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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iara 라라 Mar 13. 2024

여성으로, 장미 한 송이

- 라라 소소 21

“여성의 날 모임”이 있다.      


내성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참석하고 있는 몇 개의 모임이 있는데, 거의 다 함께하면 마음이 편안한 지인들의 모임이다. 모임을 지속하면서 편안해진 지인들도 있다. 지인들의 모임 특성상 어떤 모임이라고 칭하기 애매한 모임들도 있지만 그럼에도 나는 모임에 이름 짓는 걸 좋아한다. 이름이 생기면 의미가 부여되고, 그 의미를 통해 애정이 깊어짐을 느껴서다.


가장 최근, 작년에 만들어진 모임이 “여성의 날 모임"이다.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기념하여 여성들이 단합하여 선한 궐기를 강행하는 모임이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의미를 지니고 있지는 않다. 다만 우리의 첫 모임이 지난해 3월 8일에 이루어졌다는 점에 의미를 둔다. 그녀의 결혼을 축하해 주는 자리, 즉 청첩장 전달을 위한 모임으로 우리는 오랜만에 모였다. 우리 중 가장 어린 친구가 20대가 되었을 때 처음 만나 이제 그녀가 20대 후반이 되었으니 거의 십 년의 시간이 우리에게 지나갔다. 이제는 각자의 삶을 살아가느라 이렇게 결혼식이나 어떤 행사가 있지 않는 한 자주 얼굴을 보는 사이는 아니다. 그전에 만났을 때에도 아마, 누군가 집들이를 해서 모였을 것이다. 십 년간 함께한 세월에는 남성 멤버들도 있고, 다른 여성들도 있지만 어쩌다 우리 여섯이 모이게 되었다. 20대에서 40대까지.     


성격도 각기 다르고, 일이나 관심 분야도 각기 다르다. 이제는 사는 동네도 각기 다르다. 이런 우리가 만났는데 함께 밥 먹고 수다 떨고 술 한잔 하는 시간이 투명했고 또 즐거웠다. 심지어 나는 그날 몸이 안 좋았고 눈에 문제가 있어서 어질어질했는데도 늦게까지 함께 있었다. 그날 술을 한잔한 그녀들은 이 멤버 그대로 모임을 만들자고 했다. 매달 조금씩 돈을 모아 다음 해 3월 8일에 만나서 맛있는 걸 먹으면서 그간의 회포를 풀자고 했다. 가정과 아이가 있는 그녀들도 있으니 어디 멀리 가지는 못해도 일박으로 호캉스도 좋고, 그간 먹어보지 못한 새로운 음식을 먹어보는 것도 좋겠다며 서로 흥분하여 얘기했다. 다음 날 모임 통장 초대장이 왔다. 그렇게 우리는 가끔씩 소소하게 단톡방에서 대화를 나누고 한 달에 한 번씩 매달 8일에 7천 원을 입금하며 일 년을 보냈다.


처음에는 청첩장 모임이었지만, 정기적인 모임이 되었기에 이름을 바꾸어야 했다. 그날 모임에 나가기 전, 3월 8일이 세계 여성의 날이라는 걸 기억하며 하루를 보냈다는 게 생각났다. 그렇게 모임의 이름이 “여성의 날 모임”이 되었다. 나를 제외한 나머지 다섯 명의 그녀들도 우리 모임을 이렇게 부르는지는 나도 잘 모른다. 우리 모임 단톡방과 모임 통장의 이름은 “3월 8일”이다.






3월 8일은 세계 여성의 날이다. 여성의 인권이 조금, 아주 조금 향상된 걸 축하하는 날이라고 해야 할까. 우리나라에서도 어느 다른 나라에서도 여성은 대체적으로 핍박받아 왔다.      


세계 여성의 지위 향상을 위한 날로, 1908년 3월 8일 미국의 여성 노동자들이 근로여건 개선과 참정권 등을 요구하면서 시위를 벌인 것에서 시작됐다. 이후 유엔은 1975년을 ‘세계 여성의 해’로 지정하고 1977년 3월 8일을 특정해 ‘세계 여성의 날’로 공식 지정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2018년 법정기념일로 공식 지정돼, 관련 단체들이 다양한 행사들을 진행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여성의 날은 장미 한 송이가 의미를 지닌다.     


1908년 3월 8일 미국 1만 5000여 명의 여성 노동자들은 뉴욕의 루트커스 광장에 모여 선거권과 노동조합 결성의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대대적인 시위를 벌였다. 이때 시위에서 노동자들은 '우리에게 빵과 장미를 달라'라고 외쳤는데, 여기서 빵은 남성과 비교해 저임금에 시달리던 여성들의 생존권을, 장미는 참정권을 뜻하는 것이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그 사람은 만날 적마다 거의 대부분의 날에 나에게 장미 한 송이를 선물로 주었다.     


