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라 소소 23
내가 생활하는 공간에는 텔레비전이 없다. 텔레비전이라는 매체를 통해 영상 보기를 끊은 지는 꽤 오래전이다. 물론 일부러 끊은 건 아니고 어쩌다 보니 보지 않게 되었고, 점점 멀리하다가 지금에 이르게 된 거다.
부모님과 함께 살 때, 회사에 다닐 때는 일이 많았고 퇴근도 늦었고 스트레스도 심해서 집에 오면 녹초가 되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뜨거운 물로 샤워하고 안전하고 포근한 침대에 누워 다음날이 오지 않기를 소망하며 재미있는 책을, 재미는 없더라도 집중할 만한 책을, 나의 긴장감을 풀어줄 만한 책을, 어쨌든 책을, 날이 새도록 읽는 게 스트레스 해소법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잠에 들지 않으면 다음 날이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너무 피곤해도 몸이 아파도 그 상태로 바로 자면 내 하루가 그렇게 사라진다는 생각에 너무 아깝고 슬프고 약이 오르는 지경이어서 책이라도 읽어야만 했다. 배가 너무 고파 책을 읽을 힘이 없을 때는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인스턴트 음식을 만들거나 냉장고에 있는 반찬만 꺼내서 밥을 꾸역꾸역 먹거나 아니면 종종 엄마를 졸라 먹고 싶은 김치말이 국수나, 수제비를 해 달래서 12시가 넘은 그 늦은 시간에 천천히 오물거리며 오랫동안 먹었다. 밥을 먹는 건 내가 당장 몸에 힘이 없다는 강력한 의미지만, 힘든 와중에도 자리를 잡고 앉아 몸과 손과 입의 힘을 써서 에너지를 소모해야만 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에너지 소모라는 노력을 통해 결국에는 몸에 에너지를 만들어 내는 결과를 가져온다. 먹을 때는 씹는 행위와 음식의 맛에 집중해야 한다. 나는 한 번에 두세 가지에 집중하여 그에 걸맞게 행하는 게 가능한 인간이 아니기에 밥을 먹으며 책 읽기가 쉽지 않았다. -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 책 대신 [1박 2일] 같은 예능 프로그램을 즐겨 봤다. 예능 프로그램에 지속적으로 노출되지 않으면 그 흐름을 잘 따라가지 못한다는 걸 아는가? [1박 2일] 외의 다른 프로그램을 보면, 사람들이 자지러지게 웃는 타이밍에 나는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게 어떤 상황인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아서 분석하고 공부해서 나도 웃으려 들었다. 게임에는 어떤 룰이 있다고 (이럴 때는 꼭) 이과적인 머리로 생각하는데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그런 게 통하지 않았다. 웃음은 공부로 되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 포기했다. 그냥, 사람들은 웃는구나, 재미있는 장면인가 보구나, 생각하기로 했다. 가끔은 왜 웃는지 모르지만 나도 소리 내어 웃는다. 웃으면 나의 뇌는 내가 지금 기뻐한다고 인식할 테니까.
영화는 시도 때도 없이 봤다. 문제는 우리 집에, 아니 부모님 집에 나만 빼고 남들은 다 보고 있는 수많은 채널이 나오는 케이블 방송을 수신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통신사를 바꾸면서 결합 상품으로 일 년 동안 무료로 케이블 방송들을 볼 수 있었는데, 그때는 주말 밤마다 서너 편씩은 영화를 봤던 것 같다. 그때는 또 코로나 전이어서 극장에도 거의 매주 갔었고 영화 할인되는 카드나 다른 수단도 많아서 극장 요금도 그리 비싸지 않았고 부담스럽지도 않았다. 지상파 말고는 보고 싶은 영화를 골라서 볼 수 없는 상황에서는 텔레비전을 내가 따로 틀 일이 거의 생기지 않았다. 나와 텔레비전의 인연은 여기까지인가 보오.
그럼에도 몇 가지 경우에 텔레비전을 보게 되는데, 하나는 효도 타임이다.
말이 효도 타임이지, 부모님과 함께 거실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을 말한다. 아버지는 텔레비전을 하루 종일, 정말 아침에 눈 떠서 밤에 잠들기 전까지 집에 있는 시간 동안에는 거의 텔레비전을 켜 놓고 계신다. 지상파도 하루 종일 방송이 나오나? 지금에서야 드는 의문이지만, 보통 하루 종일 내가 집에 있었던 경우는 주중보다는 주말이었으니, 그때는 텔레비전 소리가 내 방 안까지 옹송옹송 내내 들려왔다. 밤에는 라디오 소리가 들려서 집은 그야말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날이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내가 고요를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적요한 고요.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집. 옆집 윗집 아랫집의 대화 소리가 들려올 정도로 고요함 속에 파묻혀 있는 곳이 지금 내가 사는 공간이다.
