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터널 선샤인], 미셸 공드리
정아야,
갑자기 눈물이 고이더니 하염없이 흘러내렸어. 내가 울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일주일 동안에 청첩장을 세 장이나 받았어. 화요일, 수요일, 그리고 토요일. 그 모임은 하나같이 다 즐거웠는데 너도 알다시피 나는 사람들이 모이고 그들과 어울리는데 적합한 사람이 아니잖아, 그래서 나도 모르게 기가 많이 빨렸던 것 같아. 너무 힘들다. 사랑을 시작하는 사람들. 아니, 가정을 이루고 새로운 날들을 시작하는 사람들이야. 사랑은 결혼이라는 종착점이자 출발점으로 어찌 되었든지 점을 찍는 것 같아. 그 커플들은 친하든 안 친하든 둘 다 알고 있어. 화요일의 커플은 남자와 더 친한데 여자도 알고 있어. 수요일의 커플은 여자와 더 친하고 남자도 알고는 있고. 토요일의 커플은 남녀와 비슷하게 친하다고 할 수도 있고 남자와 혹은 여자와 더 친하다고도 할 수 있지만 아무튼 남자, 여자 둘 다 활동을 하고 있으니까 모임에는 같이 나왔어. 토요일의 그들은 너무 당연하게도 많이 행복해 보이더라. 그들의 얼굴과 사랑스러운 문구가 담긴 케이크, 올망졸망하게 예쁜, 약간은 바랜듯한 분홍색 작은 장미 꽃다발도 결혼 선물로 받았지. 보통은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는 편이지만 환하게 잘 웃지는 않는 남자인데 그날만큼은 입가와 눈가에 웃음 주름이 약간씩 비추더라고. 여자친구라는 말도 처음 한 것 같아. 그 모임 자리가 끝날 무렵, 아니 내가 그곳에서 일어나서 집으로 오려고 마음먹었던 그 시각의 바로 직전에, 오래된 커플의 종료를 듣게 되었어. 오래된 커플의 여자는 말했어. 헤어졌다고. 이제 한 달 좀 넘었다고.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순간 정적을 이루었고, 여자는 그런 반응에 오히려 더 당황을 했어. 나도 그런 경험이 있으니 그녀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지만 내가 상대가 되어 그녀를 바라보는 건 또 다른 경험이기에 어떻게 반응을 보여야 할지 잘 알 수가 없더라고. 집에 오는 길에 버스 타는 곳까지 그녀와 동행했어. 그녀는 나와 친하기도 하지만 그렇게 깊게 친하지는 않은 사이야. 편하다고 할 수는 있지만 따로 연락을 자주 하거나 만나거나 하지는 않는 그런 사이라고나 할까. 친해졌는데 어색한 사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어색하지만 편한 사이라고도 바꾸어 말할 수도 있을 것 같고. 어쩌면 그런 관계가 공동체를 이루는 사람들의 특징일지도 모르겠다. 나만의 특징일 수도 있을 것 같기는 해. 다들 서로 잘 만나고 잘 어울리고 하는데 나는 그게 어렵거든. 만나면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잘 만났다 싶지만 집에 돌아오는 길에는 많이 피곤하고 그다음 날에는 힘들기까지하니까 말이야. 나는 참 에너지가 부족한 것 같아. 내향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들의 특징일까? 아니면 내가 유독 심한 걸까. 외향적인 사람들은 그런 시간을 보내고 나면 에너지가 더 생겨서 그다음 날 살아갈 힘도 솟아나는 것이겠지. 그래서 또 사람들을 만나고 어울리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너도 약간은 그런 타입이었어.
아팠어.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어. 눈을 떴다가 또 잠이 들었고, 꿈을 꾸었는데 일어났다가 또 꿈을 꾸었어. 몸이 아프기도 했고 눈이 아프기도 했어. 머리가 약간 지끈거리기도 했고, 햇볕도 하늘도 바람도 아무것도 나에게 다가오지 않았어. 내 방은 커튼이 없어서 햇볕이 바로 들어와. 앞에 아파트가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남향이라 빛이 잘 들어오는 편이야. 오늘은 날씨가 어제보다 10도나 떨어졌기 때문에 미세먼지도 거의 없고 하늘은 아마도 맑았을 거야. 낮에 비가 내렸던 것 같은데 그래서 조금은 흐렸을 것이고 그런 흐린 날씨는 나의 컨디션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지. 습도가 높아지면 관절이 쿡쿡 쑤시기도 해. 내가 관절이 아프다고 비가 오려나 얘기하면 할머니 같다고 큭큭대며 웃는 너였는데. 신기하게도 오늘은 관절이 아프지 않았어. 습도가 높았던 건 아닌가 봐. 날씨 탓을 하려면 한도 끝도 없어. 흐리고 비가 내리고 맑았지만 내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날씨 때문에 나는 한밤중에 그런 것들이 떠올라 안에 쌓여 있던 모든 아픔들이 솟구쳐 올라서 눈물로 떨어지고 있는 건가 봐. 그런 눈물이야.
