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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태현 Sep 13. 2015

외로운 생각 하나가 울음을 줍는다

 지리산연가1 < 주천-운봉-인월-금계>

  골똘히 세상의 무늬를 읽는 빗방울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생의 굴곡진 비탈을 돌아오는 바람은 또 얼마나 가슴 시린가. 길 위에 서면 나는 빗방울이 되고 바람이 된다. 빗방울에 얹혀 바람에 나부끼는 생각하는 나무가 된다. 바다이건 숲이건 혹은 외따로 떨어진 섬이건 나는 풍경의 일부가 되어 느리게 흘러간다.    


  그런 길을 몇 년째 걷고 있다. 걷는 것이 그냥 좋은 까닭이다. 호기심으로 시작한 일이 취미가 되었고 이제는 떼어 놓을 수 없는 내 삶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 처음에는 생각들을 붙잡느라 물 위에 뜬 기름방울처럼 길과 겉돌았다. 터벅거렸고 떠오르는 생각들 때문에 풍경들의 무수한 손짓을 놓치기 일쑤였다. 지금은 길과 쉽게 동화되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길마다 고유의 리듬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길들도 저마다의 감성을 지니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때로는 내 땀방울을 요구하고,  때로는 탄성을 자아내게 하는 길. 길은 걷는 것은 어쩌면 내 존재를 인식하기 위한 기도의 한 형식이라고 말해야겠다.     


  ‘지리산 둘레길’이라는 장시를 읽기 시작했다. 3개 도(전북, 전남, 경남), 5개 시군(남원, 구례, 하동, 산청, 함양) 21개 읍면, 100여 개 마을을 잇는 285km에 달하는 장시.     

  남원시 인월 지리산탐방지원센터에서 안내지도 한 장을 받아들고 배낭에 달린 보조 버클을 채우고 나니 가을 하늘은 왜 그리 맑고 투명한가. 여름날의 무수한 앙금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인가. 산들을 왜 자꾸 버선발로 마중을 나오는가. 부드럽게 쏟아지는 햇살들은 다 어쩌란 말인가. 나는 고요한 눈동자를 떠올리고 눈동자에 비치는 호수를 떠올린다. 이런 길을 따라가다 보면 이쁘게 구불거리는 시골길과 그 길을 걸어오는 유년의 풍경들과 마주할 것 같은 기대감에 한껏 들뜬다.   


   ‘달이 뜨면 바로 보이는 언덕’이란 월평마을의 담장마다 벽화가 아름답다. 지리산 둘레길이 개통되면서 시골마을에 활기가 돈다. 민박 간판을 내건 집들이 여럿이다. 지역 경제가 살아났다는 이야기도 들리고 무분별한 사람들 탓에 농작물 훼손이 심각하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그러나 대부분 지역 주민들의 도움과 양해로 완성된 길이라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대형버스를 동원해서 길꾼들이 메뚜기 떼처럼 지나가고 나면 재산이나 다름없는 농작물 피해가 상당할 것이며 쓰레기 같은 환경오염도 심각할 것이다. 이런 부작용을 감수하면서까지 앞마당과 사유지를 내준 사람들을 생각하면 공정여행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눅눅한 숲 냄새가 나를 에워쌌다. 길가에는 고사리 밭이 지천이고 밤송이가 터져서 알밤들이 뒹굴었다. 나는 숲 냄새가 알맞게 익은 곳까지 걸어 들어갔다. 나무들의 거친 피부와 숨소리들이 들렸다. 다가올 인고의 시간을 위해 애써 몸을 다독거리고 있는 나무들. 나무들의 시간 속에는 외로움의 냄새가 배어 있다. 순응의 방식으로 삶을 유지하는 족속들. 그래서 나는 몇 백 년이 된 정자나무나 노송들을 보면 경외감마저 든다. 이제 막 삶을 시작한 어린 나무들의 여린 가지들마저도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가을날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선 감나무를 생각해보라. 잎과 열매를 떨군 가지들이 서로 다치지 않게 뻗어 막막한 허공으로 나아가는 그 모습이 얼마나 슬프고 아름답던지 눈물이 핑 돌았던 적이 있다.      


  오붓한 산길을 벗어나자 들판이 시원스럽게 펼쳐졌다. 농로를 따라 억새와 갈대들이 긴 울음을 뽑아내고 있었다. 나는 이리저리 흔들리는 바람의 흔적이 좋다. 

  “괜찮아, 사람이니까 그렇지. 흔들리지 않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어?” 

  나를 위로해 주는 것 같아서 좋다.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수많은 결정의 순간이 있었고 그럴 때마다 갈대처럼 수없이 흔들렸다. 우유부단한 성격 탓으로 돌리고 애써 잊으려 해도 후회라는 이름의 갈대가 내 마음에 오래도록 자라고 있었다. 그래선지 갈대를 볼 때마다 근친의 감정을 느낀다. 외로운 생각 하나가 하얀 손을 펼쳐 갈대의 울음을 줍는다. 산다는 것이 실은 조용한 제 울음이었음을 우리는 모르고 살고 있지 않는가.       

