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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태현 Sep 13. 2015

그늘을 위한 만찬

지리산연가3  <수철-성심원-운리-덕산>

  다시 산청이다. 작년 가을에 다녀간 후로 지리산에 대한 그리움이 더 커졌고 마침내 신록을 핑계로 둘레길 위에 섰다. 몇 번을 보더라도 결코 질리지 않는 것이 있다. 내게는 목가적인 농촌 풍경이 그렇다. 정자나무 아래서 다리 쉼을 하고 마을에 들어서면 구불구불한 고샅길이 참기름 냄새가 나는 부엌으로 인도해 줄 것 같고, 낮은 돌담 위에는 호박넝쿨이나 수국들이 함박웃음을 터뜨리며 길손을 맞이해 줄 것 같다. 주인장 기척을 대신해주는 신발들과 마루 밑 허드레 살림들과 배를 깔고 누운 백구 새끼들. 나는 그곳에서 천진난만한 아이를 떠올리고 가난하고 순수했던 그 시절을 회상하고픈 것인지 모르겠다.    

  어머니께서 우리 집에 오셨다. 다니러 오신 것이 아니라 아예 함께 살려고 작정하고 오셨다. 큰 여행가방과 손가방 두 개에 옷가지와 이런 저런 약봉지, 쇠잔해진 기력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까지 죄다 싸들고 오신 것이다. 적적하게 사시는 것이 얼마나 힘드셨으면 그러셨을까. 더욱이 고관절 수술 후 보행까지 자유롭지 못하니 외출도 할 수 없는 어머님의 처지가 오죽했을까. 충분히 납득이 갔다. 노년이면 따뜻한 밥 한 그릇도 중요하지만 사람 냄새가 그리운 것이다.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사는 가족이 주는 심리적인 안정감, 노년의 외로움을 치유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약이란 걸 누가 모르겠는가. 정말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미리 말씀이라도 하셨으면 좋으련만. 부모가 자식에게 “느그랑 함께 살고 싶은디 느그 생각은 어쩌느냐?”고 사전에 허락을 받아야 할 일이 아니지만, 나도 아내도 갑작스런 일에 당황스럽기만 했다. 마음의 준비라도 하고 있었으면 이러지 않을 텐데…. 아내는 이 상황을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냐고, 자식이라고 이렇게 해도 되느냐고 묻고 따지고 싶은 것이다. 거기다 안산 형님도 계시는데 왜 우리 집이냐고 항변하고 싶은 것이다. 4월 지리산의 연두를 보려던 꿈도 깨지고 모든 것이 다 엉망이 될 것 같은 절망감이 아내의 온몸을 휘감고 있었다.   

  

  그리고 한 달. 나는 어떻게든 아내의 스트레스를 풀어줘야 할 의무감을 느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니 해야 하는 일이란 아내의 마음을 달래서 이 상황을 피할 수 없는 일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5월 연휴를 지리산 둘레길에 바쳤다. 미셀 옹프레는  철학자의 여행 법이라는 저서에서 여행은 자아를 치유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에 더 익숙해지기 위해, 더 강해지기 위해, 더욱 스스로를 잘 알기 위해 떠나는 것이라고, 여행을 통해 우리 자신의 가장 어둡고 그늘 진 부분과 가장 친밀해지고, 가장 예민해지고, 가장 가까워지게 된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나를 들여다보는 법을 모른다. 오늘처럼 어떤 목적을 갖고 길을 걸으면 더욱 그럴 것이다.    


  산청 읍내에서 경호강에 이르는 길. 이팝나무들이 하얀 꽃을 피우고 있었다. 쌀밥나무라고도 불렸던 꽃. 주렁주렁 달린 저 꽃들을 보며 보릿고개의 허기를 달랬단다. 그래서일까. 마을마다 이팝나무들이 많다. 경호강의 물소리가 맑고 달았다. 오랜만에 아내의 표정도 밝았다. 수철리에서 시작되는 6코스. 경호강을 따라 성심원까지 가는 길은 비교적 단조롭다. 강변 풍경이 그렇고 숲이 없는 길이 그렇다. 나는 거리는 멀지만 마을과 산과 저수지가 어우러진 우회로를 택했다. 갈림길을 안내하는 이정표는 때로 보자기로 싼 마법 상자 같아서 예기치 않은 즐거움을 주기도 한다. 길을 하나 꺾어들자 이내 정겨운 풍경이 펼쳐졌다. 연두를 보고자 했으나 산과 들은 벌써 초록의 난장이 펼쳐지고 있었다. 대숲에 바람이 일었다. 보리밭에 바람이 숨어들었다. 바람은 바람을 쫒으며 허공에 바람의 무늬를 새겼다. 저수지를 발치에 둔 내리 마을의 집들이 별장처럼 아름다웠다. 저런 곳에서 한 달쯤 머물렀으면, 유럽에는 그런 곳이 많다지만 이곳도 그와 버금갈 것 같았다.   

