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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초지현 Dec 12. 2022

평생 A/S 중입니다만

그래도 내가 미안해

마침 울린 삐삐를 확인하고 공중전화에 가서 과외 집에 전화를 하고 막 돌아서려던 참이었다.

"저기 학생~ 혹시 수학 과외하는가?"

뒤에 줄 서 계시던 중후한 아저씨께서 조심스레 딸이 고등학생인데 수학을 너무 어려워해서 과외를 좀 했으면 한다고, 얼핏 들으니 과외를 하는 학생인듯해서 물어본다고 하셨다.

낯선 사람을 경계하는 성격 탓에 연락처를 알려주시면 나중에 전화드리겠다 하니 바로 지갑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주셨다. 그날 저녁 엄마와 의논 후 집 전화로 명함의 번호에 연락을 했다.

그 후 학생 어머님과 통화하게 되어 과외수업이 성사되었다.

그렇게 해서 대학교 3학년 때 고1이었던 그녀를 처음 만났다.




그녀의 아버님은 사업을 하셨고 부모님 두 분 다 바쁘셔서 과외수업을 가면 항상 집에 그녀 혼자 있었다.

수학뿐만 아니라 세상 고뇌 다 짊어진듯한 고등학생의 고민상담도 들어주는 수업이 되었다.

같이 저녁을 먹으며 수다를 떨기도 하고, 어떤 날은 간식을 사들고 가서 함께 먹으며 수학 문제를 주야장천 풀기도 했다.

뻥튀기 사이에 투게더 아이스크림을 가득 넣어 샌드위치 모양으로 만들어 먹었던 간식을 그녀가 제일 좋아했다. 우리의 머리 회전과 지방 축적에 지대한 공헌을 한 간식이다.

훗날 싸이월드에서 그녀와 둘 사이의 일촌명이 뻥튀기와 투게더였다. 지금도 가끔 생각나는 간식이다.

그렇게 그녀의 고등학생 시절을 함께 보낸 후 대학생이 된 그녀가 어느 날 선생님이 아닌 언니라고 불러도 되냐며, 이제 그럴 때도 되지 않았냐며 씩 웃는다.

물론 이제 그녀는 대학생이고 난 막 사회인이 되었던 터라 안될 이유가 없기에 그때부터 우리는 언니 동생으로 지냈다.




대학 동기 중 무난한 남자 동기가 한 명 있었다. 개성 강한 유채색 같은 동기들 사이에서 무채색처럼 무슨 말을 해도 그저 사람 좋은 웃음을 짓고, 지독한 음치임에도 불구하고 노래방에서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던 녀석이었다. 누구와도 부딪히지 않았고 큰 소리도 낼 줄 모르는 순수 결정체 같은 존재라고나 할까.

대학을 졸업 후 서른이 넘어 무채색 동기를 비롯하여 여럿 대학 동기들 주기적으로 만나던 모임에 하루는 우연히 그녀가 동석하게 되었다. 무채색 동기와 그녀 둘 다 애인이 없었기에 취기가 오른 농담으로 둘이 잘 어울린다 엮어가며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냈다.

무채색 동기는 예의 그 사람 좋은 웃음으로 허허거리기만 했고, 그녀는 20대의 발랄하고 반짝반짝 빛나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로부터 몇 달 뒤 갑자기 연락 온 그녀가 머뭇거리며 하는 말,

"언니, 저 ㅇㅇ오빠랑 사귀어요"

누구? 순수 결정체 그 녀석?

그 당시 애인이 없었던 동기가 그 한 명이었던지라 금방 떠올릴 수 있었다.

그의 첫사랑이  내 제자인 그녀라니,  오호통재라, 나도 모르는 사이 중매쟁이가 되어 버렸구나.

맘껏 축하를 해줘야 하는데 이 미적지근한 느낌은 뭘까.

그렇게 둘은 열렬한 연애 끝에 결혼하여 사랑스러운 아이를 낳고 잘 살았습니다.

로 끝나야 했는데.. 삶은 그리 녹록지 않는듯싶다.




결혼 당시에 장점이라 여겼던 부분들이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단점이 되어 그녀를 짓누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무슨 말을 해도 허허 웃던 장점은 결단력이 필요할 때 우유부단하게 넘어가는 단점이 되었고,

누구와도 부딪히지 않았던 장점은 누구에게도 싫은 소리를 못하는 단점으로 그녀가 악녀를 자처해야만 일이 해결되었던 것이다.

그런 그녀의 남편을 조금(정말 동기로 조금 알고 있다) 알고 있는 죄로, 나도 모르게 중매하게 된 죄로

난 그녀에게 열심히 산소공급을 해야만 했다. 그녀가 숨을 쉴 수 있도록.


무채색 동기를 말로 두들겨 패서라도 유채색으로 만들어보려 노력했지만 당최 그 어떤 색도 흡수할 맘이 없어 보였다. 그저 웃기만 하는 동기는 포기하고 그녀를 데리고 힐링하기 좋은 카페에 가서 커피 수혈도 하고, 위안이 되는 글귀가 가득한 책도 건네본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 포화도는 여전히 낮다. 무엇이 그녀의 마음을 채워 줄 수 있을지.



"어찌 되었든 내가 그 녀석의 친구이고 너의 친한 언니라는 사실은 변함없으니 그저 미안해.

그런데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잖니. 내가 계속 애프터서비스할게.

숨 쉬어~ 어디 산소탱크 같은 거 없는지 계속 찾아볼게!"


이렇게 난 오늘도 여전히 그녀를 응원한다.





사진 출처 : 픽사 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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