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라 소소 42
에어컨이 있음에도 전력 낭비를 막기 위해 안 켜는 것과, 눈앞에 에어컨이 보이는데도 고장이 나서 못 트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아버지는 예나 지금이나 무조건 아끼는 사람이다. 겨울에는 보통 외부에서 여름에 에어컨을 사용하여 유지하는 실내 온도보다 더 낮게 실내 난방 온도를 내려놓고 (이렇게까지 내려놓지 않아도 충분히 실내는 춥다. 옷을 껴입고 아버지 몰래 온도를 올려놓는다. 온도 조정기가 안방 입구에 있어서 살짝 들키지 않을 정도로 올려놓았다가 걸리면 내가 올려놓지 않았다는 듯이 시치미를 떼는 생활을 한다. 다행이었던 건 어린 시절에 살던 집은 개별난방이 아니고 중앙난방이어서 꽤 따뜻했다는 점!), 여름에는 에어컨이 있어도 틀지 못하게 하며(선풍기는 거의 하루 종일 틀어놓는데 머리가 다 아플 정도다. 창문을 통해 조금이라도 자연 바람이 들어오면 그게 더 시원하다), 안 쓰는 불은 당연히 꺼야 하고, 혼자 계실 때는 해가 져도 불을 켜지 않은 채로 어두컴컴하게 텔레비전을 보시며, 할인하지 않는 물건은 되도록 사지 않고, 무료로 제공되는 물건에는 욕심을 부리신다. 아버지가 성인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부모님께서 돌아가셨다. 형제가 많지는 않지만 물려받은 재산이 있는 게 아니어서 아버지는 홀로 서울로 올라와 스스로 돈을 벌며 공부하고 대학을 졸업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역시 공무원이 최고였는지, 아버지는 준비기간을 거쳐 공무원이 되었다. 그리고 아버지 세대에서는 조금 늦은 나이에 결혼하여 가정을 일구었다. 쉽지 않은 삶이었으니, 뭐든지 아끼는 게 몸에 배어있을 수밖에 없을 거다. 평범한 집안이지만 아버지의 열심한 삶으로 오빠와 나는 나름 잘 자랐다.
내가 자란 집에는 에어컨이 없었다.
여름은 선풍기로 났다. 가구도 나의 기억이 시작될 때부터 함께 있어 올 만큼 오랫동안 바꾼 적이 없는 것들이 많았다. 어린 시절에는 에어컨이 있는 집이 거의 없었는데,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였을까 중학교에 다닐 때부터였을까, 에어컨이 한두 집씩 생기기 시작하더니 자주 틀지는 않더라도 에어컨을 갖춘 집이 많아졌다. 여름방학 동안 집에서 너무 덥다고 짜증 내고 늘어져 있던 기억이 있다. 초등학교 때부터 직장에 다니면서까지 부모님과 함께 지냈던 집에는 내가 대학생이 되고 나서부터 겨우 에어컨을 장만할 수 있었다. 필요한 전자제품 하나라도 바꾸거나 구입하려면 집에서는 전쟁이 일어났다. 하지만 엄마는 그때만큼은 지지 않고 꿋꿋하게 싸우며 에어컨을 들였다. 에어컨을 들이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그다음은 에어컨을 쓰지 못하게 하는 아버지의 잔소리가 문제였다. 에어컨을 한번 틀라치면 가뜩이나 더운 날씨에 싸워서 기분까지 안 좋아지게 되니 나중에는 포기. 그냥, 덥고 말지, 하는 생각과 그냥 밖에 시원한 데서 시간을 보내자, 하는 생각으로 에어컨은 집안의 장식이 되어갔다. 덕분에 도서관에 오래 있었고 수영장도 자주 가기는 했다. 가끔 집에 손님이 오면 그때는 좋은 핑계를 잡았으니 만연한 미소를 지으며 당당하게 에어컨을 틀었다. 아버지도 손님 앞에서는 못마땅한 표정만 지을 뿐 언성을 높이지는 않았다.
에어컨은 신세계였다. 삶의 질이 이렇게 달라질 수가!