 

  저녁보다 이른 시각에 산청 둘레길 센터를 겸하고 있는 성심원 게스트 하우스에 도착했다. 성심원은 한센병 환우들이 공동체로 살아가는 곳이란다. 맥주 캔 하나를 들이켜는데 수녀들이 보이고 종루가 보였다. 게스트 하우스는 처음이었다. 아내와 따로 방을  배정받았다. 하룻밤 생이별이었다. 모르는 사람들과 하룻밤을  함께하는 것도 쉽지 않은 경험이라 그리 달갑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니 견딜 수밖에. 정말 나는 다른 사람과 쉽게 말을 섞지 못한다. 센터 마당의 평상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환담을 나누고 있는 젊은이들을 보니 부러웠다. 등을 걸고 밤이 이슥할 때까지 이어질 것 같은 저런 만남들. 적절한 화제를 골라 한 장의 카펫을 짜듯 말을 주고받는다는 것, 인간만이 공유할 수 있는 최상의 수공 기술이 아닐까. 일찍 온 까닭에 공동 샤워실의 사용시간에 구애를 받지 않고 샤워를 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함께 자는 길벗들은 아직도 밤을 즐기고 있을 것이었다.    

 

  쉬운 일인데 가끔 길을 놓친다. 둘째 날 아침 7코스를 시작하는 성심원에서 길을 잘못 들어 지름길로 들어섰다. 강을 따라 걷다 어천마을을 돌아 아침재에 이르러야 하는데 곧장 아침재에 오른 것이다. 인생의 길도 이러할 것이다. 때로 목표를 향한 길을 잃고 헤매기도 하고 옆길로 샜다 다시 바른 길로 돌아오기도 한다. 나의 사춘기가 그러했듯이.    

  어쩌면 지리산 둘레길 7코스가 가장 힘들다고 했다. 성심원에서 웅석봉을 거쳐 운리 마을에 이르는 길. 그러나 초입의 계곡에서는 시원한 물줄기들이 길손을 반겨주었다. 가뭄에도 흐르는 계곡물을 보면 정말 어디에 저 많은 물을 숨기고 있었을까 신비스럽기도 하다. 잠시 숨을 고르고 오르기 시작했다. 800 고지까지 오르막길이 계속되었다. 고산준령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텐데 숨이 턱 막히고 허벅다리가 묵직해온다. 땀이 비 오듯 흐른다. 7코스는 무리하지 않고 쉬엄쉬엄 가자고 다짐을 했는데도 길이란 그렇게 해찰이 쉽지 않다. 특히나 오르는 길에서는 멈추기가 쉽지 않다. 어서 빨리 고갯마루에 다다르고 싶은 마음뿐이다. 그러는 중에도  지난밤 함께 생이별을 했던 남양주 부부들 걱정이 됐다. 아주머니가 다리가 좋지 않아 약간 절뚝거리며 걷고 있었는데 과연 이 가파른 길을 오를 수 있을는지.    

  웅석봉 고갯마루에서 점심을 펼쳤다. 마땅한 그릇을 준비해 오지 않아 게스트 하우스에서 비닐봉지에 밥과 반찬 몇 가지를 쌌다. 중간에 점심을 해결할 수 있는 곳이 없다니 주먹밥이라도 요긴할 수밖에 없었다. 밥상이라고 하기엔 너무 남루하다. 그러나 마주 앉아 함께 먹는 동반자가 있고, 바람이 있고, 투명한 햇살이 있으니 먹는 일이 그저 달기만 하다. 아내의 얼굴을 보니 문득 그늘이 보이지 않았다. 잘한 일이다. 이렇게 땀을 흘리며 자연의 품에 안겨 있다는 것. 긴 임도를 걸었다. 시멘트길, 자갈길이라 여간 걷기가 쉽지 않았다. 터벅거려지고 지루해졌다. 신록들 사이로 청계저수지가 내려다보였다. 지난 가을 보았던 옥계저수지처럼 반가웠다. 이 깊은 산중에 저수지라니.     

