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라라 소소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hiara 라라 Apr 03. 2024

빌붙어 사는 삶

- 라라 소소 24

“트레이더스 갈 건데 뭐 필요한 거 있어? 살 거 있으면 톡 남겨놔.”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트레이더스에, 두세 달에 한 번 정도는 코스트코에, 일 년에 두세 번 정도는 이케아에, 장 보러 간다는 연락이 온다. 누구? 엄마에게서.     


부모님 두 분, 오빠 내외, 쌍둥이 조카 둘까지 여섯 식구의 장을 보니 대량으로 구입하는 품목들이 종종 있어 위의 빈도수로 대형 마트에서 장을 보곤 한다. 그럴 때마다 혼자 사느라 고군분투하는 딸내미가 안쓰러우신 – 안쓰럽다기보다는 미덥지 못한 게 더 클 거다. - 엄마는 필요한 게 있으면 사다 주신다는 말씀을 한 번씩은 하신다. 나는 이때다! 싶어서, 뭐가 필요한지 – 필요한 건 매일 넘쳐나지만 그걸 다 말할 수는 없으니, 나도 열심히 살고 있다는 듯한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는 모든 걸 다 말할 수는 없다. 엄마는 나의 꼬질함을 거의 모르고 계실 거라고 나 혼자서 믿고 있다. - 곰곰이 생각을 해 본다. 부탁하는 품목에 대한 나의 기준은 정해져 있다. 한 품목당 1만 원이 넘지 않을 것, 물가가 많이 올랐으니 최대 2만 원까지, 지금 당장 필요한 품목일 것, 오빠나 부모님 집에서 소소하게 가져올 수 있는 품목은 제외할 것. 그러다 보니 사실 한계가 많아서 먹을 걸 부탁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대용량 감자칩이나 봉지에 담겨있어 샌드위치 속으로도 쓸 수 있고, 따로 담아서 먹을 수도 있는 샐러드, 그때그때 검색해서 할인 행사를 하고 있는 냉동식품 등이 보통이다. 특히 만두는 육류 대용이 되고 혼자 먹는 작은 식사에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어서 좋다. 나는 떡을 좋아해서 떡만둣국을 먹게 되면 만두는 하나만 달라고 하고 떡을 많이 달라고 하는데, 혼자 살면서 만두가 굉장히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물론 냉동실에 떡국떡이 떨어지는 날은 없다. 모닝빵이나 베이글은 식구들이 아침이나 간식으로 자주 먹으니까 내가 말하지 않아도 분명히 구입을 할 거다. 나는 그걸 한 봉지 얻어오면 된다. 빵순이지만 빵은 엄마에게 부탁할 필요 물품 품목에 넣지 않는다. 전략적이어야 한다.     


먹을 거 외에도 자잘한 소품을 올려놓을 수 있는 칸막이용 작은 선반이나 리필용 세탁 세제, 벌레용 스프레이 등을 부탁하기도 한다. 개수는 세 개가 적당하고 다섯 개는 넘지 않는 게 좋다.     


 


일주일에 두 번씩 수원에 있는 오빠네 집에 간다. 수원집에는 나를 뺀 온 식구가 살고 있다.     


쌍둥이 조카들이 태어나고 엄마가 수원에 있는 오빠네 집으로 가셨다. 한 명의 조카라면 엄마가 바로 가지는 않으셨을지도 모른다. 쌍둥이이기에 새언니 혼자서 돌보는 게 어려워 엄마가 출동했다. 새언니 친정은 시골이어서 어머니께서 오실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새언니는 오래지 않아 복직을 했고, 그렇게 엄마는 쌍둥이들의 주 양육자가 되었다. 수원집에 가지 않으면 엄마를 볼 수가 없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부모님과 함께 지내던 나는 어쩔 수 없이 반 정도는 독립을 하게 된 거다. 집에서 엄마가 하던 일이 이렇게 많았는지는 닥쳐서야 알게 되었다. 기본적인 빨래도 쉽지 않았다는 거, 그거 하나만으로도 충격적이었다. 내가 엄마 없이 혼자서 할 줄 아는 게 이렇게 아무것도 없구나, 집안 살림에 신경을 거의 쓰지 않은 채로 살아왔구나, 허울만 성인이 되었구나.     


쌍둥이 조카들이 말을 이제 시작하고 콩콩거리며 걸어 다니기 시작했을 때 아버지가 쓰러지셨다. 입원하셨고 둥이 조카들의 주 양육자셨던 엄마가 아버지의 병간호를 하게 되어 그동안 둥이들을 돌볼 사람이 없었다. 그때부터 나도 조카들의 육아에 함께 참여하게 되었다. 퇴근하고 수원에 가고 다음 날 수원에서 둥이들을 돌보고, 저녁에 출근하거나 밤늦게 서울로 다시 돌아오는 생활을 했는데, 아버지가 쓰러지신 거에 놀라기도 했고, 아버지가 좀 괜찮아지시고 나서 엄마도 수술을 하게 되어 정신없지만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만 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재우고. 말이 안 통해서 어쩔 줄 모르겠지만 사랑스럽고. 작은 생명체의 신비를 둥이 조카들을 통해 느꼈다.     


