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라 소소 43
손바닥 만한 방 한쪽에 달려 있는 그리 크지 않은 창문을 활짝 열었는데도 바람 하나 불어오지 않는다. 밖으로 통하는 문을 열면 조금 환기가 될까 싶어 지나가던 누가 들여다보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문을 열었는데도 전혀 소용이 없다. 계단실 창문이 열려 있어도 어차피 건물 안이 온통 뜨거운 공기로 가득 차 있다. 차라리 문을 꽁꽁 닫아 놓는 게 더운 공기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선풍기를 계속 돌렸더니 시원한 바람도 사라지고 머리가 다 지끈거리며 아프다. 오늘은 일이 없는 날인데 돈도 없어서 약속을 잡지 않고 집에서 글에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이 상태로는 아무것에도 집중할 수가 없겠다. 점심때가 지났지만 배도 고프지 않다. 벌써 샤워만 세 번째다. 이렇게는 도저히 안 되겠다.
갑자기 배가 고프면 당황스럽고 필요 없는 지출을 하게 될 테니 마음을 다잡고 냉동실에 있던 머핀을 녹여 꾸역꾸역 욱여넣고 집을 나섰다. 가까운 카페는 동네 카페라 오래 있기 눈치 보이니까 패스. 근데 이 동네에서 동네 카페가 살아남을 수 있기는 한 걸까? 저렴한 금액의 대용량 커피를 파는 카페라면 사람들이 차고 넘칠지도 모르겠지만 이 동네에는 젊은 사람들보다는 어르신이 많이 사는데 음료에 돈을 들여가면서까지 카페를 찾을지 의문스럽기만 하다. 내가 모르는 다른 매력이 있을지도 모르고, 문 연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지켜보는 수밖에. 아무튼 넓은 브랜드 카페로 가야 오랫동안 맘 편안히 있을 수 있다. 게다가 잘 찾아보면 커피 할인권도 구할 수 있을 거다. 대형 카페는 전철역 근처에 여럿이 있다. 마을버스를 타면 세 정거장 거리로 금세 도착하겠지만 이 땡볕에 어울리게 걷기를 택한다. 이 정도 거리는 평소에도 걸어 다니니까. 대낮이라는 게 문제라면 문제겠지. 너무 한낮에 나왔다. 이글거리는 태양이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다. 비라도 시원하게 쏴악 하고 내렸으면 싶지만 요즘에는 동남아의 스콜처럼 비가 미친 듯이 내리고 멈춰도 그렇게 시원해지지 않고 오히려 뜨겁고 습한 기운이 도니 그냥 뜨겁기만 한 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한다. 걷고, 걷고, 또 걷고. 평소의 세 정거장은 가볍게 산책 삼아 걸을 수 있는데 지금은 아니다. 어떻게 하면 햇볕을 조금이라도 피할 수 있을까 고민한다. 고민만 하고 막상 조금의 그늘이라도 나타나면 그사이를 비집고 들어가지는 않는다. 너무 좁아서 어차피 다 가려지지도 않을 텐데 뭐.
한 정거장이 지나고 두 정거장째로 접어드는 중간에는 학교가 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가 나란히 있는데 코로나 이후에 싹 사라지다 올해 들어 간간이 보이던 운동장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이 오늘은 어째서인지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 방학이잖아. 한여름이잖아. 방학이어도 한여름이어도 딱히 갈 데가 없어 운동장 한구석에서 온몸으로 외롭지 않다는 기운을 뿜어내며 어슬렁거리던 꼬맹이가 눈에 아른거린다. 교복을 입고 여전히 운동장 한구석에서 인상을 쓰며 틱틱거리던 중학생도 있었다. 이제는 아무도 보지 않는 건물의 한구석에서 담배를 뻐끔이는 무리에는 끼어들지는 못하고 혼자인 게 쿨한 척 남의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며 표정 없이 앉아있던 고등학생도 있었네.
어떤 학교든지 뒤에는 동산이 있나? 동산이 아니더라도 숨어서 뭐라도 하라도 부추기는 듯한 뒷골목은 하나씩 꼭 가지고 있지 않나. 여기에도 골목이 있다. 가 보지는 않았지만 알고 있다. 거기는 빛이 들지 않으리라. 빛이 들지 않으면 시원하겠지. 평소에는 소심해서 생각도 하지 못했던 학교의 뒷골목으로 슬며시 그러나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들어섰다. 초등학교의 옆 담벼락을 따라가다 보면 뒷골목으로 이어진다. 이 뒷골목은 초등학교 후문을 지나 그 옆의 중학교까지 다 지나면 끝이 난다. 두 학교의 후문이 이 골목에 모두 있는데 어디도 열려 있지는 않다. 방학이라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평소에도 열어놓을 이유가 전혀 없어 보인다. 이 골목은 뒷동산에 면해 있긴 하지만 그 동산에 오르려면 거의 절벽과 가까운 담을 올라야 한다. 골목이 예상만큼 좁지는 않았다. 어쩌면 예전에는 학교에 진입하는 차가 이 길로 다녔을지도 모르겠다고 가만히 추측해 본다. 후문이 컸거든.
