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런던, 그리고 교토

3. 책 사러 런던 간 사람

by 하현태



또 같은 조식으로 시작된 넷째 날. 이날은 식사를 마치고 곧장 버킹엄궁전 행 버스에 올랐다. 두 번째임에도 런던 버스는 정말 적응하기 힘들었다. 이번 기사님은 전날과 달리 버튼 누르라는 설명도 잘해주셨다.

한층 가벼워진 마음 덕인지 금세 도착한 정류장. 들은 대로 버튼을 누르고 문 앞에 서 있으니 무언가 또 분주하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고, 한국에서의 가장 먼저 내리는 버릇이 문제였나 보다. 상황을 인지하지 못해 어리둥절한 얼굴로 기다리니 승객 중 한 분이 마지막에 내려야 한다고 친절히 설명해주셨다. 그 말을 듣고 기다리니, 기사님이 슬로프를 내려주셨다. 한껏 완만해진 마음으로 마침내 도착한 버킹엄. 절대 늦은 도착이 아니었음에도 궁전은 안 보이고 사람만 보여 깜짝 놀랐다.


사람들에 밀리고, 밀리고, 또 밀렸다. 그렇게 가장 깊은 곳에 정착했는데, 그곳이 가장 앞자리였다. 오른쪽에는 커다란 문틈으로 군악대가, 왼쪽에는 광장과 기마경찰이 보이는, 가장 명당. 특히 기마경찰이 무척 새롭게 느껴졌다. 백마와 갈색 말을 타고 노란 형광색 옷을 입은 경찰들. 분주한 손가락질과 느긋한 투레질. 그들을 보고 있자니 인파나 대기시간은 생각도 못 할 만큼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렇게 가장 앞에서 교대식과 군악대의 연주를 구경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보는데, 웬 꼬마가 인파를 파고 앞으로 들어왔다. 그 아이는 난간을 밟고 올라섰다. 여기까지만 보면 귀엽지만, 뒤꿈치로 내 바지를 밟고 있어 조금 덜 귀여웠다.


다시 굳게 닫힌 문을 뒤로 하고 사거리로 나왔다. 그런데 도로 통제가 끝나지 않았다. 눈치를 발휘해 또 가장 앞에 서 있으니, 아까 그 기마 군인이 이 길로 걸어오는 게 아니겠는가. 처음부터 끝까지 행운으로 가득한 교대식이었다. 광장 중앙의 조각상을 가득 채운 인파와 셀카를 끝으로 세인트 제임스 파크를 가로질러 빅벤으로 향했다.


한국과는 전혀 다른 나무와 호수, 그리고 규모에 놀랐다. 특히 나무가 정말 특이했다. 허공에 얽히고설킨 나무의 뼈들에 풍경이 더 새롭게 느껴졌다. 볕이 조각나는 호수에서 유영하는 오리들도, 그 호수에 닿을 듯 말 듯 위태로운 나무들도, 그 틈으로 보이는 자그마한 런던아이도. 명화를 너무 깊게 감상한 끝에 그 속으로 빠져든 기분이었다.

조금 더 걷다 보니 웨스터민스터 사원이 보였다. 때마침 지나가는 비행운과 시계탑, 그리고 붉은 공중전화 부스가 함께 나온 사진은 여전히 웅장하다. 이후 부스에 기대 사진도 여럿 찍고, 가로등에 새겨진 샤넬 로고도 구경하며 걸음을 옮겼다. 사실 사원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는데, 줄이 사원을 빙 두르고 있었다. 거기다 유료였다. 내부는 빠르게 포기하고 외관과 기념품 가게만 구경하다 다시 빅벤으로 향했다.


빅벤. 금색 탑에 볕이 들어 더 힘차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 광경은 정말 상상 이상이었는데, 그 아래도 다른 의미로 상상 이상이었다. 여기가 종로인지, 런던인지. 시위란 시위가 다 펼쳐지고 있던 것이었다. ‘이런 건 나라를 안 타는구나,’를 실감하며 얼른 고개를 들었다. 마침 빅벤 옆으로 비행기가 지나고 있었다. 이번 여행은 여러모로 비행기와 연이 깊었다.