부모님 집과 수원집을 며칠씩 오고 다니시던 아버지도 결국 수원집에서 계속 지내게 되었다. 엄마는 둥이들도 돌봐야 했지만, 까다로운 아버지의 시중까지 들게 된 거다. 그렇게 나의 독립은 이루어졌다. 물론 이런 사정 말고 다른 피치 못 할 사정도 있는데 그건 너무 구구절절하여 일단 지금은 건너뛰도록 하자.     


집에서 어떤 음식을 만들거나 식사를 제대로 챙겨 먹을 자신이 없어서 가스레인지는 들여놓지 않았고, 비상시를 대비해서 인덕션과 작은 프라이팬은 하나 있어야 한다며 엄마가 보내 주셨다. 잘 먹지도 않을 건데 뭐 보관할 게 있을까 싶어서 냉장고도 아주 작은 걸로 마련했더니 2L짜리 생수 한 통도 다 들어가지 않는다. 다행히 1L짜리 생수는 들어가고, 보통은 물이든 음료수든 500ml짜리만 시원하게 마실 수 있다. 전자레인지 구비를 생각하기도 했는데 놓을 자리가 마땅치 않았다. 전기 포트와 작은 오븐이 하나 있고, 라면 포트도 하나 있다. 아니, 이제는 두 개다. 라면 포트로 이렇게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는지는 전혀 몰랐다. 부모님과 함께 살 때는 라면 포트를 사용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부모님 집에서는 가스레인지나 전자레인지를 사용했고, 에어 프라이어도 사용했다.      


라면 포트에는 면을 먹는 게 기본이다. 면으로 만든 음식을 좋아해서 집에서도 면을 자주 먹는다. 라면은 건강상의 문제로 오랫동안 먹지 않았는데, 몇 년이 지나고 갑자기 먹고 싶어 져서 먹었더니 위에서 라면 수프의 그 강렬함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토하는 지경에 이르기도 했었다. 하지만 (뭐가 좋은 거라고) 조금씩 먹기 시작했더니, 이제는 다시 라면 3/4 봉지 정도는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라면이 먹기에도 만들기에도 손쉽기는 하더라. 라면보다는 칼국수나 국수나 파스타 면으로 만들어 먹으려고 노력은 하고 있다. 면 요리 말고도 국물을 뜨겁게 데울 수 있어서 좋다. 엄마한테 받아온 국을 데워 먹기도 하고, 요즘은 데우기만 하면 먹을 수 있는 봉지에 담긴 즉석국이 종류별로 많아서 그걸로도 자주 데워 먹는다, 혼자서 먹으니 한 봉지를 끓여도 두세 번에 나눠 먹을 수 있어서 금액이 조금 비싸더라도 내가 먹는 식사로는 나쁘지 않다. 또 설렁탕이나 사골곰탕 한 봉지만 있으면 뜨끈한 국수도 만들어 먹을 수 있고, 떡국이나 떡만둣국을 먹을 수도 있다. 그냥 봉지만 하나 데워서 밥과 함께 따끈하게 마시면 반찬이 없더라도 한 끼 식사로 충분히 훌륭하다. 라면 포트에 넣고 데우기만 하면 되니까 확실히 편하다.     


라면 포트로 달걀을 삶아 먹을 수도 있고, 냉동실에 넣어둔 만두나 떡 등을 쪄서 먹을 수도 있다. 불편한 게 하나 있다면, 냉장고에 있던 찬밥이라든지, 볶음밥이라든지, 빵이나 우유 등을 데워 먹을 수는 없다는 점. 이런 건 확실히 전자레인지가 편한데 말이다. 전자레인지가 만능이고 정답이다 싶다가도 지금 있는 포트들과 미니 오븐이나 잘 활용해서 써야지, 하는 맘으로 바뀌곤 한다. 국물에 많이 넣는 건 자른 미역이다. 미역을 많이 넣으면 고소하고 배가 든든해진다. 어디에든지 국물을 끓일 때는 자른 미역을 넣는다. 봉지 사골국과 자른 미역만 집에 있으면 고민이 별로 없다. 집에 비지 않도록 꼭 채워놓아야 하는 게 이 두 가지 품목이다. 빵을 좋아해서 종종 수프를 먹기도 하는데, 봉지 상태로 끓는 물에 넣어 데울 수 있는 수프도 있고, 가루를 뜨거운 물에 타서 휘휘 저어 걸쭉하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수프도 있어서 라면 포트든 전기 포트든 어느 것이나 사용할 수 있어서 좋다. 포트를 사용해서 식사를 준비하면 시간이 조금 더 걸리고 귀찮아지기도 하지만 차갑게 먹지 않고 따뜻하게 먹는 식사는 마음도 따뜻하게 해 주고, 입가에 미소도 지을 수 있는 여유를 가져다준다.     


