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비 온다
때는 바야흐로 2024년 1월. 재작년의 영국 여행을 계기로 유럽을 사랑하게 된 우린 ‘올해도 한 번?’이란 생각으로 그때와 같은 과정을 거쳤다.
‘그래서 어디 가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우린 가장 먼저 프라하, 빈, 부다페스트를 알아보았다. 단번에 세 나라를 경험할 좋은 기회지만, 찾기 힘든 기차와 벅찬 체력 때문에 보류했다. 두 번째는 파리. 샤를드골 공항의 추억 아닌 추억을 계기로 미식 여행을 꿈꿨다. 일주일간 불어를 공부했고, 8일째 되는 날에 접었다. 세 번째는 싱가포르. 분명 낯설고 색다르겠지만, 이른 새벽과 늦은 새벽 비행기가 여간 부담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나온 마지막 안, 시드니. 무려 직항인 데다 적당한 비행시간. 음식이 살짝 아쉽긴 했지만, 오페라하우스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렇게 우린 반년을 더 찾아보다 출국 한 달 전에 표를 끊었다.
아침 비행기로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시드니행이 오후 8시였거니와, 국내선은 할인율이 매우 매우 높기 때문이다. 벌써 세 번째인 인천공항 국제선. 달라진 점이라면 고1 때와 런던행 때는 환승이라 잠깐 머물렀고, 이번엔 느긋하게 구경했다는 점이다. 발권 게이트를 찾는 데도 수 분이 걸렸다. 심지어 표를 받은 후, 수속 게이트가 보이지 않아 한참을 헤맸다. 앞선 여행객들의 눈치를 살피며 간신히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라운지에서 컵라면을 먹고 면세점 투어를 시작했다. 인천공항! 정말 무지막지하게 넓고, 볼 것도 너무나 많은 곳. 나는 가장 먼저 라이엇 매장을 찾아갈 계획이었다. 그런데 5월에 문을 닫았다고 한다. 젠장. 런던행 때 들르지 못한 게 아쉽다.
대신 젠틀몬스터에서 선글라스를 구경했다. 반투명의, 살짝 주황빛이 맴도는 선글라스가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구매한다고 해서 잘 쓰진 않을 것 같고, 심지어 도수도 없다. 선글라스는 항상 애매해서 미루게 된다. 다음에는 도수 넣는 법을 공부해서 가야겠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에스컬레이터 위라는 다소 난해한 위치의 스타벅스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무척 넓었고, 입구부터 책이 많아 조금 놀랐다. 한 권을 구매할까 싶다가도 시시싯의 첫 시집, 『포에틱 이펙트 1%』를 가져갔기에 그것을 읽었다 이때와 마지막 날에야 펼쳤지만 말이다. 일정 도중 시험 결과 발표일이 있었기에 노트북을 가져갔다. 그 덕분에 성공적으로 시간을 녹였고, 호텔에서도 유용하게 써먹었다. 아, 시험은 떨어졌다. 아무튼 조금 더 있으니 아래가 요란하다. 살짝 내려다본 엄마의 손에 이끌려 아래를 보니, 왕가의 산책 행렬이 진행되고 있었다. 티비에서나 보던 그것! 역시, 인천은 다르다.
마침내 다가온 이륙 시간. 무려 아시아나 직항이라는 호화로운 비행이 무척 기대되었다. 다만 보조배터리를 사용하지 못해 아쉬웠다. 더군다나 기내 스크린마저 오래되어 정말 할 게 없었다. 다행이라면, 세 자리를 둘이서만 썼다는 점?
두 번째 기내식의 사진만 남아 있다. 첫 끼는 타자마자 자고 일어나 먹었기에 메뉴도, 맛도 기억이 안 난다. 잘 먹고 잘 자니 시드니가 코앞이다.
