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라 소소 25
“네 생각이 났어!”
친구가 꽃 사진을 보내주며 말을 걸었다. 나도 그 전날에 많은 봉오리 가운데 두 개의 꽃이 살며시 핀 걸 보고 친구 생각을 했더랬다. 이 친구 덕분에 매년 잠깐이라도, 어디라도 가서 꽃구경을 하곤 했다. 날이 이렇게 추운데 꽃이 벌써 피냐며 호들갑을 떨었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작년에도 이맘때쯤 경주에 당일치기로 꽃구경을 다녀왔다. 활짝 핀 꽃이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고 사람들은 꽃비를 맞으며 여유롭게 산책하고 있던 풍경. 오랜만에 바람도 쐬고 경주의 이곳저곳을 오가며 아침부터 밤까지 실컷 꽃구경만 했던 그날의 기억.
날씨가 오르락 내리락을 반복하더니 하루 집에 있는 사이에 꽃이 흐드러지게 폈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신비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다들 봄을 맞이했는데 나만 여태 겨울이었다. 밖에 나가면 옷도 가벼워지고 그런 옷이 약간은 선선해 보였지만 표정은 밝아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흔하게 보였다. 어두운 색의 두꺼운 옷을 입은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저녁에는 싸늘해서 막상 두꺼운 옷을 입고 나가도 낮 동안 땀이 삐질 흘러 겉옷은 가방에 넣고 여행이라도 가는 사람처럼 큰 가방이 불뚝하게 꽉 찬 상태로 뒤뚱거리며 다녔다. 그러던 어느 밤, 가방 속의 옷을 꺼내지 않아도 춥지 않았다. 도톰한 티를 입고 있었는데 딱 적당한 느낌이 들었다.
이제 정말 봄이구나.
몇 년 동안 겨울 내내 주야장천 입었던 롱패딩이 낡고 낡아서 소매가 해졌다. 팔꿈치를 포함해 외부와 많이 스쳐 지나간 옷의 곳곳이 반들반들해졌다. 오리털도 자꾸만 삐죽 튀어나온다. 나이 들어 축 늘어진 버석거리는 검은 나무 같아 보인다. 이제는 안녕을 고해야 할 때인가 보다. 옷을 오래 입는 편이다. 안 입는 옷은 나누기도 하고 다른 용도로 쓰거나 실내복으로 입거나 하는 경우도 많은데 낡고 해져서 버린 건 기억이 나지 않는다. 왠지 소중해져서 떠나보내기가 아쉽다. 어디 크게 구멍이 나거나 찢어진 것도, 오염이 된 것도 아니고 입으면 따뜻하니 누군가 필요한 이에게 갈 수 있도록 의류 수거함에 넣을 예정인데 입을 수 있으면 내가 더 입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해서 또다시 고민에 빠진다.
봄과 가을, 약간 시원하고 조금 따스한 정도의 느낌을 좋아한다.
갑자기 봄을 맞이해서 옷을 어떻게 입어야 할지 당황스러웠다. 두껍고 부피를 차지하는 겨울옷은 이제 침대 아래에 있는 서랍에 집어넣고 봄, 여름, 가을 동안 입을 옷으로 바꿔 정리해야 하는데 아직 겨울옷 빨래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도톰한 티에 얇은 잠바를 입고 다닌다. 나쁘지는 않지만, 왠지 스스로 ‘봄스러운’ 느낌을 받지도 않아서 산뜻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속이 많지 않으니 개인적인 외출도 잦지 않다. 그래서 약속이 생기면 옷 생각을 미리 하게 된다. 빼어나게 잘 입거나 일부러 드러나게 꾸미려는 생각이 아니다. 선물 받은 옷이나 많이 입지 않은 옷을 입어볼 기회가 생긴 거다. 그 계절에 마지막으로 입고 이제는 넣어야 할 그런 옷을 입을 기회가 되기도 한다.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잘 활용해야 한다.
