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아타운

by 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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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릴랜드 엘리콧시티의 한국 가게들


나성에 가면 편지를 띄우세요

사랑의 이야기 담뿍 담은 편지

나성에 가면 소식을 전해줘요

하늘이 푸른지 마음이 밝은지

즐거운 날도 외로운 날도 생각해 주세요

나와 둘이서 지낸 날들을 잊지 말아 줘요


나성에 가면 편지를 띄우세요

함께 못 가서 정말 미안해요

나성에 가면 소식을 전해줘요

안녕 안녕 내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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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에 히트 친 노래 '나성에 가면'이다. 여기서 나성(羅城) 은 미국 로스앤젤레스를 한자음으로 따온 것이다. 이 노래가 나오던 그 무렵 우리나라는 후진국에서 간신히 벗어나 개발도상국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때였다.

하지만 여전히 남아있던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의 후유증, 그리고 선진국에 비해 출발이 늦었던 산업화로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일할 곳을 찾지 못한 사람들은 다른 나라로 일자리를 찾아 나섰는데 그중 많은 사람들이 부자나라라는 미국으로 향했다. 맨주먹으로 갔던 한국인들은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해보지 않았던 육체노동과 인종차별에 고되고 힘든 날들을 보냈지만 근면, 성실하고 머리까지 좋은 한국인들은 오래 걸리지 않아 자신이 있는 위치에서 자리를 잡아갔다.

미국으로 건너간 사람들의 성공신화가 들려오자 한국에서는 아메리카 드림을 꿈꾸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러던 1972년, 대한항공이 로스앤젤레스, 즉 LA에 정식 취항을 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많은 한국인들이 미국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는데 한국인들이 특히 많이 모여든 곳은 LA 올림픽가(街)였다. 한국인들의 위상이 커져가면서 1980년 로스앤젤레스 시의회에서는 이곳을 코리아타운으로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코리아타운의 공식적인 경계는 동쪽의 버몬트 애비뉴, 서쪽의 서쪽 애비뉴, 북쪽의 3번가, 남쪽의 올림픽대로였다.

당시 얼마나 많은 한국인들이 미국, 특히 LA를 갔는지 단적으로 설명해줄 수 있는 노래가 위의 '나성에 가면'일 것이다. 시대상을 보여주었던 이 노래를 부른 가수 세샘 트리오는 두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두 명의 남자가수도 결국 미국 LA로 이민 갔으니 말이다.

70~80년대는 아직 우리의 국력이 약하던 시절이니 미국 초창기 이민자들은 많은 고생들을 했다. 한국이라면 전쟁을 치른 가난한 나라라는 정도의 인식밖에 없는 미국 사회에서 버텨내려면 얼마나 치열하게 살아야 했겠는가. 한국인 특유의 끈기와 성실로 이루어낸 LA 코리아타운 뒤에는 수많은 한국인들의 눈물과 고통이 숨어있었다. 그렇게 어렵게 자리 잡아가던 중 1992년에 LA폭동까지 터져 힘들게 이룬 모든 걸 한순간에 잃어버리기도 했던 한국 이민사의 아픈 상처도 LA 코리아타운은 간직하고 있다.




나는 1989년 첫 미국 방문했을 때 LA에 살고 있던 외삼촌 집을 방문한 적 있었다. 외삼촌은 한국에서 나름 잘 나가는 사람이었다. 어느 날 미국으로 이민을 갔고 가끔 한국으로 나왔지만 보지 못한 지 십여 년이 지났다. 부자나라 미국에서 살고 있는 외삼촌에 대한 나의 환상은 외삼촌의 집을 방문했을 때 와르르 무너졌다. 한국으로 나올 때 말쑥한 차림의 외삼촌 대신 늙고 초라한 노인이 변변한 가구도 없는 원룸의 낡고 작은 아파트에서 나와 남편을 맞이했던 것이다. 둥게 둥게 쌓인 옷가지, 벽에 쌓인 책들에게서 퀴퀴한 냄새가 풍기는 옹색한 거처였다. 미국에 산다면 무조건 다 부자일 줄 알았던 게 얼마나 큰 착각이었던 건지 그때야 깨달았다..

내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인지 LA 코리아 타운도 내가 상상한 미국의 모습과는 많이 차이가 났다. 인종차별 속에서 열심히 일하고 치열하게 살고 있는 한국인들 현실의 모습을 보며 나는 한참 동안 가슴이 먹먹했었다.

하지만 외삼촌은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도 전혀 없다고 했다. 나이가 들어 달리 경제 활동을 하지 못하는 외삼촌이 어떻게 사나 했더니 '효자 부시 대통령'이 매달 생활비를 대주니 걱정이 없다고 했다. 우리나라에 연금제도가 정착되지 않았던 당시의 내겐 그것도 놀라운 일이었다. 가난은 나라도 구제하지 못한다고 하는 속담을 당연하게 여겼는데 나라에서 연금을 주며 노후의 삶을 보살펴준다니.