도착하니 해가 짱짱했다. 아, 비가 와서 짱짱하진 않았던가. 아무튼 수속을 다 마치고 커다란 SYD 로고를 찍었다. 별생각 없었는데, 앞서간 다른 관광객이 찍으시길래 따라 찍었다. 그렇게 중앙역으로 가기 위해 공부한 길을 따라 역으로 향했다. 와, 기차가 무려 2층이다.
중앙역에 내리자마자 ‘싱글 오 서리힐즈’를 찾아 떠났다. 다만 그 길이 참 난해했다. 영국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언덕지고, 가팔랐다. 설상가상 비가 내리고 말고를 반복해서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다행히 아무 일 없이 도착한 카페. 입구에서 직원을 기다리니 노천으로 안내해주셨다. 노천카페! 영국에서 못해본 것들을 시드니에서 다 하고 왔다. 아무튼 메뉴판을 보는데 라테의 용어가 다르기도 하고, 종류도 너무 많아 조금 헤맸다. 그랬더니 직원이 갑자기 한국어로 말을 걸기 시작했다. ‘이럴 거면 처음부터 한국어를 써주지,’ 라는 생각도 들었다.
한국인에게 유명한 만큼 사방에서 한국어가 들렸다. 한국인 무리가 떠난 자리에 외국인 여성이 앉으셨다. 그런데 조금 더 있으니 타인으로 보이는 중년의 여성이 일자리를 소개해주기 시작했다. 흥미진진한 이야기에 귀 기울이다 보니 바나나 브레드와 핫초코가 바닥을 보였다. 조금 뒤에 직원에게 들어보니, 그 중년 여성은 근방에서 유명한 사기꾼이란다. 핫초코는 그저 그랬는데, 바나나 브레드가 무척 맛있었다. 특히 위에 올려진 노란 버터가 너무 잘 어울렸다.
우린 다시 중앙역으로 돌아와 노스시드니로 가는 지하철을 탔다. 다리를 하나 건너는 사이 빼꼼, 하고 오페라하우스의 뾰족한 정수리가 보였다. 빗방울 맺힌 창에 빠져 있다 보니 어느새 도착한 노스시드니. 이제 호텔에 갈 일만 남았다.
노스시드니 하버뷰 호텔. 말 그대로, 달링하버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이었다. 이 말은 즉, 높은 곳에 있다는 점이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정말 좋다. 그런데. 이런 세상에, 맙소사.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다. 좋은 소식은 호텔이 역 바로 옆이라는 점이고, 나쁜 소식은 정문까지 올라가는 길이 계단과 차가 다니는 길뿐이라는 점이다.
정말, 정말, 정말 몰랐다. 풍경이 좋다는 말에 왕창 속아 넘어간 기분이었다. 우린 계단 아래서 한참을 멍하니 올려다봤다. 그렇다고 취소할 수는 없기에 정문 옆의 좁은 계단을 이용했다. 다행히 손잡이가 잘 되어 있어 올라가는 데엔 큰 문제가 없었다. 엄마가 휠체어를 들고 가는 사이, 나는 젖은 계단을 살포시 밟아 올랐다. 처음엔 참담했는데, 하다 보니 익숙해져서 나중에는 평범하게 오르내렸다.
그렇게 도착한 로비. 우린 엘리베이터가 정말 없는지 몇 번이나 물었고, 몇 번이나 그렇다는 대답을 받았다. 대신 체크인 때 내 몰골을 보고 측은해지셨는지 방을 업그레이드해주셨다. 덕분에 더 넓은 방에서 하버브릿지를 만끽했다.
다행히 짐을 푸는 동안 하늘이 맑아졌다. 방금까지만 해도 뿌옇던 하늘 푸르러지더니, 다리 위로 선명한 무지개가 펼쳐졌다. 날씨와 함께 밝아진 기분으로 본격적인 여행을 시작했다. 호텔에서 내려갈 때는 차가 다니는 길을 이용했다. 바퀴 달리고 사람 탔으니, 휠체어도 엄연히 차 아니겠는가.