  가왕 송흥록 생가에 들어 잠시 판소리에 젖었다. 느티나무 쉼터에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삼삼오오 무거운 다리를 풀고 있었다. 나도 한 자리 차지하고 다리 쉼을 하고 일어서니 뻐근했다. 단조로운 둑길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저 너머까지 훤히 보이는 길은 매력이 반감된다. 역시 길이란 구불거리면서 예기치 않게 한방 갈기는 주먹들을 여기저기 숨겨놓고 있어야 매력적이다. 하늘은 시리도록 푸르렀고 구름은 한가로이 떠 있었다. 배산임수의 전형적인 농촌 풍경들을 뒤로 남긴 채 민박집을 예약해둔 운봉읍 삼산마을에 들어섰다. 계곡에서 끌어들인 물이 공동우물터와 마을을 돌아나가고 있다. 군락을 이룬 아름드리 소나무들의 거침없는 푸름과 기상이 보기 좋았다.   


  민박집에 여장을 풀고 동네를 한 바퀴 휘 돌았다. 어디선가 향수를 자극하는 냄새가 풍겼다. 이웃집에서 마른 깻단을 태우고 있었다. 푸르스름한 연기가 나풀거리며 가을 하늘에 스며들고 있었다. 연기를 받아들이는 허공은 부드럽다. 오래오래 그것을 바라보고 있으면 신비하한 느낌마저 든다. 하나가 다른 하나에 스며드는 것, 혹은 번져서 사라지는 것. 새들도 그렇게 창공에 스며들고 번져서 사라지는 것이다. 고요한 어둠이 곧 내릴 것이다. 텃밭의 싱싱한 푸성귀들도 담장 위의 탐스런 감들도 그윽하게 어둠 속에 잠길 것이다. 이런 정감 어린 풍경을 찾아서 나는 도시를 떠난 것이다.        


   두레밥상을 받았다. 손님들 상을 일일이 봐줄 수 없어 식사시간을 맞춘다는 할머니 말씀이 조금 야박하다는 생각을 했지만 막상 밥상을 받고 보니 입이 떡 벌어졌다. 6천 원짜리 밥상에 온갖 산나물이 가득했다. 내 생애 처음 먹어보는 민들레김치와 생강나무잎 장아찌. 봄의 향기가 버무려져 두 가지만으로도 행복한 밥상이었다. 거기다 두레밥상에 같이 엉겨 붙은 천안에서 온 아가씨 둘과 또 서울에서 온 아가씨 둘. 중년의 남자에게 이런 조합이라니. 할머니가 반주로 내놓은 약주를 한 잔씩 나누며 두레밥상이 점점 가벼워졌다. 말을 섞으면서 점점 흥겨워졌다. 마무리는 오미자차로 했다. 소문이 나서 이렇게 안 할 수가 없다는 할머니 말씀에 힘들지만 최선을 다한다는 속마음이 내비쳤다. 하기야 나도 인터넷에  포스팅된 걸 보고 이 민박집을  선택했으니 그럴 수밖에. 기대가 기대 이상일 때 여행자들은 뜻밖의 선물을 받은 것처럼 행복해진다.    


  간들거리는 억새밭을 지나 덕산 저수지에 이르러 가슴이 탁 트였다. 산비탈에 자리 잡은 저수지의 품이 넉넉했다. 저수지를 끼고 도는 길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몇 번이고 돌아보았다. 여행자의 가슴을 적시는 길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 길들은 인공적으로 조성할 수가 없다. 비와 바람과 달빛이 무심히 놀다가는 곳이라야 한다. 질경이나 강아지풀 같은 식물들이 어우러져야 한다. 무뚝뚝한 돌멩이도 있고 일하러 가는 아버지 장화발자국이나 고라니 발자국 같은 것도 한두 개는 찍혀 있어야 한다. 자연과 인간의 삶의 흔적이 조화롭게 빛나는 길. 그런 길에 서면 우리의 내면이 빗장을 풀고 나온다. 가족 간의 불화나 삭이지 못한 분노,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까지도 내숭 없이 제 모습을 드러낸다. 일상 속에 갇혀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민낯들을 길 위에서 만나게 되는 것이다.     