  걷고 걸어서 인기척이 없는 점촌 마을의 골목길에 이르렀다. 적요하다. 왜 나는 이런 적요한 풍경이 좋은지 모르겠다. 활력이 넘치지 않은 곳인데 이런 분위기에서 무엇을 느끼고 있는 것인가. 노년의 막바지 같은 시골 동네. 담장 밖으로 수국 몇 송이가 화사했다. 감나무들로 푸른 봉오리를 맺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지리산은 감나무가 천지였다. 곶감으로 유명하다니 당연히 감나무가 많을 터. 탑동마을에 이르니 신라시대 창건한 단속사지 터가 있고 그 터에 동서삼층석탑이 고즈넉한 풍경을 보여주었다. 보물이란다. 그 시절엔 수백 칸이 넘는 대찰이었으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폐사되었다고 하니 너무 안타까운 일이다.    

  산청에는 유명한 삼매가 있다고 한다. 나무를 심은 세도가의 당호나 벼슬을 따 이름을 붙였다는데 이름 하여 고려 말기 때 문신 원정공 하즙이 심었다 하여 ‘원정매’, 정당문학 벼슬에 오른 강희백이 심었다 하여 ‘정당매’, 영남학파의 거두였던 남명 조식이 심었다 하여 ‘남명매’이다. 가장 오래된  매화의 향기를 쫓아 많은 이들이 이곳들을 찾고 있다. 기실은 나도 이번 둘레길 정보를 여기 저기서 얻으며 삼매를 볼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가진 터였다. 봄은 아니더라도 그 자태만은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그러나 단속사지 정당매는 640년의 비바람 속에서 이미 기력이 쇠하여 고사하고 후손을 위해 접을 붙여 식재를 해 놓았단다. 보호수로 지정하고 조금만 더 관심을 기울였다면 이 지경에 이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었다. 남명 선생인 사명대사에게 써 주었다는 시비 속에는 남명의 여유로움이 깃들어 있었다. 내일이면 남명매도 볼 수 있을 것이었다.  

  

  다음 날 아침 민박집에서 서둘러 나왔다. 8코스 일정을 마치고 귀가하는 길이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원지에서 고속버스 예약을 못해서 진주 터미널까지 가야 했다. 그러나 연휴 끝이라 좌석이 있을지  걱정되었다. 수원이나 성남, 혹은 대전까지 가서 갈아타는 방법이 떠오르고 밤기차를 타는 방편이 반짝거렸다. 마음이 편해졌다. 어제 일정에 비하면 8코스는 비교적 순탄했다. 지리산에서 참나무가 가장 많다는 청정한 숲길과 임도를 번갈아가며 걷는 길이었다. 아기자기한 폭포들과 소를 품고 있는 백운계곡에는 남명 선생의 자취가 여기저기에 산재해 있었다. 산천은 유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다는, 그 무상함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을 것인가.    


  덕산에 이르니 비로소 천왕봉이 보였다. 남명은 저 천왕봉이 바라다 보이는 곳에 산천재를 짓고 후학을 양성했단다. 그곳에 남명매가 있었다. 퇴계 못지않게 매화를 사랑했다는데 아마도 그 기개와 그윽한 향을 사랑했겠지. 남명이 누군가. 영남학파의 거두로 한 번도 벼슬에 나가지 않고 제자들을 기르는 데 평생을 바친 분이 아니신가. 그의 비판정신이 투철한 학풍은 훗날 곽재우, 정인홍, 김우옹 같은 의병장을 길러냈고 수백 명의 문도를 길러냈다고 한다.     

  길 위에서 명상을 한다지만 나는 아직 그저 걷는 일에 마음을 기울일 뿐이다. 반복되는 삶의 권태를 벗어던지거나 오늘처럼 어떤 문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낯선 곳으로 여행을 하는 게 분명 도움이 된다. 이목구비를 쉽게 빼앗기는 관광지가 아니라 고통을 수반한 길, 때로는 마음 가득 희열과 감동이 차오르는 길. 나는 단지 이 무한한 우주에서 티끌보다 작은 존재가 스스로 순해지고 가벼워지는 그런 순간을 맛보고 싶은 것이다. 길을 걸을 때마다 조금씩 작아지는, 안달복달하던 삶이 보다 단순해지는, 시간이 더 숭고해지고 내 삶이 더 소중해지는.     


 아내여, 어머니를 받아들이시라. 때리려거든 내 종아리를 때리시고 찢고 싶으면 내 가슴을 찢으시라. 노년이 이렇게 비참해진다면 나는 후일 내 삶을 스스로 결단해 버리고 싶은 심정이니, 아내여, 진실로 거두어주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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