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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샨 Jul 22. 2021

우리가 친구로 만났다면

유정은 검고 긴 생머리를 가졌었다. 쌍꺼풀 없는 반달 같은 눈에 작고 동그란 얼굴, 깡마른 몸매에 적당히 늘씬해 보이는 키. 김고은을 닮았다는 말을 가끔 듣는다며 장난스럽지만 수줍게 미소 짓던 모습이 떠오른다. 평소엔 그늘져 보이는 표정도 웃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해맑아졌다. 유정이 기타나 피아노를 치고 노래를 부를 때면 나는 그녀의 분위기에 푹 빠지곤 했다. 자칫 날카로워 보이지만 한없이 연약해 보이는 인상에 마음이 끌렸다.  


만난 첫날, 우리는 같이 살게 되었고 유정은 그날 밤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러줬다. 유정의 목소리는 가늘지만 힘이 있었다. 그녀와 잘 어울렸다. 재주소년의 귤이라는 노래를 부르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녀의 그늘짐도 멋스럽게 느껴졌고 나도 몰래 그런 유정에게 질투가 일었다. 유정은 내가 되고 싶어 하는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유정과 1년을 살았다. 우리는 중국에서 단기 선교사라는 이름으로 일했다. 일하는 학교는 달랐지만 어학원을 함께 다녔고 한국인 모임에서 매주 회의를 하고 예배를 드렸다. 다양한 일을 함께 준비했다. 저녁이 되면 집으로 돌아와 바로 옆에서 중국어 공부나 성경 공부를 했다. 우리가 일하던 지역은 폐쇄적이었다. 다른 선교사들을 제외하고는 서로가 만날 수 있는 유일한 한국인이었다. 익숙한 가족도 친구도 없는 곳에 적응해야 했지만 시간은 외로움을 달래주지 못했다. 오히려 서서히 쌓이는 먼지처럼 우리의 마음에 가라앉고 있었다.


유정과 나는 비슷한 듯 달랐다. 감정적으로 세심한 면은 닮았지만 생활방식이 현저히 달랐다. 중국에 들어올 때부터 너무 짐이 적어서 ‘이게 다냐’는 말을 들은 나였고 반면 유정은 바리바리 필요한 물건들을 무겁게 싸왔다. Mbti로 말하자면 그녀는 극 j였고 나는 극 p였다. 일기장에 글씨를 갈겨쓰는 나와 달리 그녀는 가로세로 간격을 맞추어 글을 썼다. 먹고 잘 곳만 있으면 되는 내 라이프스타일과 달리 유정은 매일 청소를 하고 책상이나 거실을 꾸미곤 했다. 그녀의 취향과 성실함을 동경했지만 다른 우리가 같이 사는 건 쉽지 않았다. 유정의 입장에서 나는 얼마나 대충 사는 인간이었을지. 회상하니 웃기기도 하다. 생활방식이 다르고 예민했던 우리가 함께 사니 트러블이 일어나는 건 당연했다. 상황 때문에 사소한 일도 크게 느껴져서 상대방을 쉽게 미워했다. 마음에 품고 말을 못 해 오해는 점점 커졌고 어쩌다 날을 잡아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어도 간단히 해결되지 않았다. 그때 우리는 너무 쉽게 상처 받았다. 그리고 간절히 사랑받고 싶었다. 가까워지고 싶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던 시간. 결국 방법을 모르겠어 피해 다니는 쪽을 택했다. 난 네게 짐이 될 거야. 속으로 생각했다.


어느 날 선교사님에게 들었다. 네가 자존감이 땅끝에 있다면 유정이는 땅굴을 파고 있어.

유정이 나와 닮은 우울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다. 유정이 지니고 있는 상처가 나와 비슷한 결을 띠고 있지 않을까 짐작했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었다.

넌 충분히 열심히 살고 능력 있고 심지어 예쁘기까지 한데 왜 널 괴롭히니. 질투가 심해서 말하지 못하다 한국에 가기 직전에 편지를 썼다. 우리가 그냥 평범한 친구 사이로 만났다면 어땠을까. 떠나기 전 유정이 내게 말했다.


어떤 사람은 단기간에도 적지 않은 흔적을 남긴다. 한국에 살면서 문득문득 유정이 생각났다. 기억 속의 그녀는 중국에서 만난 모습 그대로였다.


몇 년 만에 만난 그녀는 기억과는 달랐다. 아니, 시간과 상황이 바뀌니 서로 이해할 수 있는 폭이 넓어졌을 것이다. 비슷한 생각을 공유하는 과정은 생각보다 재밌었고 우리의 여전한 아픔을 나누는 과정도 뜻깊었다. 내가 어디가 부족한 사람인지,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지 너는 아니까. 내심 믿고 있었던 것 같다. 나와 그녀는 과거의 상처와 아직 싸우고 있었고 깊은 결함을 지니고 있었음을 이해했다. 그때 서운했다고, 힘들었다고 말하진 않았지만 그냥 어떻게 지내는지 묻다가 속마음을 얘기하게 됐고 이런저런 말을 하다가  털어놓게 됐다. 너에게도 그런 시간이 되었기를. 우리의 대화가 과거에서 한 걸음 멀어지게 했기를 바란다. 이제 내 기억 속의 유정은 중국에 있을 때 보았던 모습만큼 예쁘고 더 고마운 사람이 되어있겠지.



유정은 가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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