안녕, 이라는 눈인사와 함께 건네진 장미 한 송이가 그에 대한 나의 기억이다. 장미를 그렇게 자주, 받아본 적이 그때가 처음이자 아직까지는 마지막이다. 그에게 왜 하필 장미 한 송이냐고 물어볼걸 그랬다. 그 이유가 지금에서야 너무 궁금하다.


그가 과연 여성의 날과 함께 떠오르는 장미 한 송이의 의미를 알고 있었을까? 나는 그때 잘 몰랐다. 아는 게 별로 없었다. 여성에 대해서도 여성 인권에 대해서도 심지어 내가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하루의 삶을 살아가기에 바빠 내가 여태 받아 온 차별에 대해서 별로 생각하지 않았다. 여성으로 받는 차별보다는 여성으로서의 대우와 남성이 여성에게 베푸는 배려가 있다고 생각할 정도였으니 얼마나 무지했는가. 물론 남성의 입장에서 여성을 대우하는 부분은 남성 차별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사회적으로 남녀평등에 대한 쟁점이 나올 때마다, 그럼 여성도 남성과 동등하게 군생활을 해야 한다는 의견이 주요 논제가 되기도 한다. 여성과 남성의 신체적인 차이가 차별로 이어져서는 안 되는데, 공공연하게, 어쩌면 치사하고도 유치하게 나왔던 말들이 군대 이야기라니.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가능한 범위까지 서로를 배려하는 게 차별을 차별이라 여기지 않고 평화롭고 조화롭게 남녀가 이 세상에서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길이라는 걸 왜 모르는 걸까.      


그는 언론에 관심이 많았다. 대학에서도 그쪽 관련으로 전공을 하고 공부했다. 나는 그 분야를 잘 알지 못했다. 사회에 대해서도 언론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이 사회는 너무 폭력적이고 아픔으로 가득해서 내가 살아가고 있는 공간이지만 되도록 피하고 싶었다. 그때는 그에게서 받은 장미 한 송이로 그만큼의 위로만 받으며 살아가고 싶었다.




나는 다른 또래 친구들에 비해 친오빠와 친했고, 오빠도 동생을 귀찮아하지 않고 잘 챙기는 편이었기에 어렸을 때부터 오빠 친구들과도 잘 어울렸다. 오빠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인정한다. 누군가의 도움과 보살핌에 익숙한 상태로 대학에 들어갔다. 대학에서는 공과대학에 속하는 건축을 전공했다. 졸업하고는 설계사무실에서 일했다. 그야말로 남자들 틈에서 공부하고 일했다. 학교에는 우리 학번이 특이하게도 비교적 여학생이 많았고, - 우리는 열 명 정도 되었는데, 하나 위 학번 선배 중 여성은 세 명 밖에 없었을 정도였다. - 그 덕분이라기보다는 원래 그런 분위기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아무튼, 같은 학번 동기들도 선배들도 여성에 대한 배려를 많이 해 주었다. 가령 작업실에서 잘 때 – 건축을 공부하고 일하며 밤샘 작업을 하거나 작업실에서 자는 건 일상이었다. - 바닥보다는 넓은 제도 책상이나 낮은 단의 서랍장 위에서 잘 수 있도록 자리를 양보해 주거나, 침낭 아래 두꺼운 우드록(모형을 만들 때 사용하는 커다랗고 나무판처럼 단단한 스티로폼 판)을 깔아 주기도 하는 식이었다. 무거운 재료를 나르거나 커다란 모형을 이동할 때도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 당시에는 동료 의식으로 생각하기도 했고 당연하게 여기기도 했는데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여성에 대한 그들의 배려였다.      


사회에 나오니 학교와는 달랐다. 설계사무실에서 여성은 비난과 무시의 대상이었다. 거친 발언과 성적인 모욕도 너무 쉽사리 오갔다. 사회 초년생의 실수는 여자여서 그렇다는 말로 돌아왔다. 건축은 아무리 디자인 요소가 강한 설계 부문이라고 할지라도 남성이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분야다. 대학에 들어서면서부터 남성에게 지지 말아야 한다는 오기를 갖고 이를 악물고 공부하고 일하고 있었는데, 설계사무실에서 모든 걸 감내하는 건 나의 무지에 의해서였다는 걸 그때는 알지 못했다. 한참 어린 20대 중반의 여성 직원에게 모욕을 주고 성적인 발언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직장 상사에게 나는 그게 부당하다고 말하지 못했다. 그냥 이 판은 원래 그런 거지, 내가 내 발로 걸어 들어온 거잖아, 이렇게 내 탓을 하곤 했다.     