우린 페리를 타고 오페라하우스까지 갈 계획이었다. 이를 위해 한없이 아래로, 아래로 걸어 선착장으로 향했다. 시드니는 약간 한양대 같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장난이 아니다. 다른 것이라면 오골계인지 닭인지 모를 검은 새와 특이한 나무가 많다는 점이다. 지도상에서는 평지였던 거리가 다리 아래로, 좁은 골목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우린 여러 갈래로 뒤엉킨 채 펼쳐진, 색도 모양도 가짜 같은 나무 앞에 섰다. 작은 공원이었는데, 왼쪽으로 뻗은 굵은 가지 아래로 하버브릿지가 보였다. 다른 관광객을 따라 다시 걷기 시작했고, 그렇게 도착한 곳에는 족히 50개는 되어 보이는 계단이 우릴 기다렸다.
이야. 아무리 둘러봐도 우회로는 보이지 않는다. 어머니는 이 길이 정말 정답인지 확인하기 위해 먼저 내려갔다 오셨다. 그리고 침울한 얼굴로 휠체어를 번쩍 들었다. 중간에 두 번의 넓은 곳이, 우리에겐 꿀 같은 쉼터, 있어 그곳까지 휠체어와 나를 번갈아 옮겼다. 마침내 도착한 최하층. 우린 고개를 조금 더 들어야 보이는 정상을 뿌듯하게 올려봤다. 시드니에서의 ‘걷기’는 이제 시작이다. 이때는 몰랐지만 말이다.
계단 바로 앞에는 작은 터널이 있었다. 그리고 그곳을 지나니, 유유히 떠 있는 배들과 브릿지가 펼쳐져 있었다. 루나 파크의 대관람차와 배, 브릿지를 한 번의 시선으로 전부 담을 수 있는 곳. 계단을 내려온 보람이 있어 다행이었다. 날씨가 좋으면 뱃놀이도 운영되는 것 같았다. 물론 방금 갠 하늘로는 어림도 없겠지만.
루나 파크 뒤편의 선착장까지 가는 길, 구석구석 귀여운 조각상이 많았다. ‘The comic walk’라는 작품의 연작 같아 보였는데, 중절모를 쓰고 뒷짐을 지고 있는 MR KOOKABURRA(쿠카부라, 호주를 대표하는 물총새, 사람 웃음소리같이 기이한 울음소리를 낸다고 함)와 마찬가지로 뒷짐을 진 채 반듯하게 서 있는 KEN DUGONG(듀공)이 특히 마음에 남았다. 특히 듀공 앞에는 누군가가 올려둔 꽃들이 남아 있었다.
우중의 놀이공원은 사람이 간혹 있었음에도 유난히 섬뜩했다. 옆구리로 보이는 오페라하우스와 다행히 운영 중인 페리를 보며 한시름 놓고 있었는데, 루나 파크의 입구 때문에 깜짝 놀랐다. 뭐랄까, 우스꽝스러움. 그 자체였다. 입구가 사람 얼굴인데, 부리부리한 푸른 눈과 붉은 광대는 둘째치고 윗입술과 이빨이 특히 흉측했다. 그런 와중에 오징어 게임의 광고 전광판이 붙어 있어 새삼 웃겼다.
마침내 도착한 선착장. 카드를 찍기 위해 둘러보는데 단말기가 보이지 않는다. 다행히 다른 무리가 있어 그들 뒤를 따라갔다. 띡. 찍자마자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정말, 무슨 스위치가 눌린 듯 퍼붓기 시작했다. 아무리 봐도 배가 오는 30분 안에 그칠 것 같지 않았다. 그런데 10분이 지나니 그쳤다. 누가 영국 날씨가 안 좋다 그랬는가. 시드니 날씨가 더 하다.
직원의 열띤 도움으로 무사히 배에 올랐다. 옆구리에서 서서히 가까워지는 오페라하우스에 심장이 떨리기 시작했다. 아, 파도에 흔들린 배 때문이던가. 서큘러키에 도착하니 또 비가 오기 시작했다. 우비를 챙겨 망정이지, 하마터면 감기를 달고 살뻔했다.