 하얀 꽃을 인 그대와 사이좋게 걷다가 

 토라진 듯 돌아서서 걸으면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몇 날 몇 시 

 어디서 만나자 약속한 일 없어도 

 필연처럼 다시 볼 수 있을까

 하릴없이 술자리에 가야 하고

 사소한 것들 바라보는 일도 많은데 

 그렇게 애 터지게 해찰하고서

 땀이 송골송골 맺힌 그댈 만나 

 오이 하나 

 뚝 분질러 나누어 먹을 수 있을까

 후생에 다시 만나고 싶으냔 그대 물음에

 아직 답을 주지 못했는데

 비바람 불고 눈보라 치는 언덕을 지나

 돌고 도는 길

 골똘하게  물레질하던 어머니 곁에서

 아주 먼 곳까지 이어지던 꿈길처럼

 그대와 다시 걸을 수 있을까    

  -졸시 「둘레길」 전문-    


  회덕마을에서 구룡치로 이어지는 숲길은 이틀간 걸었던 길 중에서 단연 으뜸이었다. 꼬부랑거리며 숲으로 들였다가 가장자리로 밀어냈다가 길게 빨아들였다가 내뱉었다가 숲이 나를 희롱했다. 시원하고 아늑하고 편안한 잠자리에서 좋은 꿈을 꾸고 있는 듯했다. 구룡치에서는 경사가 심한 내리막길이  계속되었다. 역방향으로 걷길 잘했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주천에서 구룡치로 오르는 사람들을 보니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산과 들과 마을을 이은 환형의 둘레길 한 도막을 잘 우려먹고 나니 갑작스레 더 걷고 싶었다. 기왕에 온 길. 예비해 둔 시간이 있어서 마음이 넉넉했다.    


  개천절 연휴를 맞아 어머님 생신을 쇠러 가던 일정을 하루 더 늦춰서 3코스를 걷기로 했다. 주천에서 남원으로 이동하여 파킹해 둔 자동차를 가지고 다시 출발지점인 인월로 갔다. 인월에서 금계까지 8시간 정도. 반을 걷고 매동마을에서 숙박을 하고 다음 날 반을 걷는 계획을 세웠다. 상당히 긴 코스인데 시간을 어림하니 충분히 마칠 수 있을 것 같았다. 무리였을까. 오금이 아파오기 시작했으나 중도에 그만 둘 수도 없었다. 어떻게든 중간 지점인 매동마을까지 가야 했다. 산길이 많았고 오르막이 많았다. 정상으로 치닫는 오르막은 나를 무척 지치게 한다. 호연지기가 부족한 탓인지 모르겠다. 고통을 견딘 후 더는 오를 곳이 없는 정상에서 느끼는 상쾌함은 말할 수 없이 좋지만 나는 힘들게 오르는 과정이 썩 달갑지 않다. 아마도 나에게 정복자나 탐험가의 유전자가 없다는 것일 게다. 백두대간을 종주했다거나 100대 명산을 올랐다는 이야기들이 부럽기는 하지만 나는 웬만해서는 엄두를 내지 않는다.     

   도중에 만난 황매암의 아름다운 고적함을 뒤로 하고 한 무리의 길꾼들과 함께 장항마을의 당산 소나무를 지나 매동마을로 향했다. 1박 2일 팀이 다녀간 뒤로 지리산 둘레길이 유명해졌다. 한낱 예능에 지나지 않지만 매스컴의 위력은 대단하다. 그들이 다녀간 쉼터나 민박집은 늘 그들의 포스터가 걸려있다. 매동마을도 그로 인해 유명세를 탄 곳이다. 느닷없이 일정을 변경한 탓에 겨우 예약을 해두었다. 하지만 마을로 들어가는 이정표를 보지 못해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 날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으나 인가를 찾을 수 없었다. 산 속이었다. 무작정 걸었으나 슬금슬금 걱정이 기어올랐다. 둘레길이니 당연히 마을을 끼고 가겠거니 생각한 게 잘못이었다. 어떤 마을은 꼭지가 긴 포도송이처럼 코스에서 멀리 떨어진 곳도 있었다.    

   불안감 끝에 상황마을 외딴 펜션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숙박료가 더 비쌌고 밥상도 형편이 없었다. 그나마 어둠 속에서 걷지 않았다는 위안이 있었지만 아침을 먹고 싶은 생각이 없어서 사과 한 알로 끼니를 때우고 길을 나섰다. 아스하란 고개가 기다리고 있었다. 등구재. 중턱에 서니 지리산 주능선이 한눈에 들어왔다. 비탈진 산골짜기에 다랑이논들이 겹겹이 주름져 있었다. 분지에는 마을들이 다소곳하게 똬리를 틀고 있었다. 아침 짓는 연기가 피어올랐던가. 등구재를 오르다 사내가 손수 지었다는 황토 집에 마음을 고스란히 빼앗겼다. 주인장의 물 받아 가라는 친절함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가슴이 확 트이는 전망이 매혹적이었다. 길을 걸으며 정말 마음에 드는 집을 만나곤 한다. 소쇄원이나 명옥헌 같은 집은 아니어도 주인의 정성스러운 손길이 느껴지고 자연과 잘 어우러진 집.      


  등구재를 넘으니 경상남도 땅이다. 장터에서 국밥 한 그릇을 먹고 힘들게 이 고개를 넘었을 장사치들이 떠올랐다. 간난 하게 살았던 옛 시절이 뭉클하게 만져졌다. 운무가 드리운 푸르스름한 아침 산에서는 신성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밤새 감싸고 있다 서서히 놓아주는 저 순연한 손아귀. 멀리 천왕봉이 바라다보였다.     

  하늘은 얼마나 파랗던가. 그 바람은, 그 햇살은, 그 푸르스름한 산들은, 은빛 억새 물결과 황금들판은. 언제든지 경로를 바꿀 수 있고 언제든지 유예가 가능한 길을 걸으며 마음이 젖어드는 침묵의 시간 속에서 나는 행복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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