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회장을 가득 채운 손님들은 모두 한국인들이었다. 장소만 미국일 뿐 낯설지 않은 분위기이고 익숙한 언어들이 편안했다.
식사를 끝낸 하객들의 원탁 테이블들이 양쪽 가장자리로 밀어내며 중앙에 널찍한 무대가 마련되었다.
그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입구부터 꽃으로 장식된 정면까지 버진로드가 깔려 있었다. 마음에 드는 색상과 질감을 찾느라 안사돈이 발품 팔았다는 고급스러운 하얀 천이었다. 버진로드 만이 아니었다. 연회장 안 모든 장식과 배치에 안사돈의 아이디어와 시간 투자와 정성이 닿지 않은 것은 없었다.
다른 연주자 한 사람과 함께 디제잉을 겸해가며 경쾌한 비트로 분위기를 한껏 띄우던 MC가 소리쳤다.
"오늘의 주인공 신랑 신부가 입장하겠습니다."
음악이 바뀌었다. 로맨틱한 가락과 함께 딸과 사위가 입구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두 손을 꼭 잡고 천천히 버진로드로 걸어 들어오는 그들은 행복해 보였다. 바로 직전까지 얼마나 숨 가빴고 초조했는지, 그 사정을 어느 누구도 눈치챌 수 없을 만큼 여유로웠고 차분한 모습이었다.
새신랑 신부의 행진은 꽃 장식한 정면 벽 앞, 하얀 테이블 보가 덮인 탁자 앞에서 멈췄다.
하객들을 향해 돌아선 두 사람의 얼굴에는 행복이 가득 차있었고 이따금 서로를 바라보는 눈길에는 사랑이 듬뿍 담겨 있었다. 그들을 위해 모인 사람들을 향해 깊이 허리 굽혀 인사하자 여기저기에서 응원의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야호~ "
"와우~"
"우훗~"
사위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엉덩이를 흔들어 애교를 떨며 사람들의 환호에 답했다.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자유롭고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하객들의 반응을 적당히 받아치며 모두의 관심도를 이끌어 내던 MC가 소리쳤다.
"결혼식 리셉션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겠죠? 오늘의 하이라이트 신랑 신부의 퍼스트 댄스가 있겠습니다."
허스키 남자가수의 달콤한 목소리가 연회장을 채웠다.
사위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갈 때 조수석에 앉은 딸과 여러 cd를 넣어가며 열심히 노래를 평하고 고르는 걸 본 적 있었다. 두 사람의 음악 취향도 비슷한가 보구나 무심히 넘겼는데 이날의 곡을 고르던 거였던 걸 비로소 깨달았다.
딸과 사위의 퍼스트 댄스는 바로 이때 들었던 브루노 마스가 부르는 just the way you are였다.
손을 꼭 잡고 무대 중앙으로 향한 딸과 사위는 음악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원피스 뒤태를 유심히 봤지만 연회장의 적당히 어두운 조명과 거리 때문에 외관상 꿰맨 표는 보이지 않았다. 아무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또 다른 걱정이 생겼다. 행여나 원피스가 다시 터질까도 염려됐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늘의 주인공인 신부는 드레스 만이 아니라 춤 실력도 어느 정도 갖추고 있어야 했다. 사위야 미국에서 성장했으니 춤 문화에 익숙하겠지만 딸은 춤추는 걸 본 적도 없었다. 로봇에다 통나무인 우리 부부를 보면 딸의 춤 실력이라고 무어 그리 나을까 싶었다.
쓸데없는 기우였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당당하게 무대 중앙으로 나간 딸과 사위의 춤은 아름다웠다.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눈길에는 사랑이 가득했고 춤을 추는 순간에는 주위 모든 걸 잊어버린 듯 서로만 바라보고 있었다. 전문가들만큼 잘 추진 않았겠지만 내가 본 가장 아름다운 왈츠였다.
홀린 듯 눈을 떼지 못하는 사이 두 사람의 춤이 끝났다.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사랑스러웠다. 잔잔한 감동의 여운이 오래갈 거 같았다.
걱정했던 순서는 그다음에도 이어졌다. 딸과 아버지의 춤이었다.
식을 시작하기 전에 MC가 신부와 아버지의 댄스를 할 거냐고 미리 의사를 타진했었고 남편은 하겠다고 했다. 일어서 무대로 나가는 남편의 모습이 너무나 자신만만해 보였다. 미국에 오기 전 리셉션에 이런 순서가 있으니 개인강습받아보자고 남편에게 말한 적 있었는데 남편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혹시 그동안 나도 모르는 춤 실력을 숨기고 있었나? 부디 그랬으면 좋겠는데.
무대 중앙으로 나선 남편은 손을 내밀어 MC에게 마이크를 건네받았다. 춤이 안 되니 대신 연설이라도 하려나? 갸웃대는데 마이크를 통해 남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시겠지만 한국은 춤문화가 발달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저도 춤은 익숙지 못합니다. 하지만 제 딸의 행복한 날을 위해 오늘만큼은 최선을 다해 춰보려 합니다."
짧지만 울림이 있는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전하고 남편은 딸의 손을 잡았다. 당당하게 무대 중앙으로 걸어 나간 남편은 딸과 춤을 추기 시작했다. 워낙 자신만만한 몸짓들이라 혹시나하고 기대했지만 역시였다.
남편은 숨겨둔 춤 실력은커녕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통나무였다. 말 그대로 성의만 다한 춤이었고 최선만 다할 뿐이었다. 사위와는 더없이 아름다운 왈츠를 보여준 딸도 로봇처럼 뻣뻣한 아빠와는 발을 맞추지 못하고 자꾸 엇갈렸다.
하지만 나는 보는 내내 가슴이 뭉클했다. 서툴고 어색한 부녀의 뻣뻣한 춤사위지만 처음 가진, 앞으로도 있을 거 같지 않은 부녀의 시간이 아닌가.
다음은 사위와 안사돈과의 춤이었다.
훌쩍 커버린 아들의 품에서 춤을 추는 어머니의 모습은 그림부터 아름다웠다. 몸짓도 자연스러웠고 무대를 적절히 사용하며 그려 내는 모자의 춤 선들이 고왔다. 안사돈은 만감이 교차하는 듯 눈에 살짝 눈물을 비치기도 했다.
나와 사위와의 춤, 딸과 바깥사돈과의 춤은 생략되었다. 사람들 앞에 서기에는 너무 창피한 실력이라 사양을 하긴 했지만 사실 아쉬웠다. 결혼 피로연 댄스 타임이 이토록 아름답고 감동적인 시간일 줄 알았다면 망설이지 말고 미리 개인 레슨을 받아볼 걸 그랬다는 때늦은 후회도 되었다. 아님 남편처럼 눈 딱 감고 배포 있게 나가 통나무 춤이라도 추든지.
그런데 나를 감동시킨 시간은 그다음에도 또 기다리고 있었다. 마이크를 잡은 MC가 말했다.
"이날을 위해 신랑 부모님이 노래를 준비했다고 합니다. 신랑 부모님의 노래를 들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