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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태현 Sep 12. 2015

다들 어디에 계시는가

지리산 연가 2 <수철-동강-금계>

  산청 터미널에 내리니 오후 1시가 넘었다. 고속도로가 정체된 탓에 예상보다 1시간이나 늦었다. 급히 점심을 먹고 수철마을로 가는 군내버스에 올랐다. 빈자리가 없었다. 숨을 고르며 서 있는데 뭔가 등 뒤에서 스멀거리는 것이 있었다. 뭘까. 둘러보았다. 그 스멀거림의 실체는 좌석에 앉아있는 스무 명 남짓 노인들이었다. 내 눈이 의심스러웠다. ‘6시 내 고향' TV 프로그램에서 무심하게 보았던 그런 풍경, 정말 그랬다. 질기고 주름진 시간들이 버스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평소에 자주 접해보지 못했던 기운이 나를 에워싸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마을에서나 신생아 울음소리를 더 이상 들을 수 없다는 이야기가 실감 났다. 빈집이 늘어나고 사람들의 온기가 사라지고 나면 폐허로만 남게 될 고향과 부모님들이 거기에 있었다.     

  흐린 하늘을 이고 버스가 한가롭고 여유로운 가을 속을 내달렸다. 한 달 만에 다시 찾은 지리산 둘레길. 불콰하게 한 잔 걸친 사내의 얼굴이다.     

   마을은 집들이 서로 등을 맞대고 있어도 정겹다. 비탈지면 비탈진 대로, 터가 좁으면 좁은 대로 마당을 내고 지붕을 얹으면 이웃이 생기고 촌락이 형성된다. 고샅길을 걷다 보면 아래채 어디선가 할아버지 헛기침 소리가 날 것 같고 올망졸망한 조무래기들이 강아지를 앞세워 골목을 달려올 것 같다. 붉게 잘 익은 앵두가 담장 너머로 손길을 유혹하고 애호박 하나가 덩그렇게 매달려 침을 맞으려고 궁둥이를 내놓고 있을 것 같다. 어디 그 뿐인가. 

  “새댁, 요거 쫌 맛보소잉.” 

  울타리 너머로 옆집 아낙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시루떡을 건네면,

  “워따, 뭔 떡이다요?” 앞치마를 두른 새댁이 볼이 발그레하게 받아 들고는 부엌으로 사라졌다가 빈 접시에 홍시 서너 개를 올려 되돌려 드릴 것 같다.    


  오감을 풍부하게 하는 것이 마을길이다. 지리산 둘레길은 100여 개에 달하는 마을을 하나씩 꿰어 지리산 목에 걸어놓았다. 세공해서 만든 진주 목걸이가 아니라 감꽃 목걸이다. 단발머리 소녀가 감꽃을 오색실에 꿰어 어머니 목에 걸어 드리고는 흐뭇하게 웃고 있는 그런 모습. 그러나 막상 길에서는 그런 어머니와 소녀를 만나기가 쉽지 않다. 추수가 끝난 들녘은 인적이 없고 마을에 있는 회관에도 사람이 없는 눈치다. 곶감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어도, 빨래가 널려 있어도 이상하리만큼 조용하다. 다들 어디에 계시는가.     

  수철마을에는 관광버스가 세 대 그리고 여러 대의 승용차들이 주차해있었다. 주말을 맞아 단체 길꾼들을 태운 차량이다. 나는 떼로 몰려가는 그런 길은 사양하는 편이다. 편리성 때문에 선택한 일이겠지만 모르는 이들과 얼굴을 섞고 말을 섞는 것이 그리 달갑지 않다. 그뿐만 아니라 내 체력에 맞게 시간을 조절할 수 없고 급작스런 상황에 계획을 변경할 수 없다. 더 중요한 것은 정작 길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이다. 부부끼리, 친구끼리, 가족끼리 길을 걷는 아름다운 풍경은 호젓해야만 느낄 수 있다.     


  고동재를 거쳐 정상의 산불감시초소에서 한숨을 돌렸다. 한 달 전에 왔을 땐 단풍이 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는데 단풍이 절정이었다. 노랗고 빨갛고 푸른 것들이 점묘화를 이루었다. 생명의 기운이 넘실대는 지리산 자락에 이런 황홀한 광경이 펼쳐지다니. 피아골이나 이름 없는 계곡 어디에도 지금쯤 화염이 넘실거리고 있을 것이다. 불쑥 거대한 카멜레온이 혀를 날름거리며 다가올 것 같았다.     


  산청 함양사건 추모공원에 이르자 어스름이 내렸다. 위키백과에서는 ‘산청, 함양 양민 학살 사건은 1951년 2월 7일 경상남도 산청군, 함양군 주민에게 공비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대한민국 군에 의해 일어난 민간인 대량 학살  사건이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신기루 같은 이념 때문에 705인의 민중들이 헛되이 목숨을 잃었다. 위령탑 앞에서 묵념을 올렸다. 역사의 상처가 치유될 그날이 언제 올지 모르는 일이지만 명예회복이 되어 추모공원이 조성된 것이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조정래 선생의 ‘태백산맥’을 기차 통근을 하면서 절절하게 읽었던 기억이 새삼 떠올랐다.     


