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일본 여행 (2023, 7월 24~28일)
일본에 도착하자 공항에 가이드가 마중 나와 있었다. 마음 좋게 생긴 중년의 아줌마였다. 3박 5일을 같이 할 일행은 모두 16명이었다. 우리 가족은 일행 중 가장 어린 사람이었고, 그러면서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었다.
호텔에 짐을 풀고 시작한 첫 일정은 오사카 도톤보리였다.
도톤보리 지역은 과거 물자 수송을 위해 만들어진 인공 수로였지만 지금은 좁은 수로에 관광용 배가 떠다니는 오사카 최고의 관광 명소라고 했다. 별로 길지 않은 수로 양쪽으로 수많은 음식점, 기념품 가게, 술집들이 휘황찬란한 불빛을 내뿜으며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있었다. 가게마다 내건, 자기 성격을 잘 살린 화려하고 특색 있는 간판들이 볼거리였다. 가이드 인솔로 대충 둘러본 후 자유 시간을 가졌다. 원하는 사람은 남아서 알아서 택시로 귀가하기로 했다. 우리도 택시로 가는 쪽을 택했다.
오사카 관광에 증명사진처럼 등장하는 글리코 러너 간판은 금방 찾을 수 있었다. 그 앞에는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이 바글바글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의미성을 다 이해하지 못한 탓인지 나는 별다른 감흥을 느낄 수가 없었다. 1935년 글리코제과에서 처음 간판을 설치하고 그 이후 6번째 바뀐 도톤보리의 상징적인 간판이라고 하는데 굳이 그 앞에서 줄까지 서서 기다렸다가 증명사진을 남길 필요성을, 일행 중 가장 어리고 가장 나이 많은 가족인 우리는 찾지 못했다.
그렇다고 영 안 찍자니 섭섭해서 멀찍이 사진은 한 장 찍었다. 그래야 내가 이곳에온 증명이 될거라는 소심한 생각도 들고해서.
복잡하고 화려하기는 해도 넓은 곳이 아니라 금방 다 보게 되었다. 배를 타면 좀 더 볼만할지 모르지만 그러고 싶지도 않지만 배 탈 수 있는 시간도 지났다. 배가 고팠다. 저녁을 먹을 곳을 찾아야 했다.
끼니 때가 되면 먹어야한다는 그 단순하고 절대적인 명제가 일본 도착 첫날, 우리들의 가장 심각한 문제의 시작이었다.
나는 여행자 최적화된 입맛이라 어떤 음식도 먹어낼 자신이 있는데 남편과 사랑이는 좀 까다로운 편이었다. 고급이어서가 아니라 그 반대여서 힘들었다. 기본적으로 두 사람 모두 새로운 음식이나 향에 대해 거부감이 심했다. 그리고 남편의 입맛은 지극히 토속적이었다. 튀기는 거, 기름진 거, 단 거 싫어하고 된장, 김치, 콩나물, 두부.... 그런 종류를 좋아하는 저렴한 입맛이었다.
사랑이 입맛은 남편 입맛의 조금 미성숙한 버전이긴한데 그덕에 청정했다. 브루클리, 파프리카, 생당근, 생오이, 과일 같은 비조리 음식과 시금치, 김치를 좋아하고 토마토소스를 비롯한 소스 종류를 싫어했다. 아이들이라면 대개는 좋아하는 돈가스, 햄버거, 샌드위치, 튀김 종류 같은 것을 싫어하니 그런 음식이 급식으로 나오는 날은 사랑이가 굶고 오는 날이었다.
쵸콜릿을 포함한 빵이나 과자도 썩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 어쩌다 사 온 과자들은 유통기한이 지날 때까지 굴러다니기 일쑤였다. 사랑이가 안 먹어도 과자가 쓰레기통에 들어가는 일은 잘 없었다. 그러기 전에 내가 먹어서 처리하니까. 나는 음식을 내 뱃속에 버린다.
많은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권하고 싶어 할 바람직한 입맛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집을 나서면 온통 늘어선 인스탄트 음식 사이에서는 사랑이가 먹을 것을 찾기 만만치가 않을 때가 많았다.
다행히 사랑이는 육류와 피자는 좋아한다. 하지만 남편은 좋아하지 않는다. 남편은 맵고 얼큰한 걸 좋아하지만 사랑이는 못 먹는다.
이런 두 사람의 입맛을 맞출 저녁을 찾아 도톤보리 거리를 헤맸지만 아무리 둘러 다녀 봐도 두 사람 모두에게 맞을 만한 메뉴가 보이지 않았다.