그러는 중에도 우리나라는 쉬지 않고 발전하고 있었다.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빨리 시작한 덕에 1990년대에 중반에 들어섰을 때는 정보통신 강국의 기반을 어느 정도 갖추고 있었다. 산업화 시대에는 우리나라의 '빨리빨리'는 고쳐야만 할 고질병이고 사고를 부르는 부끄러운 언어인 줄 알았는데 정보화 시대의 '빨리빨리'는 발전의 원동력이었고 미래로 향한 상징어였다. 정보통신을 주력사업으로 삼은 우리나라의 발전 속도는 눈부실 정도였지만 해외에서 바라보는 한국의 위상은 한국의 발전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외국에서 본 한국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 맥 라이언의 광고 사건이 아닐까 싶다.

'해리와 샐리가 만났을 때', '시카고의 잠 못 드는 밤' 등 출연한 영화마다 한국에서 모두 대히트를 칠 정도로 귀엽고 상큼한 이미지의 맥 라이언은 그 시대 한국인이 가장 사랑한 여배우였다.

그 인기에 편승코자 1997년 국내 생활용품업체 동산 C&G가 맥 라이언과 당시로는 거액인 50만 달러에 샴푸 광고를 찍었다. 그런데 이후 맥 라이언은 <데이비드 레터맨 쇼>라는 토크쇼에서 자신이 광고한 상품과 나라를 싸잡아 비웃는 프로답지 않는 큰 결례를 저질렀다.

"아시아의 이름도 모를 이상한 나라에서 광고를 찍었는데 수녀복을 입고 뭐 하자는 건지, 그리고 상품 명이 섹시마일드라니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작명이야?"

라며 깔깔 웃은 것이다. 사랑하던 사람에게 당한 모욕이었으니 한국인들의 상처는 컸고 상대적으로 분노도 컸다. 거액의 외화를 주고 맥 라이언 같은 외국 배우를 광고 모델로 쓴 동산 C&G에게도 불똥이 날아와 같이 비난의 화살을 받아야 했다. 나중에 맥 라이언이 머리 숙여 사과를 하는 화면을 보내오긴 했지만 한국인들의 사랑을 다시는 회복할 수 없었다.

그렇듯 1997년까지만 해도 한국은 돈을 받고 광고 촬영까지 했던 맥 라이언의 머릿속에서 조차 '아시아의 이름도 모를 나라'였던 것이다. 지금 맥 라이언은 '기생충'이나 '오징어 게임' BTS를 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 가끔은 궁금하다.



그리고 2021년, 딸의 미국 피로연을 위해 온 메릴랜드에서 나는 많이 놀라야 했다. 사위의 고향이고 주지사 부인이 한국인이라는 거 외엔 아는 게 없던 메릴랜드에 그토록 많은 한국인들이 살고 있는 줄도, 커다란 코리아타운이 형성되어 가고 있었던 것도 그동안 전혀 몰랐던 것이다.


(워싱턴=연합뉴스 2015-11-14) 노효동 특파원
10년 전까지만 해도 한산하고 볼거리가 없었던 미국 메릴랜드 주의 한 지방도시가 한인들로 인해 서울의 교외를 방불케 하는 신흥도시로 탈바꿈하고 있다고 미국 CNN이 13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바로 메릴랜드 주의 주도인 볼티모어 부근의 엘리콧시티다. 2008년부터 한인들이 대거 몰려들기 시작하면서 죽었던 경기가 살아나고 다시금 활력을 되찾게 됐다는 것이다.
현재 엘리콧시티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규모는 전체 인구 약 6만 6천 명의 7%로, 강력하고 응집력이 강한 새로운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있다. CNN은 "2013년 엘리콧시티에서 한인들을 비롯한 아시아 인구가 23% 늘어났다"며 "이는 메릴랜드의 다른 도시에서 아시아 인구가 5.5% 늘어난 것에 비하면 괄목할만한 것"이라고 밝혔다.


워싱턴 연합뉴스 2015년 기사를 보면 메릴랜드에 한국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한 것은 2008년부터였던 거 같다. 이때는 우리나라도 어느 정도의 궤도에 들어선 때였고 경제적 문제만이 아니라 자녀의 학업 때문에 이민을 결심하는 사람들도 많았던 때였다. 실제로 메릴랜드 부근에 명문이라 꼽히는 중고등학교가 많다고 한다. 그러니 좋은 학업환경을 만들어 주고 싶은 한국 부모들의 열망이 이곳으로 이끌었던 건 아닌가 짐작된다. 어떤 이유 든 간에 근면 성실의 대명사인 한국인들은 이곳에서도 죽어가던 상권을 살려내고 새로운 신화를 써 내려갔던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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