학교 담장과 산으로 이어지는 담 사이에는 그다지 높지도 낮지도 않은 담들로 이루어진 그늘이 골목을 뒤덮고 있었다. 볕이 들지 않는다고 시원하지는 않다는 걸 새삼 느끼며 이 여름에 이 한낮에 뭐를 바랐는가.
어두운 골목에 생기를 더하기 위해서는 장미 덩굴을 발견해야 한다. 탐스러운 장미 한 송이라도. 하지만 없었다. 장미의 계절이 아닌걸. 봄꽃이 아름답게 피고 지면 초록의 싱그러움과 함께 여름이 뿅 하고 나타난다. 여름은 초록과 파랑과 회색의 계절이다. 뜨거움과 습함과 열대야의 계절이기도 하고, 끈적여서 옆 사람과는 절대로 살이 닿고 싶지 않은 두려움과 예민함의 계절이기도 하다. 이 계절에 후각은 더 두드러지고 이 냄새의 출처가 어디인지 자신에게서 풍겨 나는 냄새인지 아닌지 끊임없이 살펴보게 된다. 타코야끼 냄새가 스쳐 지나간 건 몸이 떨려오는 겨울을 상상해서였을까. 타코야끼는 일본어다. 타코는 문어고 야끼는 굽는 걸 말한다. 문어를 굽는다는 뜻인데, 실제로 오징어 구이처럼 문어 구이는 아니고, 문어의 조각이 들어가 있는 붕어빵에 가깝다. 붕어빵에는 붕어 대신 앙금이나 크림 등이 들어있지만 문어빵에는 문어가 조각이나마 조금 들어있다. 차이가 있다면 붕어빵은 붕어 모양을 하고 있는데 문어빵은 문어 모양이 아니고 노릇하게 익혀진 작고 동그란 공 모양이다. 한입에 쏙 넣어 먹을 수 있도록 아담하지만, 기회가 생길 때마다 두세 조각으로 나누어서 먹는다. 뜨거워서 적당히 식혀 먹으려는 마음이기도 하고 작게 들어 있는 문어의 향을 조금이라도 풍성히 느끼기 위해서 기도 하다. 타코야끼의 꽃은 동그란 문어빵 위에 담뿍 뿌려주는 가쓰오부시와 소스에 있다. 어렸을 때는 가쓰오부시가 얇게 자른 맛있고 움직이는 종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말린 생선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하지만 네이버에서 찾아본 세계 음식명 백과에 따르면 이렇다.
“가쓰오부시는 손질한 가다랑어를 삶아 훈연한 후 곰팡이를 피워 만든 것으로, 일본 요리의 기본이 되는 다시(出汁, 감칠맛을 내는 육수)를 낼 때 반드시 필요한 재료이다.”
여태 곰팡이를 먹고 맛있다고 했다니. 곰팡이든 아니든 뜨겁지만 시원하게 느껴질 맛있는 타코야끼가 왠지 그립다. 겨울을 기대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막상 몇 년째 타코야키도 호떡도 먹지 못하고 겨울을 지났으면서 말이다. 되돌아보면 타코야끼는 겨울에 길거리에서 먹기보다는 식당이나 일식 선술집에서 안주로 먹은 경험이 더 많기도 하네. 일식도 일식 선술집도 좋아하던 당신과 처음으로 가 본 일본에서는 어느 아침에 퉁퉁 부은 눈으로 길 건너편에 바로 있던 카페에서 먹었던 맹맹한 샌드위치와 검은 커피가 제일 맛있었다는 걸 당신에게 말하지는 않았다. 당신은 한여름에도 타코야끼를 먹으며 시원하게 보내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 일본에 있을지도 모르고.
당신은 언제든지 조금씩 일본 여행을 준비하고 틈틈이 며칠씩 일본에 다녀왔다. 사실 여행 준비랄 것도 없다. 비행기 시간을 알아보고 티켓을 구입하고 적당한 숙소를 예약하는 거다. 지방에 흩어져서 살고 있는 친척 집을 며칠 방문하듯, 서울이 아닌 다른 지역에 사는 친구 집에 놀러 가듯 그렇게 일본에 갔다. 비싼 비행기 티켓을 끊거나 화려한 호텔에 머무는 건 아니었지만 당신은 확실히 어느 면에서는 여유가 있었다. 스시, 우동, 타마고카케고항, 스키야키, 규카츠, 모츠나베, 미소라멘, 야끼소바, 타코야끼,... 당신 덕분에 사케를 마시게 되었다. 수많은 사케 중에 기억이 나는 건 별로 없다. 사케 통에 그려진 캐릭터가 귀여워 기억하고 있는 ‘간바레 오또상’을 말하며 이게 무난하다고 사케를 마시게 될 때면 아는 척을 하기도 한다. 아빠, 힘내세요라니, 술을 마시며 힘내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쇠문이 힘겹게 움직이며 귀를 자극하는 끼이익 삐그덕 거리는 소리가 났다. 초등학교 후문처럼 굳게 닫힌 줄 알았던 중학교 후문이 열렸다. 애써서 빼꼼히 그 문을 열고 걸어 나오는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그 누군가는 놀라지도 않고 평소와 같은 일상의 표정으로 문을 다시 힘내어 닫고 걸어간다. 손에는 작은 상자 하나가 소중히 들려있었다.
저기요, 그거 타코야끼 아닌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