아버지가 라디오를 켜고 주무시기 시작하면, 엄마에게 효도할 시간이 돌아온다. 엄마는 계속 텔레비전을 보시지는 않는다. 가끔 엄마가 좋아하는 프로그램이 저녁 늦은 시간에 하면 나는 그걸 엄마와 함께 보며 이야기를 나눈다. 엄마가 즐겨 보시던 프로그램 중 하나가 아이돌 그룹을 결성하는 오디션 프로그램이었다. 오디션 프로그램은 말만 들어봤고 정식으로는 그때 처음 봤는데 내가 본 건 오디션이 시작된 지 중반 이후여서 엄마한테 그때까지 어떤 상황이었는지, 이 오디션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등을 들으며 흥미진진해했다. 최종 멤버 발탁까지 엄마와 함께 보면서 그들의 열정에 감동했던 기억이 있다. 그 프로그램이 끝나고 데뷔한 그룹을 나는 아직까지도 좋아한다. 엄마한테 그 그룹의 소식을 전하면 그게 누구냐고 말씀하시며 엄마는 벌써 그 오디션 프로그램이 기억에서 가물가물하다고 하신다. 관심 밖으로 밀려 난 거다.
텔레비전을 보는 그 두 번째는 밥시간이다. 부모님 집에는 튼튼하고 예쁜 식탁이 있지만, 식탁은 장 본 거를 냉장고에 정리하기 전에 올려놓거나, 엄마가 가계부를 정리하신다거나, 음, 그 밖에 다른 알아내지 못한 일들을 할 때만 사용했고, 아침이든 점심이든 저녁이든 늘 식사는 거실 텔레비전 앞에 상을 놓고 불편하게 바닥에 앉아서 먹곤 했다. 좌식이 허리와 다리에 얼마나 안 좋은데! 그래도 밥 먹을 때를 빼고 (지금은) 소파가 있으니 엄마, 아버지 허리와 다리에 그나마 다행이다. 이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어린 시절에는 그러지 않았다. 아침은 식탁에서 먹었고, 점심은 학교에서 먹었고, 저녁만 텔레비전 앞에서 드라마나 다른 방송을 보면서 밥을 먹었다. 물론 나는 밥 먹는 거와 텔레비전 보는 걸 한꺼번에 잘하지 못했으므로 밥은 먹지 않고 텔레비전에 빠져있는 모습을 엄마는 자주 목격하셨고, 나만 텔레비전을 보지 말라는 어명이 떨어지기도 했었다. 신기하게도 나 외의 다른 식구들은 식사도 빨리하고 식사와 텔레비전 시청 둘 다를 한꺼번에 잘하는 편이다. 나는 그냥 놔두면 하루 종일 텔레비전을 보면서 하루 종일 밥을 먹을 줄 아는 특별한 재능을 타고났다. 지금도 그건 잘할 수 있다. 텔레비전을 하루 종일 보고 싶은 마음은 생기지 않지만, 그런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오지만, 만약에 영화라면, 내가 좋아하는 시리즈물이라면 가능하겠다. 실제로 12시간 넘게 시리즈물을 본 적도 여러 번 있다. 이런 걸 정주행이라고 하지.
지금도 주말에 부모님 집에서 밥을 먹을 때는 텔레비전 앞에서 소파 협탁 위에 상을 차려서 먹는다. 밥 먹기 전에도 텔레비전, 밥 먹은 후에도 텔레비전이다. 아, 머리 아파. 이왕 효도하는 거 보고 있는 프로그램의 내용에 대해서 대화도 종종 시도해 보지만, 아버지는 듣는 둥 마는 둥 대답도 없다. 나만 혼자 말하다가 머쓱해지거나, 그러다가 괜히 싸움이 나기도 해서 말은 조심해야 한다. 안 하는 게 더 나을 때도 많다. 휴우, 내가 효도는 무슨.
아이들의 교육을 언급하며 집에 텔레비전을 설치하지 않았다고, 혹은 공용으로 사용하는 거실에는 설치하지 않고 안방에만 작은 텔레비전을 놓았다고 말하는 부모들도 많이 봤다. 부모가 외출하면 아이들은 안방에 가서 (물론 부모의 허락을 받은 상태였겠지만) 텔레비전을 시청하고 있는 장면도 자주 봤다. 혼자 사는 성인들도 텔레비전 구입 및 설치 금액에 대한 부담을 줄이고, 컴퓨터로 대부분을 할 수 있고 볼 수 있는 편리성을 생각해서 텔레비전을 집에 들이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인터넷이 연결된 컴퓨터만 있으면 굉장히 편리한 세상이다. 이렇게 텔레비전이 집에 없는 사람들도 방송을 보지 않는 경우는 드물다. 컴퓨터나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PC를 통해 OTT 서비스(Over The Top 서비스 : 인터넷을 통해 미디어 콘텐츠를 제공하는 서비스)로 원하는 방송을 시청한다. 나는 3개월 무료의 유혹에 혹해서 3개월 동안 영화나 잔뜩 봐야지 생각하며 가볍게 가입한 OTT 서비스에 3년이 넘게 매여있었다. 핸드폰으로 한 자동 결제 시스템이 카드와 핸드폰과 기타 등등에 엉켜 오류가 생겨 취소 방법이 상당히 복잡해져서가 첫 번째 이유였고, 두 번째 이유는 월정액 금액이 1만 원이 넘지 않아서 부담스럽지 않게 영화를 자주 볼 수 있다는 데 있었다. 지금은 다회선을 사용할 수 있는 다른 OTT 서비스를 친구와 함께 이용 중이다.