지난주에는 오전에 영화를 보는 약속이 잡혔다. 독서 모임을 함께하는 분들과의 약속이었는데 매달 정규 모임 시간인 오전 11시를 기준으로 영화 시간을 보니 그 근처가 10시 40분이었고 그다음에는 12시 이후 영화였다. 나는 모임을 할 때도 늘 11시에 딱 맞춰 도착하는 터라 이른 영화가 조금은 부담스러웠지만 다른 분들은 워낙 부지런하기도 하고 영화와 책을 함께 이야기하는 모임으로 예상하고 진행한 거라 영화를 보고 난 후의 시간도 생각해야 해서 어쩔 수 없이 조조로 예매하게 되었다. 한 소설이 오랜 시간이 지나 최근에 영화로 개봉했다. 늘 관심 두고 있는 작가님의 원작 소설이기도 하고 제주 4.3 평화 문학상을 받은 소설이기도 해서 여러모로 4월과 어울리는 소설이었다. 평소에는 잘 나서지 않는데 내가 좋아하는 작가님의 책과 영화의 조합이 궁금하여 어쩌다 갑자기 신이 나서 책도 읽고 영화도 보는 그런 번외 모임을 추진하게 된 거다.
전날 두통이 심해서 잠을 잘 자지 못했다. 일찍 가서 티켓도 찾아야 하고, 집에서 한 시간 넘게 걸리는 거리기도 해서 여유롭게 도착해서 커피로 정신을 차릴 겸 넉넉하게 집에서 출발했다. 밤에는 효과가 없었지만 이제는 제 몫을 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진통제도 두 알을 먹고 집을 나섰다. 전철역으로 가는 길에 벚나무가 많이 있는데, 꽃이 거의 다 폈다. 꽃눈이 천천히 내리고 있었다. 아름답다.
사람으로 꽉 차서 복작거리는 거리만 보다가 이렇게 텅 빈 거리를 보니 어색하다고 해야 할까. 주일 오전에는 아무리 홍대라도 사람이 없구나!
커피는 대용량으로, 아침을 먹지 않고 나왔으니 블랙보다는 라테로. 커피 큰 컵 한잔을 손에 쥐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분이 좋아졌다. 여유롭게 나만의 시간을 잠시 갖는다. 나는 감자칩만큼 팝콘도 좋아하는데 일찍 도착한 별 님의 남편분께서 팝콘을 한 아름 사 주셔서 정말 기뻤다. 정규 책 모임 이외에 번외 모임은 처음이다. 모두가 나오지는 못했고 덕분에 별 님 남편분과도 인사하는 기회가 되었지. 정 님은 전자책으로 막판 스퍼트를 가하며 책의 마지막 부분을 읽고 계셨다. 근 님은 옆에 있는 다른 극장으로 가셔서 허둥지둥 다시 이곳으로 넘어오셨고, 이렇게 모인 우리는 상영관으로 들어갔다. 와, 우리가 상영관을 전세 냈다. 한 분만이 구석에 계실 뿐이었다. 조조의 영향인지 영화가 흥행을 하지 못하고 있는 건지.
영화를 보고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면서 우리는 어떻게 된 거야,를 외쳐댔다.
이 흥분을 이어서 점심 먹으며 영화 얘기하고 커피 마시며 책 얘기까지 이어서 할 예정이었고, 그런 예상을 하고 있었는데, 영화관에서 나와서 갑자기 헤어지게 되었다. 응? 나와 근 님은 당황하여 어버버 하며 별 님과 신랑분과 정 님에게 인사를 했다. 우리 둘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고, 우리 둘이서라도 밥 먹고 커피 마시자고 합의를 보았다. 이렇게 밝은데, 아직 점심시간밖에 되지 않았는데 책과 영화 얘기도 제대로 나누지 못했는데 집에 갈 수는 없다!
나를 제외한 다른 분들과는 오랜 시간 인연을 맺어왔지만, 근 님은 내가 하고 있는 이 독서 모임 멤버가 아니다. 나는 이 독서 모임에 가장 늦게 합류했고 이전부터 알던 사이도 아니지만 이제는 이분들이 편안하고 좋다. 책 얘기를 이렇게 허물없이 어디서 할 수 있겠는가. 근 님은 가끔 얼굴을 보고 가끔 독서 모임에 게스트로 참여하시기도 했지만 매달 함께하는 멤버는 아니었다. 이번 모임을 계기로 다음 달부터 함께 하기로 했다. 기쁘다.
