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시드니, 그리고 싱가포르

5. 생각보다 안 더운데?

by 하현태



때는 바야흐로 작년 6월. 아빠의 갑작스러운 8월 초 휴가 선언에 급하게 떠날 준비를 한다. 언제나 그랬듯 여러 후보지가 있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곳은 독일. 아빠의 버킷 리스트였지만, 생각보다 더 긴 비행시간에 기각되었다. 두 번째는 삿포로. 여름의 삿포로도 좋다는 말이 많았지만, 그것보다 지진에 대한 두려움이 컸기에 기각되었다. 세 번째는 나 빼고 둘이서 유럽 패키지. 둘은 이 부분을 꽤 오래 고민하였다. 그리고 마지막 안, 싱가포르. 저번에도 그랬지만, 다 좋은데 비행기 시간의 애매함이 큰 걸림돌이었다.

최종적으로 패키지와 싱가포르 사이에서 고민했고, 간만에 셋이서 떠나자는 의견으로 모였다. 그렇게 한 달을 더 찾아보다가 7월 초, 결심과 함께 싱가포르행 표를 끊었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7월 14일 오후 11시경. 갑자기 아랫배와 허리가 엄청 아프기 시작했다. 0시가 되어서는 잠이 안 올 정도로 식은땀 흐르기 시작했는데, 소화불량 혹은 단순 스트레스로 여겨 꾸역꾸역 잠들었다. 새벽 2시경.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꼈고, 5시에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엄청난 식은땀과 목소리도 나오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다시 잠깐 잠들었다 8시경, 엄마의 인기척을 듣고 간신히 첫 마디를 내뱉었다.


“엄마 너무 아파"


바로 구급차를 불렀다. 아픈 와중에도 정신은 있었는지, 누운 채 주민등록번호와 주소를 읊었다. 한 십 분이 지나자 대원분들이 방으로 오셨고, 침대에 누운 상태 그대로 들것에 실려 응급실로 직행했다. 와중에 구급차 신기했고, 팔찌와 반지를 뺄 정신도 있었다.

아무튼 도착해서 주사를 맞고 한 2시간 정도 이것저것 검사했다. 소화불량일 수도 있다는 말에 기도했지만, 맙소사. 맹장이 터졌단다. 바로 입원했고, 바로 수술했다.


수술이란 말에 별다른 동요가 없었다. 수술은 처음이지만 수술실은 몇 번 가본 덕이라 해야 할지, 탓이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무튼 아무 생각 없이 누워있다 수술실 천장이 보일 때 즈음부터 살짝 동요하기 시작했다. 열이 40도인 채로 응급실에 들어왔는데 수술실에 들어와서도 37도였다. 나는 수술실 조명 아래 손발이 결박된 채 시간을 보냈다. 그런 와중에 간호사 선생님이 심장이 너무 빨리 뛴다며, 원래 이러냐 물으셨다. 그때가 되어서야 터진 긴장감에 “아뇨 긴장해서 그런가 봐요 ㅎㅎ...”라며 농담과 헛웃음으로 대답했다.

조금 더 있으니 열이 조금 내렸다. 산소마스크를 살짝 대고 숨을 크게 쉬란다. “졸려요?”라 묻길래 “엥 아뇨”라 대답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수술이 끝나 있었다.


이 무렵 의사 선생님들은 단체로 비상이셨다. 내 장애가 선천적이란 소식에 마취에서 깨어나지 않을 수 있다는 불안감을 집어삼키신 것이다. 나는 별다른 생각 없었는데, 마취과 과장 선생님까지 내려와 엄마에게 이것저것 진지하게 설명하셨단다. 수술은 다행히 아무런 이슈 없이 끝났다. 아, 내장 지방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젠장.


삼 일이면 퇴원할 줄 알았더니 일주일은 있어야 한단다. 그중 반은 무통 주사 덕분에 괜찮았는데, 빼는 순간부터 정말 죽는 줄 알았다. 생각보다 염증이 심했고, 생각만큼 심각하진 않단다. 다행히 조기 퇴원했고, 배에는 작은 흉터가 영원할 거란다. 아빠는 누워있는 나를 보며 여행을 취소할까 물었지만, 나는 수영을 하면 안 된다는 사실이 너무 슬펐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 대망의 떠나는 날. 오후 6시 이륙, 오후 11시 40분 도착. 다소 파멸적인 비행시간에 걱정이 앞섰지만, 그것보단 솔직히 나는 수영을 하면 안 된다는 사실이 더 크게 다가왔다. 점심 무렵 김해공항에 도착해서 수속을 마쳤다. 우동 세트를 먹고도 한참 남아 조금 지루해질 때 즈음, 대망의 이륙 시간이 왔다.