  어둠이 내린 동강마을에 이르러 여장을 풀었다. 역시나 노부부가 방 두 개로 운영하는 민박집이다. 할아버지는 기척이 없고 허리가 약간 굽은 할머니께서 밥상을 차리셨다. 텃밭에서 따온 싱싱한 상추와 고들빼기김치, 청국장 맛이 구수하였다. 내가 오른 오르막길은 다른 이의 내리막길이고 내가 내려가는 내리막길은 누군가의 오르막길이다. 그걸 모르고 살아온 것이 아니지만 저녁을 먹으면서 새삼 힘들게 올랐던 오르막길이 내 생에 몇 번이나 더 남았을까 생각하니 밥상을 받는 것이 겸허해졌다. 그리고 홀몸으로 시간의 늪을 헤쳐 나가고 있는 구순 노모가 떠올랐다.  

  동강마을에서 구시락재를 넘어 운서마을 가는 길이 아름다웠다. 산비탈을 휘감아 도는 길을 고갯마루에서 바라보면 설렘이 인다. 저 길을 넘어 내가 가고 또 누가 오는 것이다. 그렇게 수많은 세월이 흐르는 것이다. 마을과 마을의 소통은 마치 실전화기 같은 이 길을 통해 이루어졌을 것이다. 마을의 대소사가 그렇게 옮겨 다니고 흉흉한 소문이나 적대감도 그렇게 옮겨 다녔을 것이다. 내 유년의 고향에도 고만고만한 마을들이 붙어 있었는데 텃세가 심한 편이었다. 동년배들이 우리 동네 앞을 지나갈 때면 이유 없이 시비를 걸었고 멀리까지 쫓아내곤 했다. 그러다 투석전이 벌어지기도 했고 피를 보기도 했다. 나에게도 자랑스럽지 못한 흉터가 있는데 바로 오동나무 아래서 투석전을 벌이다 얻은 것이다. 시장통에 사는 것이 무슨 큰 벼슬이나 되는 양 껍쩍대고 다닌 걸 생각하면 절로 웃음이 나온다.     

  옹기 위에 놓아둔 모과가 향기로웠다. 논과 밭을 일구고 사는 촌로들의 취향은 아니다. 도회적인 감성을 가진 민박집 주인장의 취향이다. 때로는 이런 것들이 여행의 맛을 미묘하게 만든다. 마당에 장미터널을 만들고 노란 소국을 가꾸거나, 대문간에 빨간 우체통을 세우거나, 커다란 바람개비를 꽂아두는 것들은 다소 이국적인 일들이다. 마루 밑에 허접한 살림살이가 켜켜이 쌓여있고, 낡은 경운기와 농기구들이 어질러진 마당과는 분명 이질적이다. 나는 시골 본연의 것들을 찾아 길을 걷는 편인데 어느 순간에는 이국적인 것들에게 더 마음을 뺏기곤 한다. 둘레길이 만들어지고 길꾼들이 늘어나면서 도회적인 민박집들이 많이 들어섰겠지만 원주민 격인 촌로들은 그런 모습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동강과 금계 구간에 벽송사 가는 고즈넉한 숲길이 있다는데 길이 끊겼다. 이유인즉 길꾼들로 인해 농작물 훼손이 심해서 주민들이 둘레길을 폐쇄했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길꾼들이 아무리 많아져도 민박치 는 주민들과 간이 휴게소에서 먹거리를 파는 주민들을 제외하면 하등 생활에 보탬이 될 일이 없을 것 같다. 형형색색 화려한 아웃도어를 입은 사람들을 보면서 적적했는데 이제 사람 사는 것 같다고 좋아할 촌로들도 없을 것 같다.     


  세동마을에서 짐을 실은 작은 수레를 힘겹게 끌고 가는 촌로의 긴 그림자를 보았다. 퇴행성관절염이라도 앓고 있는 것인지 다리가 몹시 무거워 보였다. 자식들은 다 출가했을 것이고 대처에 나간 그놈들이 가끔 안부 전화라도 하는 것인지 여쭙고 싶었다. 명절이면 손주들 때때옷 입혀 열 시간씩 힘들게 운전해서 내려오는지,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나시라고 온수매트라도 사서 보내오는지. ‘워낭소리’ 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생의 숭고함은 넥타이 매고 번듯한 빌딩에 들어 사는 사람들에게서는 도저히 느낄 수 없다. 낮은 곳에서 묵묵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투박한 손과 흙빛의 얼굴.     

  삶을 보듬고 있는 길을 걸으며 나는 좀 더 겸손해지고 낮아져야 한다. 내가 가는 길은 어디인가. 나는 어떤 길을 걷고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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