아무리 선풍기를 튼다고 해도 너무 더운 날에는 선풍기에서 더운 바람이 흘러나온다. 실내 공기가 뜨거우니 선풍기 바람을 아무리 세게 해도 더운 바람이 도는 거다. 더위를 참고 땀을 뻘뻘 흘려가며 할 일을 해야 하는 건 곤욕스러웠는데, 딱히 다른 방법이 있는 건 또 아니어서 어쩔 수 없는 날들이었다. 그러다가 에어컨을 알게 되었고, 에어컨 바람으로 인해서 집 안에서의 삶이 이렇게나 쾌적해질 수 있다는 데 놀랍기까지 했다. 매일 틀고 싶었지만 아버지와의 언쟁으로 포장한 전쟁은 피해야 했고, 하루 종일 집에만 있는 건 아니니 약간의 타협점을 찾은 건 아주 아주 아주 더운 날, 심한 열대야가 있는 날 밤에는 에어컨을 약하게 틀고 열기가 빠져나갈 수 있는 모든 구멍과 방문을 꽝꽝 닫은 다음 거실에서 옹기종기 온 가족이 모여 시원하게 잠을 자는 거였다. 아버지는 고집을 부리며 문이 닫힌 그 뜨거운 방에서 선풍기를 틀고 땀을 흘리며 주무시곤 했다. (슬프지만 나도 아버지의 이런 고집을 약간, 어쩌면 많이 닮은 구석이 없지 않아 있다) 대나무 돗자리가 깔려 있는 거실에서 시원하게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텔레비전을 보기도 하고 책을 읽기도 하면서 기분 좋게 잠들었다가 몇 시간 후에 더워서 눈을 떠 보면 아버지가 어느새 에어컨을 꺼 놓은 상태였기는 했지만 말이다.
지금 혼자 사는 집에는 에어컨이 없다. 봄이 좀 지나 여름이 되기 전부터 혼자 살기 시작했는데 첫해에는 에어컨 생각을 하지 못했다. 작은 선풍기가 하나 있었는데 너무 더워서 추욱 늘어져 있던 여름을 보냈다. 그다음 해에 엄마가 집에서 쓰지 않는 선풍기를 주셨다. 작은 선풍기와 중간 짜리 선풍기 두 대로 여름을 보냈는데 그래도 더웠다. 에어컨을 들일 생각은 하지 못했다. 일단 에어컨을 살 돈이 없었고, 설치를 해도 전기세가 많이 나오면 그걸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또 여름은 찾아왔고 그해 여름에는 서큘레이터(circulator)를 구비해서 조금은 나은 하루들을 보낼 수 있었다. 창문을 열어놓으면 통풍이 잘되는 편이어서 조금 나았던 것 같다. 혼자 살면 편안하게 지낼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하기도 했는데 수입이 줄고 일상이 흔들리면서 더 나를 타이트하게 조이게 되었다. 아버지의 절약하는 몸과 마음이 조금은 이해가 된다.
둥이 조카들이 태어나면서 달라진 점이 많다.
그중에 하나는 낭비할 정도는 아니지만 초절약은 아니게, 집에서의 생활이 조금은 편안하게 바뀌었다는 거다. ‘둥이들을 위해서’라는 말의 힘은 위대하다. 아버지는 구시렁대시기는 하지만 크게 소리를 높이지는 않으신다. 겨울에는 집이 따뜻해졌고, 여름에는 땀을 흘릴 정도는 아니게 에어컨을 틀기도 한다. 함정은 어디에나 있다. 둥이들이 없이 엄마 아버지만 계시면 다시 겨울에는 집이 춥고 여름에는 집이 덥다. 그래서 내가 가서 겨울에는 또다시 온도를 올리고, 여름에는 습도가 높으니 에어컨을 조금만 틀자고 말을 건넨다. 이제는 연세가 드신 아버지도 삶의 쾌적함을 느끼시는지라 내가 에어컨을 켜면 못 이기는 척 흠흠 거리시며 이곳저곳 틈새를 막으신다.