애니메이션과 유튜브 영상 여러 개를 저장해 갔는데 타자마자 잠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역대급으로 더러운 창문 밖은 새까맣기만 했다. 조금 더 있으니 착륙했고, 트럭이랑 나란히 한참을 굴러갔다.

공부했던 대로 그랩 타는 곳을 찾으며 그랩을 불렀다. 같이 나온 한국인 가족과 얼떨결에 함께였는데, 헤매는 것도 똑같았다. 우린 일반 택시 승차장에서 설명을 듣고 옆으로 쭉쭉 나아갔다. 택시보다 늦으면 돈을 더 내야 한다는 사실에 조금 서둘렀는데, 역시 한국인만큼 빠른 존재는 없다. 해가 다 졌는데도 선명한 마리나 베이와 대관람차를 보며 도착한 호텔. 체크인 때 예약자명과 여권상 이름 달라 조금 번거로웠지만, 다행히 아무 일 없이 방을 배정받았다.


그런데 웬걸. 방이 사진으로 본 것보다 더 기괴하다. 두 명이 누울 수 있는 침대가 있고, 그 위로 침대가 더 있다. 생각보다 더 가파른 사다리를 타고 가야 누울 수 있는 이층침대라니. 거기다 화장실은 통창이 뚫려 있어 시내가 훤히 내다보였다. 첫날에는 엄마가 위에 올라가서 잤는데, 다음부터는 아래에서 다 같이 잤다. 아, 가파르지만 않았으면 내가 위에서 자는 건데.


다음 날, 대망의 싱가포르에서의 첫 아침. 우린 호텔 조식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당연히, 채소는 없이. 그런데 이건 또 무슨. 뷔페 통창 밖으로 수영장이 보이는 게 아닌가! 잔뜩 기대하고 왔는데 하필 출국 2주 전에 갑자기 맹장 수술을 하는 바람에 수영은 그림의 떡이었다. 아, 너무 아쉽다.


싱가포르의 첫인상은 ‘생각보다 안 더운데?’였다. 있는 내내 비가 온 덕인지 탓인지, 아니면 비교 대상이 여름의 홍콩이어서 그런 건지. 아, 막간으로 이야기하자면 초등학교 6학년 한여름에 홍콩을 다녀왔다. 이십년지기 K 가족과 함께였는데, 나는 아직도 그날의 더위와 습함을 기억한다. 찐만두가 될 뻔했다.

아무튼, 런던을 시작으로 시드니, 그리고 싱가포르까지. 졸지에 비를 몰고 다니는 사람이 되었다. 그래도 그 덕분에 덥진 않았다. 솔직히 한국보다 시원했다.


식사를 마치고 지하철을 타고 마리나 베이로 향했다. 아침 일찍 움직여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생각보다 사람이 없었다. 의자에 다정히 앉아 있는 둘을 찍은 사진은 가끔 봐도 웃기다.

지하철역과 목적지까지 거리가 조금 있었는데, 저 멀리서부터 존재감이 뚜렷한 덕분에 쉽게 찾아갔다. 아, 근처에서 애견 박람회가 진행 중이었다. 말 그대로 개판을 뚫고 도착하니 생각보다 더 컸다. 우린 그 앞에서 사진을 여럿 찍고, 맞은편의 머라이언도 구경했다. 바로 앞인데 가려면 뺑 돌아야 한다니. 시드니의 페리가 그리워지는 순간이었다.


머라이언은 내일 가기로 하고, 우선 가든스 바이 더 베이로 향했다. 꽤 긴 지하도였는데, 틱톡을 찍는 외국인도 꽤 있었다. 심지어 양쪽으로 거울이 있어서 그런지 분위기도 묘했다. 아무튼, 덕분에 덥진 않았다.


도착하고 일기예보를 보니 천둥 번개를 동반한 비가 올 것으로 예상된단다. 우린 입구에서 얼른 표를 끊었다. 아, 여기서도 영문 장애인증명서가 큰 값을 치렀다. 역시 만국 공통 할인권.

로비에서 플라워 돔과 클라우드 포레스트까지 거리가 꽤 있었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걸으려 했는데, 하필 비가 쏟아져 셔틀을 기다렸다. 눈앞에서 한 대를 보내고 새 차에 올랐다. 그런데 이 길, 걸었으면 대역죄인이 될 뻔했다.