근 님과 둘이서 시간을 보내는 건 처음이었다. 물론, 다른 분들과도 따로 이렇게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한 적이 나는 없다. 신기하게도 편안한 시간이었고, 그건 근 님의 다정한 마음에서 비롯되었겠지만 봄이어서 더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다. 일식 파스타라는 신기한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 나폴리탄을 처음 먹어봤다! - 책과 영화 얘기를 한참 신나게 했다. 신이 나서 몸에서 열이 난 건지 조금씩 더워지기 시작했는데, 온도가 22도까지 올라갔다고 하니 날이 진짜 더워지기 시작한 거였다. 나는 겨울을 보내며 마지막으로 겨울 원피스를 입고 나왔다. 많이 두껍지 않은 니트 원피스였는데 봄에도 이 옷만 입기도 하고 해서 괜찮을 거란 생각에서였다. 위에는 긴 니트 카디건을 입고 나왔다. 내 나름의 봄옷. 하지만 답답한 기운에 카디건은 걸칠 수 없었고 원피스만 입고 걸으면서도 와 딱 좋다, 약간 덥기도 하네, 이런 느낌이었다.
밥을 먹고 나와서 골목을 돌아다니며 카페를 찾다가 길을 잃었다.
저쪽 옆 골목에 아름다운 하얀 꽃나무들이 한아름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홍대 중심가에서는 좀 떨어져 있는 이곳은 벚꽃 거리였다. 길거리 가게들도 있었고, 양옆으로는 주택가이기도 했다. 사람이 없지는 않았지만 걷거나 꽃구경하는데 지장을 받을 정도는 아니어서 딱 좋았다. 이렇게 꽃구경을 하게 되는구나, 이렇게 봄을 맞이하는구나, 이렇게 따뜻한 마음이 되어가는 거구나.
그 길을 걸으며 햇살을 만끽하고 꽃을 구경하고 사진도 찍고 하하 호호 웃기도 많이 했다. 사람들이 사진을 많이 찍는 포토 존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큰 벚나무가 있었고 뒤로 보이는 벚꽃들이 예뻤다. 근 님이 그곳에서 내 사진을 찍어주었다. 나는 어색하게 누구나 다 하는 국민 포즈로 사진을 찍고 말았다. 그래도 꽃 아래에서 올해도 사진을 찍었다.
날씨가 좋아, 테라스 카페를 찾아다녔다. 근 님 맛집 지도에 표시해 놓은 카페가 그 벚꽃 거리 근처에 있어서 찾아 골목으로 들어갔다. 골목골목에 카페도 많고 사람도 많았지만 적당해서 기분 좋은 정도였다. 사람 많은 건 어렵고 힘든데 적당하다는 느낌이 드는 건 근 님과 맑은 날씨 덕분이다. 찾아간 카페에는 자그마한 테라스가 있었다. 라테가 맛있다고 소문으로 들은 카페였다. 주택을 카페로 만들어서 1, 2층 모두를 사용하고 있었고우리가 2층으로 올라갔을 때 2층 테라스와 창가 자리는 다 차 있었다. 어디에 앉을까 두리번거리던 중, 테라스 자리가 하나 비었고 우리는 딱 좋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주문은 1층에서. 근 님이 1층에서 신나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내 사진을 찍어주었다.
영화를 보고 밥을 먹고 꽃구경하며 여유롭게 산책을 하고 카페테라스에서 향 좋은 커피를 마시고 다양한 주제로 대화를 나누고. 근 님이나 나나 둘 다 세 명 이상이 모인 자리에서는 말을 하기보다 듣는 편인데 이렇게 둘이 모이니 조곤조곤 끊이지 않고 대화가 이루어졌다. 풍성하고 따뜻하고 아름다운 봄날이었다.
며칠 사이에 꽃이 바닥에 많이 떨어졌다. 낮에는 따뜻하지만 변덕스럽게 약간 싸늘한 바람이 불기도 한다. 봄이 세상에 오는 걸 주저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세상에는 아직도 차가운 마음이 도처에 많이 퍼져 있으니까. 그래도 봄이 기운을 내어 다가와 주면 좋겠다. 내 마음의 차가운 부분이 지난 주말 근 님과의 봄날 데이트로 다소 녹았듯이 봄이 세상의 차가운 부분을 조금이라도 녹여주고 따뜻하게 만들어 주면 좋겠다.
올해는 아직까지도 친구가 꽃을 보러 가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일전에 얘기했던 회사 문제로 마음이 편치 않아서리라 예상하며 걱정하는 맘이 앞선다. 이번에는 내가 먼저 모든 꽃이 다 떨어지기 전에 지는 꽃을 보러 가자고 연락해야겠다. 멀리 가지 않더라도 가까운 공원에서 맛있는 커피를 마시며 여유롭게 꽃바람을 쐬자고 말을 건네야겠다. 고궁에서 오랫동안 아무 생각 없이 오랫동안 앉아 있는 것도 좋을 것이다.
친구야, 봄이 왔어. 우리 꽃구경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