런던아이를 지나 네셔널 갤러리로 향하는 길, 작은 궁전 같은 곳의 말과 눈이 마주쳤다. 정말, 말 그대로, 말과. 기마병에게 호위받으며 안으로 들어가니 근위병들이 있었다. 구경을 마치고 다시 나서려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조금 더 기다리니 3차 교대식이 시작되었다. 격식 차린 말과 사람이 격자로 오가는 것을 눈앞에서 구경한 신묘한 경험이었다. 식이 끝나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화로워졌다. 나는 그 분위기를 곱씹으며 다시 길을 나섰다.


도착한 네셔널 갤러리는 광장부터 웅장했다. 안으로 들어가니 단체 관광을 온 학생과 관광객으로 가득했다. 우린 화장실도 다녀오고, 카페에 앉아 커피도 마시며 잠깐 숨을 돌렸다. 아침부터 사람을 너무 많이 만난 탓에 진이 다 빠졌다. 조금 쉰 우린 다시 힘을 내어 많은 명화를 사진과 눈에 담기 시작했다. 해바라기도 의자도, 전부 대단했지만 나는 건물 인테리어가 더 인상 깊었다. 높은 층고와 붉은 벽. 황금색 아치에 수 놓인 문양과 반투명한 천장. 그렇게 한참을, 그림과 건물에 빠져 지냈다.

밖으로 나오니 조금 어두워졌다. 광장에는 우뚝 솟은 기둥과 반짝이는 크레인이 대조되게 나란했다. 버스킹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썩 잘하지는 않았지만. 아, 흰옷을 입은 모델이 광고 촬영을 하고 있었다. 어떤 브랜드인지는 모르겠으나, 모델의 분위기와 스태프의 노고가 느껴져 한참을 구경했다.


점심은 오기 전부터 찜해둔 플랫아이언 스테이크였다. 아늑한 안쪽 자리로 안내받은 우린 스테이크와 곁들일 무언가를, 고기 빼고는 중요하지 않다, 주문했다. 조금 기다리니 사진에서 본 것보다 조금 큰 스테이크와 작은 도끼 두 개를 주셨다. 스테이크는, 말해 뭐하겠는가, 정말 맛있었다. 간도 익힘도 육즙도. 무엇 하나 빼놓을 수 없는 맛이었다.

더 놀란 건 후식인 아이스크림이었다. 주문할 때 받은 도끼를 나갈 때 반납하면 아이스크림을 준다. 와. 나는 플랫아이언이 이 아이스크림만 돈 주고 판다고 하면 당장 사 먹을 것이다. 몽글몽글한 바닐라 아이스크림 위로 진한 카라멜 토핑이 금상첨화였다. 커다란 SOHO 전광과 연하게 들어온 보라색 조명을 배경으로 찍고, 먹고, 즐겼다.


그렇게 시내를 가로질러 호텔로 돌아왔다. 매일 라면만 먹기에는 조금 거북해 일본식 카레 도시락을 저녁으로 먹었다. 맛은 뭐, 적당했다. 바로 앞이 스테이크였는데 무엇이 맛있겠는가. 아무튼, 네셔널 갤러리에서 사 온 노트를 끝으로 넷째 날이 저물고 있었다.


다섯째 날은 온종일 책 구경이었다. 오가며 눈으로만 본 호텔 근처 정원에 들어갔다. 그 속에는 이끼와 꽃으로 둘러싸인 아담한 카페가 하나 있었다. 오픈 전이라 먹지 못해 아쉬웠지만, 구경한 것만으로도 속이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이후 공원 옆 서점에 도착했다. 정말. 나는 영국의 건물과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붉은 벽돌과 그것을 가로와 세로로 지르는 흰 대리석. 중앙의 뾰족한 옥빛 정수리와 창에 비친 하늘. 서점마저 이렇게까지 아름답다니. 나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내부는 아늑했다. 무엇보다 종이 냄새가 무척 향기로웠다. 한 구석에는 목이 닿는 부분에 때가 탄 연한 옥빛의 의자와 구식 라디오가 있었다. 나는 그런 방을 갖길 꿈꾸며 한참이나 눈을 떼지 못했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선물’이란 코너 속 책갈피와 독서 용품을 뒤로 하고 당장 시집 코너를 찾았다. 시집 코너는 지하에 있단다. 그런데 내려가는 계단만 있고 엘리베이터는 없다. 반쯤 포기한 마음으로 직원께 물어보았다. 그분은 그 넓은 1층을 잠깐 훑더니 금세 엘리베이터 앞에 서셨다. 아무리 찾아도 안 분명 내 눈엔 안 보였는데. 역시 영국은 마법사의 나라임이 틀림없다.