코로나가 시작된 이후 불안감에 외출을 삼가다 보니 그 좋아하던 극장에도 가지 못하게 되었다. 그렇게 몇 년을 극장 대신 집에서 영화를 보며 지냈더니 또 이거 나름대로 익숙해지고 편안한 점도 있었다. 보고 싶은 영화를 개봉했을 때 바로 볼 수는 없지만, 오래지 않아 영화는 인터넷으로 구입 혹은 대여를 통해서 볼 수 있었고, 이용하고 있는 OTT 서비스에 업로드되어 반갑게 보기도 했다. 극장 스크린처럼 대형 화면이 아니고 음향도 극장에서 볼 때와 비교할 수는 없지만 영화에 대한 몰입도는 조금 더 강해진 듯하다. 그리고 다양하게 선택해서 볼 수 있는 점이 좋다. 코로나가 일상이 되고 다시 극장에 다니기 시작했다. 전처럼 자주 가지는 못한다. 영화비도 상당히 상승했고 할인 수단도 많지 않아서이기도 하다. 가끔은 아쉽고 또 가끔은 서러운 마음도 들지만 나만의 스크린이 있으니 그걸로 만족하고 있는 요즘이다.
영화를 볼 때 말고 내 주위 공간은 거의 하루의 대부분이 고요하다. 보통은 아무리 고요한 걸 좋아하는 사람도 음악은 틀어놓기도 하고, 일부러 찾아서 듣기도 하고 그러던데 나는 그렇지 않다. 작더라도 제대로 된 스피커가 없다는 게 또 하나의 핑계가 될 수도 있다. 아주 작고 귀여운 스피커가 하나 있는데 블루투스로만 연결해야 해서, 내가 듣고 싶은 음악을 선을 연결해서는 듣지 못하는 슬픔도 지니고 있다. 핸드폰을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나의 성향도 한몫 단단히 하고 있다. 요즘에는 대부분의 음악을 스트리밍 서비스를 통해서 들으니까.
텔레비전을 보지 않고, 음악 프로그램을 보지 않고, 인터넷 검색을 하지 않고, 스트리밍 서비스를 이용하지 않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음악은 내가 찾아서 즐기면서 듣는 게 아니라 집 밖에 나갔을 때, 외출하거나 외부에서 누군가가 틀어주면 배경으로 들리는 그런 존재로 나에게 여겨지기 시작했다. 분명히 대학 다닐 때도 설계사무실에 다닐 때도 음악을 들은 기억이 난다. 좋아하던 노래나 가수나 그룹도 있었고, 즐겨 듣던 리스트도 있었는데, 언제부터, 왜 사라지게 되었을까.
그래, 맞아. 사회에 나와서 생각이 더 많아지면서부터다.
거슬러 올라가서 기억을 더듬는 걸 좋아하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말아야지. 생각을 깊게 하지 말아야지. 그냥 이대로 있어야지. 그게 좋겠다.
친구들이 얘기하면 드라마도 프로그램도 음악도 찾아본다. 보기도 하고 듣기도 하고 친구들이 어떤 걸 얘기했는지 더듬으며 공부해서 대화에 참여하려고 노력한다. 그건 친구들과 함께 하려는 나의 배려다. 친구들은 내가 어떤 배우를 아이돌을 프로그램을 알아듣지 못하고 멍, 한 표정을 짓고 있으면 얘가 또 그러려니 한다. 친구들의 배려다. 그 와중에 서로의 배려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 유행에 민감하지는 않지만, 유행이 뭔지는 친구들을 만나야 알아차릴 수 있어서 오늘도 신경을 쓴다.
많이 들리는 노래가 있으면, 요즘 이 노래가 인기 있구나 생각한다. 오래전 노래들을 리메이크해서 부르는 걸 들으면 반갑고 기분도 좋다. 오래가지는 않지만 한동안은 흥얼거리기도 한다. 노래를 잘 듣지 않고 어떤 곡인지 잘 모르니까 귀가 조금 더 예민해지기도 하고, 어떤 때는 조금 더 무뎌지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한다. 예민해지면 머리가 아프고 정신 사납다는 생각이 들다 가도, 무뎌지면 카페의 백색소음이 좋아서 오래도록 작업을 하거나 책을 읽고 싶어지기도 한다.
여전히 조용한 게 좋다. 그 고요함이 나를 조금 더 차분하게 만들어 준다. 불안감을 조금 경감시켜 주기도 하고, 화가 조금 가라앉게 해 주기도 하고, 조금이라도 선한 쪽으로 다가가게 도움을 주기도 하고.
세상으로부터 열 다섯 발자국 정도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해서 큰 문제는 없을 거다. 그렇게 믿고 오늘도 나는 고요 속에 머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