밖에 내건 음식 그림을 보면 겉보기에도 달게 보이거나 소스를 버무린 것들이 많았다. 대부분 사람들은 먹음직스럽다고 생각할 사진들이지만 두 사람들에겐 식욕을 떨어뜨리게 만드는 광고들이었다. 한식도 없지 않았는데 일본식이라서 그것도 달거나 이상한 향이 들었을 거 같다며 남편은 모험을 해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일식은 이래서 안 되고 중식은 저래서 안 되고, 한식까지 거부하니 먹을 게 있을 리가 있나. 사랑이는 지친 기색이 완연했지만 착하게도 남편의 까다로운 음식 순례길을 한 마디 불평도 없이 따라다녀주었다.
몇 바퀴를 돌고 나니 배도 고프고 지쳐 인내심의 한계가 오기 시작한 나는 슬슬 짜증이 났다. 맛집으로 소문난 도톤보리 거리에서 먹을 음식을 못 찾다니 말이 되냐고! 내 눈에는 온통 맛집들인데! 그래서 소리쳤다.
"사랑이 쓰러지겠어! 제발 아무 데서나 먹자고요!"
저녁 9시가 될때까지 아무 것도 못먹고 쉬지 않고 거리만 헤매다 쓰러진 사랑이.
그렇게 해서 우격다짐으로 선택한 곳은 치보(CHIBO)였다. 오사카에 온 한국인들이 제일 많이 찾는 유명한 곳이라는 말을 여러 군데서 본 기억이 났고 그것을 이야기해 준 게 조금은 먹혀든 덕이었다.(나중에 보니 우리나라 배우 이승기가 간 곳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 유명해진 이유가 그 때문이 아닌가 싶다.) 한국인이 많이 간 곳이라니 한국인 입맛에 검증도 되지 않았겠냐는 내 말의 설득력보다 그때쯤엔 남편도 지쳐서 어디든 좋다는 자포자기 같은 심정이 되어 있었다.
치보는 오코노미야키가 대표 메뉴이지만 야키소바도 판매했다. 둘 다 님편과 사랑이는 이름조차 처음 듣고 한국에서라면 시도도 해볼 리 없는 음식들이었다. 하지만 여긴 일본이고 한 번쯤은 그런 것도 먹는 게 여행의 재미가 아닐까 하는 게 내 생각이었다. 남편과 사랑이가 공통으로 좋아하는 건 면 요리이니 야키소바는 두 사람이 먹을 수도 있을 거 같았다. 그런데 줄이 무지하게 길었다.
1시간 반이상 줄 선 거 같았다. 배가 고파서 눈앞이 빙빙 돌 때쯤 우리 차례가 되었다.
그렇게 들어간 음식점은 겉에서 보기보다는 넓었지만 다닥다닥 붙은 좌석에는 손님들로 꽉 차있었고 많은 종업원들이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일본의 대부분 지역처럼 영어는 통하지 않았지만 종업원들은 친절했고 메뉴판도 그림으로 잘 되어 있어서 주문하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손님들은 거의 한국인이라 모르는 건 옆 자리 손님에게 물으면 되었다. 테이블에는 넓은 사각 철판이 있어서 주문한 요리가 나오면 원하는 대로 토핑을 넣어서 가열하며 먹는 식이라 시각적으로도 일단 만족스러웠다.
기대에 부푼 것은 음식이 나오기 전까지였다. 면을 좋아하긴 하지만 튀기거니 들큼한 소스는 좋아하지 않던 두 사람은 튀긴 면인 아키소바를 보고 일단 실망했다. 나참, 여기서 칼국수나 잔치국수라도 기대한 건지.....
워낙 배가 고팠던 터라 야키소바는 그럭저럭 두 사람 모두 먹었다. 하지만 오코노미야키는 몇 개 맛본 게 다였다. 두 까탈쟁이가 뭘 먹을 지 몰라서 세 종류나 시켰는데 말이다.
아까워....
값도 오지게 비싸던데....
나머지는 모두 내 차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 비교적 소식파인지라 내 배도 음식물 쓰레기 처리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결국 음식을 많이 남겼다. 마지막에 주문한 한 종류는 손도 대지 못하고 포장을 해달라고 해서 들고 일어섰다. 호텔에 간들 철판에 굽지도 못하고 다 식은 오코노미야키를 먹을까?
음..... 그렇다고 버릴 수는 없잖아. 음식 버리면 죄 받는다고.
어떻게든 내 뱃속에 버릴 거라고 나는 각오를 단단히 하며 치보문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