먹는 걸 싫어하지는 않고, 오히려 먹을 때는 맛있게 열심히 잘 먹는 편이지만 평소에는 하루에 한 끼만 밥을 먹으면 된다고 생각해서 누가 챙겨주지 않으면 두 끼 이상을 스스로 챙겨 먹는 경우가 별로 없다. 엄마가 혼자 지내는 나를 더 걱정하시는 이유기도 하다. 몸이 약하기도 하고 건강이 썩 좋은 게 아니어서 뭐라도 잘 먹어야 한다고 엄마는 생각하신다. 그래서 감자칩을 좋아하는 나를 저지하지는 않으신다. 마트에 가면 엄마가 먼저 감자칩을 챙겨주실 정도다. 내가 말하지 않아도 감자칩과 샐러드는 엄마가 종종 사다 주신다.     


말이 독립을 하고 혼자 사는 거지, 실제로는 그렇지 못하다.      


집에 건전지나, 갑 티슈나, 두루마리 휴지, 등 소소한데 잘 구비해 두지 않게 되는 물품들은 수원집에 가면 하나씩 가져온다. 수원집은 대형으로 구입하는 경우가 많아서 물건을 한번 사면 내가 한두 개 빼와도 거의 티가 나지 않는다. 물론 필요하다고 얘기하면 챙겨주는데, 가끔은 그냥 가져오기도 한다. 왠지 미안하기도 하고 그냥 말하고 싶지 않기도 해서. 둥이 조카들이 먹는 과자 말고, 오빠가 술안주로 사놓은 과자가 보이면 그것도 몇 개씩 챙긴다. 혼자서는 과일을 사 먹지 않게 되니까 과일도 엄마가 조금씩 싸 주신다. 둥이 조카들과는 치즈 같은 걸 나눠 먹는다. 둥이들이 고모 간식도 자주 챙겨줘서 행복하다.     



며칠 전부터 샴푸가 거의 다 떨어졌는데, 예비용 샴푸가 집에 없다. 수원집에도 샴푸는 예비용이 한두 개밖에 보이지 않아서 달라는 얘기를 차마 하지 못했다. 깜박하고 있다가 집에 들어와서 샤워할 때 생각이 나기도 했다. 트리트먼트와 바디 샤워는 아직 남아 있어서 샴푸 대신 트리트먼트로 머리를 감아도 괜찮지 않나 생각해 본다. 환경을 생각해서 샴푸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는데, 처음에는 기름이 끼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나중에는 점점 괜찮아진다고 들은 것 같기도 하다. 한번 찾아봐야겠다. 아니면 지금 생각날 때 바로 나가서 샴푸를 구매하면 된다. 지금은 월초이고 지난달에 일한 돈이 적게나마 들어왔으니 샴푸 한 통쯤은 사도 되지 않을까 싶은데, 인터넷으로 구매하는 게 더 저렴해 보이기도 하지만 인터넷은 일정 금액 이상을 주문해야지만 배송비가 들지 않으니, 어쩌면 그냥 조금 더 비싸 보이더라도 마트에서 구매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소소한, 어쩌면 쓸데없어 보이는, 고민을 매일 하고 있다. 이걸 사야 하나 말아야 하나, 저건 수원집에서 가져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이건 엄마가 장 보러 갈 때 사다 달라고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아무튼 고민의 연속이다.     


특별한 고민이나 깊은 생각 없이 카드를 긁던 때가 있었는데, 그때는 다달이 많지는 않아도 고정으로 월급이 들어오던 때였다. 지금은 월급이 없어서 카드를 막 쓸 수가 없다. 작년부터는 신용카드를 사용하지 않고 체크카드만 사용하고 있다. 자꾸 카드 승인이 거부된다. 통장에 돈이 없어서. 작년 말부터 거부되는 빈도수가 늘었는데 처음에는 너무 당황스럽고 부끄러워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지금도 당황스럽고 부끄러운 건 마찬가지지만 약간의 여유는 생겼다.      


아, 승인이 안 되나요? 죄송합니다, 취소할게요. 다음에 오겠습니다.     


엄마와 수원집에 도움을 받고 있는 게 이렇게나 많은데, 나 혼자서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미래를 생각하면 막막하기도 하다. 힘들어지면 일을 더 많이 해서 돈을 벌어야지, 회사에 다시 들어가야지, 어떻게 하겠어. 그래도 지금은 빌붙어 살 수 있으니,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 삶을 즐기면서 또 나도 최선을 다해서 내 현재의 삶을 살아가는 수 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겠다.     


4월에도 변함없이 일주일에 두 번 수원집에 가서 둥이 조카들과 놀고 엄마 밥을 먹을 것이다.     


집에 감자칩이 떨어진 지 오래됐는데 지금은 급한 품목들이 몇몇 있어서 감자칩은 한동안 줄이기로 마음먹었다. 엄마가 반찬이랑 빵을 싸 주셔서 이번 한 주는 풍족하게 식사를 챙겨 먹을 수 있다. 감사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세상으로부터 열 다섯 발자국 정도 떨어져 있어도 좋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