오페라하우스까지 달리느라 사진을 대충 찍었다. 그런데도 썩 예쁘게 나와 만족스럽다. 지하층 입구가 계단 아래에 있어 비를 피하며 주위를 살폈다. 누가 봐도 입구 같은 곳이 보여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찾았다. 오페라하우스는 엘리베이터도 예술이다. 뚜껑이 없다.
프런트가 있는 층에 내려 투어 예약에 관해 물었다. 그랬더니 아래층에서 한단다. 방금 밑에서 올라왔는데 말이다. 아무튼, 다시 내려가 투어 예약 여기서 하느냐고 물었다. 대답이 돌아오긴 했다. 기계음과 빗소리 섞인, 중년 여성의 영어라 그렇지. 단 한 단어도 알아듣지 못하고 포기하려는 찰나, 시큐리티 직원분이 해맑게 웃으며 다가오셨다. 유리창 없는 영어라니! 이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그녀에게 투어에 관해 물으니 내일 오전과 오후에 있다고 한다. 예약할 거냐길래 끄덕였더니 아까 그 데스크로 나를 안내했다. 다행히 아까 대화했던 분의 옆에 있는 직원이었다. 마이크 없이 대화한 덕에 전부, 한 80퍼센트, 알아들을 수 있었다. 오전에만 있단다. 그렇게 성공적으로 예약을 마쳤는데, 시큐리티 직원분이 따라오란다.
뚜껑 없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시 올라갔다. 그랬더니 그 옆, 그러니까 조금 안쪽으로 들어가 있어 보이지 않던 곳으로 안내해주셨다. 내일은 매표소가 아니라 바로 여기로 와서 대기하면 된단다. 그분이 아니었으면 엉뚱한 곳에서 헤맬 뻔했다.
성공적으로 예약을 마치고 다시 역으로 향했다. 물론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돌아가기는 섭섭하지. 오페라하우스 앞에는 식당과 기념품 가게가 줄지어 있는데, 그중 버거집에 들어갔다. 우린 클래식 버거 세트와 콜라를, 어머니는 버거와 맥주를 먹었다. 맛은 그저 그랬던 걸로 기억한다.
호텔까지는 지하철을 이용하기로 했다. 역까지 거리가 꽤 있어 서큘러키에서 트램을 탔다. 시드니에서의 첫날부터 비행기, 지하철, 트램, 페리를 전부 탔다. 단말기가 트램 내부가 아닌 승차장 기둥에 붙어 있었다. 탈 때와 내릴 때 찍으면 되는, 아주 신기한 시스템이었다.
그렇게 무사히 호텔로 돌아왔다. 아, 그 계단을 또 올랐으니 완전 무사고는 또 아닌가. 아무튼 첫날은 성공적이었다. 나는 서큘러키 매점에서 산 신라면을 먹으며 노트북으로 LCK를 보는 것으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변함없이 김플 반발티를 잠옷으로 입은 채 말이다. 아, 지하철역에 T2 매장이 있어 구경도 했다. 거기서 바닐라 향이 나는 찻잎을 하나 샀다. 계산대 앞에서 바코드를 찍는데, 직원이 티 용품을 추천한다. 끝에 금색 코알라가 붙어 있는 원형 금속 티백이었다. 어머니는 서비스인 줄 아셨고, 나는 사고 싶어서 골랐다. 덕분에 지금도 유용하게 쓰는 중이다.
시드니에 있는 내내 비가 왔다. 그것도 많이, 퍼부었다. 그 덕인지 완전히 새로운 경험투성이였다. 우린 해외여행을 대부분 관광보다는 생활 위주로 보내는데, 특히 시드니는 더 그랬다. 뭐랄까, 이미 주민이 된 기분이었다. 새로우면서도 금세 익숙해진, 그래서 다음 날이 더 기대되는 여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