지하는 헌책 내음으로 향긋했다. 다양한 장르의 책을 뒤로 하고 당장 시집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이 중고 서적이었다. 표지가 이집트 그림인 시집도 있었고, 누군가의 싸인이 적힌 책도 있었다. 나는 한참을 구경하다 싸인이 적힌 책을 샀다. 물론 여즉 읽지는 못했다. 영어 너무 어렵다.


다시 1층으로 돌아와 보드게임이 가득한 곳의 테이블에 잠깐 앉았다. 책을 읽거나 짐을 정리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작은 경고문이 눈에 들어왔다.


‘Take care of your belongings’


짐 조심하란다. 그래, 여긴 유럽이었지.


공원에서 다람쥐인지 청설모인지 모를 동물을 구경하고 다음 서점으로 향했다. 킹스크로스역 뒤로 다리 하나를 건너면 나오는, 배가 서점인 곳이었다.


Word on the water.

오기 전부터 찜한 또 다른 서점인데, 문자 그대로 서점이 배인 곳이다.


물살을 따라 넘실거리는 탓에 들어가지는 못했다. 하지만 배를 구경, 아니, 서점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감회가 새로웠다. 엄마가 찍어주신 동영상으로나마 안을 구경했다. 정말 좁고 계속 출렁거렸으며, 책과 사람으로 가득했다. 간접 구경을 마치고 근처 마켓으로 가는 길에는 팔고 있는 배도 봤다. 37,000파운드였다.


나름 볼거리가 많았지만, 딱히 끌리는 건 없었다. 바로 옆 마트에서 과자를 잔뜩 사서 돌아왔다. 그 길에 신발과 옷도 구경했다. 백화점보다 가격은 쌌는데, 이번에는 마음에 드는 게 없다. 아무래도 옷 쇼핑은 그른 것 같다는 생각으로 다시 길을 나섰다.

킹스크로스역 안을 가로질렀는데, 사람이 건물 밖까지 늘어 서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보니 세상에, 9와 4분의 3 플랫폼이었다. 나는 소심하게 떨어져 서서 마법봉을 휘두르며 사진 찍는 사람들을 찍었다. 그랬더니 직원분이 “너도 찍고 싶어? 내가 길 터줄까?”라며 다가오셨다. 주목받는 걸 싫어하거니와 그 긴 줄을 새치기한다는 건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길래 “노노노노노노노노노노노노노 아임 오케이 땡큐”를 반복하며 얼른 도망쳤다. 본 것만으로도 만족한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역을 구경했다. 노란 글씨의 타임 테이블, 파란 플랫폼 안내판. 무엇 하나 영화 아닌 곳 없었다.


역 근처 어니스트 버거를 먹으러 왔다. 근데 정말, 건물이 예술이다. 대로변 중앙의 가로는 짧고 세로로 긴 건물이었는데, 지하까지 이어져 있었다. 우린 창가에 앉아 버거 세트 두 개와 어니언링을 시켰는데, 양이 생각보다 너무 많았다. 물론 맛은 있었다. 한국의 수제버거와는 차원이 달랐다.

호텔에 돌아오니 마트에서 산 과일 오 총사와 초콜릿 삼총사, 그리고 녹은 포트넘 앤 메이슨 초콜릿이 우리를 반겼다.


책으로 가득한 하루였다. 읽고 쓰는 것을 좋아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나도 몰랐다. 책 내음이 향긋했고, 그 분위기에 깊게 매료되었다. 백화점에서 시를 썼고, 서점에선 시를 읽었다. 스포일러 하나 하자면, 다음 날에도 시를 썼다. 그리고 시를 썼다는 이야기를 에세이로 쓰고 있다. 아무래도 나는 책을 쓰러 영국에 갔나 보다. 아무래도 내 여행은, 글과 떨어질 수 없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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