건강 문제로 건축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었고, 신비한 우연으로 대부분의 직원이 여성인 어학원계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남녀가 같은 반에서 공부했던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지나 여자 고등학교에 진학했을 때의 충격이 떠올랐다. 남성들이 많은 집단과 여성들이 많은 집단의 차이가 극명했고, 여성과 남성은 떼어 놓을 수 없는 사이여서 한쪽으로 몰려 있기보다는 함께 조화를 이루고 살아갈 때 서로를 이해하며 편견 없는 사회를 만들어 나갈 수 있다는 걸 많이 느꼈다.     


중요한 건, 남성들 사이에 여성이 있어 차별을 받는 건 너무 당연해서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알아차려도 내색을 하지 못하지만, 여성들 사이에 있으면 내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차별을 받으며 지내고 있는지가 극명하게 드러난다는 거다. 여성들은 소리를 낼 줄 알았다. 참기도 하고 배려도 했지만, 자기 몫을 찾아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학원계에서는 강사가 자기의 목소리를 냈다. 자신이 받을 대우는 자신이 찾아냈다. 자신의 빛남과 유능함을 증명함으로써 더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는 곳이 학원계였던 것이다. 내가 일한 학원은 강사들도 정직원이었기에 그렇게 심하지는 않았지만 남자들의 세계인 건축과는 다른 여성의 세계에서 나는 매우 놀랐고 일종의 문화적 차이에서 빚어진 충격까지 받았다. 건축에서처럼 내가 해야 할 일과시키는 일을 열심히 했을 뿐인데 직급 상승과 함께 동료 강사들의 비난이 돌아오기도 했다. 여성의 적이 여성이 되는 순간이기는 했지만, 내 목소리를 숨기며 살아왔던 날들에 부끄러움을 느끼며 나도 이들 곁에서 살아남아 내 소리를 남성 앞에서도 당당히 낼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약간의 희망을 품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여성에 대한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는 걸 좋아했다. 주위에는 남성에 대한 책과 영화가 대부분이었지만 그 와중에 틈새로 삐져나오는 여성들에 대한 걸 잊지 않고 찾아보곤 했다. 내 삶에 치여 사회나 여성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건 사실 거짓이다. 내 안에는 그런 피가 흐르고 있었는데 내가 외면하거나 두려워서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다. 영화를 보고 책을 읽으며 그녀들을 동경했고 나도 언젠가,라는 생각을 조금 했을지도 모르겠다.     


여성의 권리를 신장시키는 데 기여한 여성들이 많다. 많은 여성들의 노력으로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다. 나는 내 목소리를 드러내지 않는다. 아직 부족하기도 하고 더 배우고 공부하고 알아야 할 게 많아서 이기도 하다. 아니, 어떻게 소리 내야 할지 확실히 모르겠어서가 변명의 정확한 이유일 것이다. 책을 읽고 공부를 한다. 영화를 본다. 생각을 한다. 글을 쓴다.


세상의 차별이 조금씩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주위의 약자가 조금씩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여성에서 인간으로 확장되고 있다.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세상에는 말도 안 되는 편견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여성과 약자를 무시하고 억누르고 쉽게 대하는 사람이 판을 치고 있지만 주위에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뉴스에 나올 뿐이다.      





세계 여성의 날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본다. 내가 여성으로 이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다시금 생각해 본다. 일 년에 단 한 번, 3월 8일 여성의 날에 각기 다른 나이의, 10살 이상 차이가 나는 여섯 명의 여성들이 모인다. 우리가 모여 이날 하루를 여성의 날이지만 여성의 날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우리 자신을 생각하며 맛있는 걸 먹으면서 좋은 시간을 보낸다. 그것만으로도 우리가 여성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는 거다.


사회 초년생인 그녀, 오랜 공부 끝에 취업한 그녀, 돈을 잘 벌지 못하는 프리랜서 그녀, 끊임없는 노력과 도전으로 이직에 성공한 그녀, 결혼과 임신과 육아에 지쳐 자신을 잃어갈 즈음 파트타임으로 일을 다시 시작한 그녀, 아직은 어린아이를 기르며 새로운 일을 배우고 그 분야에 도전한 그녀. 다양한 그녀들이 3월 8일에 모인다. 회사 얘기도 식구들 얘기도 건강 얘기도 옛날얘기도 다양한 이야기가 쉬지 않고 나온다. 나는 리스너다. 듣는 사람.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미소 짓는다.      


우리는 여성으로 지금,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다.     


내년 3월 8일에도 우리는 만나서 이전에 먹어보지 못한 새로운 음식을 먹으며 일 년간의 삶을 이야기할 것이다. 내년에 만날 때에는 여성의 권리가 조금이라도 더 향상되고 여성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조금 더 안전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세상의 모든 여성을 생각하며, 그녀들을 바라본다. 우리 모두를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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