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치기 어린 시절엔 나라는 사람은 물론이고, 내 인생 자체가 특별하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 확신했다. 그렇게 강한 자기애를 가지고도 노벨상을 받겠다느니 대통령이 되겠다느니 이런 거창한 목표는 세우지 않았다. 대신 그저 태어날 때부터 ‘특별한 사람’이라 굳게 믿으며 행한 것이 터무니없게도 무술 수련이었다. 그것도 자유롭게 하늘을 날아다닐 수 있다는 ‘무공술’이라는 것을 만화책에서 접한 후 옥상에 올라가 몇 시간 동안이나 발끝에 기를 모으고 수련을 했다. 몇 년 동안의 피나는 훈련이 필요하다고 적혀 있었지만 몇 년은커녕 며칠도 견디지 못하고 답답한 마음만 앞서 옥상에서 뛰어내리고(아마도 날았다고 생각을 했겠지.) 다리를 다치기도 했다. 다쳤다는 사실보다 나의 수련이 부족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내가 특별한 사람이 아닌 것일까라는 생각에 잠시 빠졌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자연스럽게 ‘특별함’이라는 것에 대한 집착을 조금 떼어낼 수 있었다. 학생 때 성적은 딱 욕먹지 않을 만큼이었고, 운동을 해도 체육대회 반 대표 정도는 거뜬했지만 선수를 해보라는 제안을 받거나 스스로 특출 난 재능이 있다는 느낌을 받아본 적은 없다.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즐겼지만 그저 흥이 나서 외치고 흔드는 수준이었다. 왕따를 당해본 적도 그렇다고 어떤 무리를 이끌어 본 적도 없었다. 어디 가서 빠지지도 않지만 튀지도 않는 그런 특별함과 정반대의 무난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결국 내가 태어날 때부터 특별한 사람이라는 사실은 증명할 수 없었지만 대신 인생에서 특별한 에피소드 몇 개정도는 가지고 싶다는 욕심은 차마 버리지 못했다. 어릴 적엔 특별함이라는 것이 하늘을 나는 무술처럼 거창한 것이어야만 된다고 굳게 믿었지만 ‘특별함은 수없이 많은 평범한 것들 속에 숨어있는 사소한 차이’에서 온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내 인생에서 작은 차이를 주기 시작했다
먼저 태생이 시골쥐였던 내가 좁고 좁은 고향을 일찌감치 떠나 혼자 살기를 선택했다. 남들 다하는 단순한 공부라는 정도(正道) 대신 요리를 배웠다. 요리에 재능을 조금 보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저 시골을 떠나기 위한 선택에 불과했다. 대학교에 가서도 대부분 영어를 배우기 위해 떠나는 워킹홀리데이를 나는 영어권이 아니 독일어권으로 선택했다. 남들이 하는 것은 이유 없이 다 거부했다. 지금 뒤돌아보면 몇 개는 맞았고, 몇 개는 틀린 선택이었다. 틀렸던 몇 가지 선택도 교훈 같은 것을 얻었다고 한다면 위안 삼을 수 있다. 그렇다면 맞은 선택과 틀린 선택의 차이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었을까?
특별함을 가지기 위해 그저 남들과 다른 선택을 하는 것이 나의 방법이었다. 남들과 다르다는 것이 특별한 것이라고 착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선택은 한순간의 특별함으로 보일 수 있었으나 아무 목적도 아무 의미도 없는 속이 텅텅 비어있는 특별함이었다. 한국음식에 마늘이 많이 들어가니 나는 ‘마늘을 쓰지 않는 특별한 한국음식’을 만들 거야라고 하는 것과 같았다. 남들과 다른 선택을 하는데 흔하거나 얕은 철학도 없이 그냥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많은 도전과 선택을 했지만 또 많은 실패를 경험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뻔히 실패할 것이 보이는 선택들이었다.
그런 삶을 살던 나에게 억지로 남들과 다른 선택을 하지 않았음에도 특별한 에피소드를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선택하지 않았지만 결정했고, 그 사람과 평생을 함께 해야겠다는 확실한 목표가 있었고, 우연 같은 첫 만남과 도저히 견디기 힘들었던 고난을 결국에는 이겨내고 더욱 단단해져 가는 우리의 관계를 통해 나는 드디어 인생이 특별해짐을 느끼고 있다. 그리고 그 특별함은 어딘가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았고, 이제 그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