은 이러이러하게 다녀오라는데 제가 아내와 가족들과 상의해본결과 결혼식후 바로 신혼여행 다녀오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5주 훈련 때문에 걱정이 되어서 대대장님 의견 듣고 싶어서 왔습니다.)라고 당당히 말했습니다.
그러자 대대장님은 흔쾌히 신혼여행 바로 가도록 하고 (휴가기간은 5주 훈련도 감안하되 이러저러해서 10일정도면 어떨까?)라고 답해 주셨습니다.
전 (네 알겠습니다.) 라며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그래 안하사 잘 다녀와라, 대대장실도 가끔씩 와서 어려운 일도 편하게 상담하고...)
저는 목적을 달성한 후 곧바로 중대장님과 행보관님을 찾아가 말씀드렸습니다. 초임하사 면담 중 대대장님이 결혼식준비와 휴가는 언제 가냐고 자연스레 이야기가 나와서 말하다보니 결혼은 일생에 한번이고 신혼여행은 바로가야 아내에게 두고두고 평생 혼나지 않을 거라며 제 생각을 마치 대대장님 생각인 듯 말씀드렸고 휴가날짜까지 직접 달력을 보고 지정해 주셨다고 구체적으로 전달했습니다.
언짢은 표정의 중대장님과 행보관님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대대장님 결정이라 마음대로 바꿀 순 없었기에 저는 5주 훈련 중 3주를 야전에서 훈련하다가 결혼식2일전에 휴가 나올 수 있었습니다.
결혼식 날 룸메이트 선임중사님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야 결혼식못가서 미안하다. 근데 5주 훈련이 갑자기 무기한 연장 되서 나머지 2주 훈련이 없어진다고 한다. 지금 거의 확정상태라 보면 된다.)
(좋겠다! 결혼하고 신혼여행 갔다 오면 훈련도 없겠네.)
일이 잘 풀리기 시작했고 정신없이 결혼식이 지나갔습니다. 결혼식 몇일전에 밖에서 텐트치고 야영하다보니 감기가 걸려서 결혼식장에서 아내에게 불러준 노래를 원래도 잘하는 건 아니지만 더욱 제대로 부르지 못했습니다. 김동률의 감사란 노래가사가 너무 좋아 불렀지만 아내는 훗날 뭐 그리 어려운 노래를 택했냐고.. 이승기의 나랑 결혼해줄래? 이런 거 부르지 그랬냐며 웃기도 했었죠. 어쨌든 무사히 결혼식도하고 신혼여행을 다녀오고 복귀 날이 되었습니다. 신혼여행도 태국으로 잘 다녀왔고 훈련도 없다고 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웠습니다.
(충성! 결혼하고 신혼여행 잘 다녀왔습니다.) 반갑게 맞아주는 중대 간부님들과 이야기를 하려는 찰나 갑자기 비상이 걸렸습니다.
(응? 왜 갑자기 훈련 상황이지?) 지휘통제실에서 급하게 방송이 나오고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사단장님 특별지시로 무기한 연기되었던 남은 2주 훈련이 사단장님 불시 훈련상황점검에 저희부대와 몇몇 부대가 불운을 안고 당첨되었던 겁니다. 신혼여행 태국을 갔다가 휴가도 길게 다녀오니 몸도 마음도 아직 적응도 안 되는 찰나 군장을 부랴부랴 꾸리고 밖으로 뛰어나가니 저절로 땀이 삐질삐질 흘렀습니다.
(이게 왠 마른 하늘에 날벼락인가..복귀하자마자 적응도 안되는데...헉헉!)
결혼하기도 힘들고 신혼여행가기도 쉽지 않았지만 더욱 쉽지 않은 사실을 저는 잠시 잊고 있었습니다. 군대에서 계획대로 흘러가기 보단 그렇지 않은 경우가 훨씬 많다는 점과, 그것이 훈련계획이라면 매 시간마다 바뀌어도 이상하지 않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부적응 상태에서 돌연 2주간의 훈련이 불시에 시작되며 완벽하게 저를 군인으로 다시 적응시켜주었습니다. 더 이상 제 머릿속에 신혼 여행가는 아늑한 비행기, 태국의 낮과 밤, 첫날밤의 순간 등 찬란했던 기억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 후 시간이 오랫동안 흘렀고 그 당시 고민하고 힘들었던 순간들이 지금은 도란도란 얘기할 수 있는 웃픈 사연이 되었습니다. 그때 제 당찬 거짓말에도 흔쾌히 어려운 결정으로 휴가를 주셨던 이훈희 대대장님.
이제는 대령으로 진급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다른 부대에서도 계속 승승장구하실 거라 믿고 건강을 빌겠습니다. 그때 제게 큰 힘이 되어주셔서 너무 감사했습니다.
병사나간부나 군대에서 휴가는 어떤 이유로 나오던 힘든 군 생활을 버티게 해주는 소중한 시간인거 같습니다. 대한민국 장병여러분들의 꿈만 같은 달콤한 휴가를 응원합니다. 건강하게 군 생활도 이어가시고 기쁘게 전역도 하시길 진심으로 빕니다. 파이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