먼저 플라워 돔에 들어갔다. 우와. 역시 실내는 시원해. 정말 많은 꽃과 나무, 구석구석의 조각상이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특히 중간중간이 뚫려 있는 조각상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사람도 가장 많이 몰려 있었다. 나는 그것만 봤고, 엄마는 그 뒤의 마리나 베이만 봤다. 나는 말해줄 때까지 그 존재를 몰랐다. 우린 반 바퀴를 돌며 이것저것을 찍다 카페에 앉았다. 서양인 가족과 우리뿐이었는데, 맛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아, 캔에서 컵으로 따라준 것만 빼면.

아무튼 셋이서 정말 많이 찍었다. 셀카를 찍고 있는데 난입한 아빠의 표정이 참 웃기다.


적당히 둘러보니 기념품 가게다. 그런데 맙소사. 머라이언 조각상이 있다. 정말, 마음 같아서는 당장 사고 싶었다. 대신 다른 걸 샀는데, 뭐였는지 기억이 안 난다. 인형이었나 키링이었나. 아무튼, 다시 보니 사지 않은 건 잘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


구경을 마치고 대망의 클라우드 포레스트로 향했다. 맞은편이었는데, 플라워 돔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검수를 끝내고 들어가는데 사람이 줄지 않았다. 왜 이러나 싶어 하며 들어가니, 입구부터 공룡이 우리를 맞이해주고 있는 게 아닌가! 마침 쥬라기 월드 전시도 함께였나 보다. 공룡은 언제 봐도 멋지다. 그 와중에 그 뒤편, 천장과 맞닿을 정도로 높은 곳의 발코니에도 사람이 많았다. 폭포 덕분에 시원했고, 공룡과 그 높이 덕분에 상쾌했다.


입구의 브라키오부터 웅장한 티라노, 갇혀 있는 파키케팔로까지. 한때 공룡 덕후였기에 가슴이 더 크게 요동쳤다. 들어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때마침 물을 뿌렸다. 정말, 그 크고 넓은 곳에 물안개가 짙게 깔렸다. 창밖으로는 비가 한창이었다. 조금 끊기는 화면으로 슈퍼 트리를 보는 기분이랄까. 안팎으로 아름다웠다.

맨 아래를 조금 둘러보고 입구에서 봤던 발코니로 향했다. 그런데 젠장. 초입이 계단뿐이다. 어쩌겠는가, 걸어야지.


위에서 보니 더 장관이다. 특히 흩뿌려지는 물이 참 시원했다. 티라노와 사람이 손가락 하나로 가려질 정도로 올라왔는데도 더 위가 있다. 엄마는 그 아슬아슬한 곳이 무서워했는데, 나는 고개도 내밀며 사진을 한창 찍었다. 아빠 팔에 기대 찌부러진 내 볼 셀카는 여러 번 봐도 좋다.


그렇게 한참을 구경하고 나왔다. 비는 여전했다. 거기까진 좋았는데, 비 때문에 셔틀 운행이 중지되었다. 우와! 이 비를 맞으며 그 길을 걸어가야 한다니. 그 길도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우비를 입고 한참을 걸었다. 그러다 보니 슈퍼 트리 아래였고, 웬 닭이 비를 맞으며 무언가를 쪼고 있었다. 이런저런 고생 끝에 다시 도착한 마리나 베이는 정말 환상적이었다.


점심으로 토스트 박스와 딤섬을 고민했다. 딤섬을 대기 번호 20번을 기다릴 정도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고, 훨씬 짧은 토스트 박스를 결정했다. 카야 토스트와 카레를 주문했다. 사실 찾아봤을 때는 빵을 찍어 먹는 카레가 있다고 해서 주문한 거였는데, 그냥 밥과 카레였다. 대신 닭 날개와 닭봉이 들어있었고, 생각보다 스프 같았다. 날달걀에 찍어 먹는 토스트도 맛있었다.


우린 곧장 숙소로 돌아왔다. 아, 멋모르고 머라이언상까지 걸어가려 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더 크게 돌아가야 해서 얼른 접었다. 아까의 개들을 지나 지하철을 타러 가는 길은 처음보다 더 길게 느껴졌다. 방에 도착하니 출출하다. 나와 엄마는 잠들어버린 아빠를 두고 바로 앞 마트로 향했다. 컵라면 두 개와 머라이언 쿠키, 그리고 새우깡과 시드니, 런던에서 못 먹은 도넛 복숭아까지. 아, 머라이언 쿠키가 정말 맛있었다. 적당히 바삭했고, 맛있게 달았다. 귀국할 때 두세 개 정도 더 사려 했는데 까먹은 내가 밉다.


셋이서 다 같이 떠난 해외여행은 거의 10년 만이었다. 비만 아니었으면 더 좋았을 테지만, 그런데도 정말 좋았다. 특히 투덜거리면서 앞장서는 아빠가 참 웃겼다. 곧 다가올 독일행이 더욱 기대되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