올여름 참 덥다. 어제까지 (24.08.06) 역대 최장 기록으로 서울은 16일째 열대야다. 아열대 지역에서 나타나는 스콜과 비슷하게 마른하늘에 갑자기 나타나는 비구름이 폭우를 퍼붓고 사라지기도 수시로 반복하고 있다. 한국형 스콜이라고도 부르더라. 이 와중에 지난 열흘간 부모님 집에는 에어컨 실외기가 고장 났고, 우리 집에는 뜨거운 물이 단수되었다.
분명히 에어컨을 켜고 시원한 저녁을 보냈는데, 바로 다음 날에 에어컨을 켜면 실외기를 확인하라는 말이 나오면서 꺼진다고 엄마한테 연락이 왔다. 이리저리 찾아보기도 하고 서비스센터에 전화를 걸어도 봤지만 서비스센터는 통화가 되지 않았고, 뭐를 봐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실외기가 문제라는데 하루 만에 갑자기 이 사태가 벌어졌으니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서비스센터와 연락이 닿는다고 하더라도 한여름이라 에어컨 수리가 밀려있어서 빨리는 힘들 텐데 더운 여름을 더 덥고 힘들게 나게 되었구나, 부모님 걱정이 앞섰다. 나는 또 나대로 뜨거운 물이 나오지 않으면 여름이라 다행으로 여기며 찬물로 생활하면 될 텐데, 더위는 많이 타도 몸은 냉한 편이라 한여름에도 땀을 흘리면서도 이불은 덮고 자고 샤워할 때도 따뜻한 물을 사용하는 나로서는 여간 고충이 아닐 수 없었다.
부모님은 빙수를 좋아하신다. 여름이 되면 마트에서 컵에 담겨 나오는 팥빙수를 잔뜩 사서 냉동실을 채워 놓는다. 종종 저녁식사 후 더위를 식히며 빙수를 드시고 텔레비전을 보신다. 엄마 아버지의 소소한 여름 즐거움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요즘에는 무인 아이스크림 가게에 가면 새로운 맛도 많이 나와서 팥빙수뿐만 아니라 망고 빙수, 인절미 빙수, 딸기 빙수 등 다양하게 고를 수도 있다. 엄마를 무인 아이스크림 가게에 데리고 가서 여러 가지 맛의 빙수를 골라주었다. 물론 마트에서 대량으로 구입하는 것보다는 금액이 비싸지만 이왕이면 다양한 빙수를 맛보게 해 드리고 싶었다. 그럼에도 엄마는 역시 우유를 조금 부어 넣은 마트 팥빙수가 제일 맛있다고 하신다. 에어컨 실외기가 수리될 때까지 마트와 카페에서 자주 시간을 보냈다. 엄마가 좋아하는 빙수도 먹었다. 아버지는 더운데도 자꾸 집에만 계시려고 한다. 그 고집!! 엄마와 밖에서 시원하게 시간을 보내고 아버지와 먹을 빙수를 사들고 집으로 간다. 운이 좋게도 서비스센터에서 일주일 안에 전화 상담 예약이 진행되었고, 열흘 안에 수리 기사의 방문이 예정되었다. 나는 너무 더운 날씨에 차가운 물로 샤워하며 부들부들 떨다가 조금 익숙해졌는지, 이제 나도 으른인가 보다, 하는 생뚱스러운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더워도 에어컨을 켜지 않는 건 그런대로 참을 만했는데, 눈앞에 에어컨이 있는데도 고장이 나서 틀지를 못하니 정말 더 덥게 느껴진다고 엄마가 말했다. 에어컨 고장과 온수 단수는, 스스로 무언가를 결정하고 행할 때(금할 때)와 타인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행하게 되는 때(금지받게 되는 때)의 차이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능동과 수동.
올여름이 아직 많이 남아있지만 여름은 원래 더운 거니까!!, 소리 내어 말하고 하루하루를 보내야겠다.
덧,
오늘(24.08.07)이 입추라고 한다. 세상에!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오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