그렇지 않다면 또 한 명의 헤어짐을 알아차렸기 때문일지도 모르고. 그녀가 어제는 3시간밖에, 오늘은 1시간 밖에 잠을 자지 못했다고 했어. 걱정이 되어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봤더니 헤어졌다고 하더라고. 그녀의 행복한 미소를 본 것이 거의 일 년 정도, 일 년이 조금 넘은 것 같은데 이별이라니. 행복해 보였어, 즐거워 보였어, 여행도 많이 자주 다니는 것 같았어. 보기 좋았고 조금 부럽기도 했고. 또 그녀는 빨리 결혼을 해서 안정적으로 가정을 이루고 싶어 했으니 올해에는 조만간 결혼을 하겠구나 싶었거든. 그런데 그녀가 그와 헤어졌다고 해. 그녀는 잠이 안 온다고 했어. 잠이 안 올 수 있지. 눈을 감아도 눈물이 흐를 수 있고, 졸리고 머리가 꽉 차 있는데도 잠이 들지 않을 수가 있지. 계속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를 덮칠 수도 있고, 심연 속으로 빠져들어 어둠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수도 있어. 아름다웠던 날들이 떠올라서 가슴 아플 수도 있고, 왜 헤어져야 하는지 알면서도 그 이유를 다시금 곱씹을 수도 있지. 다시 만나고 싶고 다시 보고 싶고 다시 만지고 싶을 수도 있어. 헤어짐은 말이야, 제대로 된 헤어짐 이란 건 없는 것 같아. 앞선 그녀는 그래도 잘 헤어졌다고 말했는데, 오래 사귀었지만 서로 얘기를 많이 나누고 헤어졌다고. 그래도 많이 아팠을 거야. 지금도 아플 거야. 버림받은 기분이 아니라고 해서 아프지 않은 건 아니니까. 내가 먼저 이별을 고했다고 해서 아프지 않은 것도 아니고. 이별을 통보받아서 받는 고통과 그건 또 다른 아픔에서 오는 고통일 거야. 오랜 만남에서든 짧은 만남에서든 허전함과 텅 빔이 생기기 마련이지. 둘이었는데 하나가 된다는 건, 그런 것 같아. 혼자여도 둘인 것 같아야만 할 것 같은 그 기분. 오랫동안 혼자였지만 아직도 아픔이 있고 외롭고 그리운 그 기분이 나도 들어. 어쩌면 이런 이유 때문에 울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밤이 깊어서 달이 진하고 낮게 떠 있어서 너무나도 가까운데 내가 가질 수는 없고 만질 수도 없어서 나는 슬픈 거야. 울고 싶을 때는 울어야 해. 눈이 퉁퉁 붓는다는 표현이 있지만 너도 알다시피 내 눈은 잘 붓지 않아. 네가 말했었어, 눈이 붓지 않는 게 신기하다고, 미아 너는 신장이 튼튼한가 보다고. 아무리 짠 것을 먹어도 많이 울어도 눈이 퉁퉁 붓는 일은 거의 없는 네가 부럽다고 했어. 근데 그거 알아 정아야? 나도 마음껏 슬퍼하고 상대가 나의 슬픔을 부은 눈으로라도 알아주었으면 할 때가 있어.
이렇게 울고 나니까, 지난 화요일부터 생겨난 눈의 통증이 많이 울고 났을 때 느껴지는 그런 아픈 통증임을 깨달았어. 그 눈의 통증이 많이 익숙했었거든. 근데 정확히는 모르겠어서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어색해하고 있었어. 그냥 눈 찜질만 해주면 되는 걸까 눈을 감고만 있어야 하는 걸까 그랬는데, 이런 통증이었구나. 다행히도 그 출처를 알게 되어 조금은 안심이야. 울지도 않았는데 그런 통증이 생겼다는 건 꿈속에서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일을 경험하며 펑펑 울었다는 의미겠지. 그렇게 서럽게 울고 있었을 내가 가여워. 지금 내가 왜 눈물을 흘리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것처럼, 왜 울었는지 꿈속의 나도 모를지도 모르겠다.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내가, 미아 나 자신이 너무 슬프고 아프다. 기억하고 싶지 않을 텐데 기억이 나지 않고 눈만 아프니까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사랑은 기쁨의 노랑, 열정의 분홍, 편안함의 초록을 띠고 있어. 나도 색을 갖고 싶어 정아야. 보랏빛을 발하고 싶은데 그게 잘 되지 않아. 보라는 따로 있는 것 같아.
[이터널 선샤인]이 생각나. 꽤 오래전에 개봉한 영화였는데 그때는 몰랐다가 재개봉을 하고 나서 보게 된 영화야. 여주인공 머리 색이 맘에 들어! 라며 흥분했던 나를 기억하니? 정아 너는 예전에 본 영화라고 했어. 사랑을 하고 그 기억을 지우고 그렇게까지 후회하고 난리를 쳐야 하냐며 재개봉을 했을 때에도 시큰둥해하고 흥미를 보이지 않았지. 난 뒤늦게서야 극장에서도 보고 집에서도 보고 그 뒤로도 여러 번 봤잖아. 나는 왜 그렇게 집착하듯이 이 영화를 보고 또 봤을까. 인상적인 대사가 많아서 그 대사를 기억하고 싶었던 것도 아니면서 말이야. 그 기억만큼은 간직하고 싶다고 했던 거, 그 대사 하나만 기억나거든. 물론 정확하지도 않아. 마지막으로 이 영화를 본 지 또 시간이 한참 흘렀으니까.
사랑과 기억과 도망과 아픔과 상처와 이별과 망각과 기쁨과 슬픔과 회피와 직면과 만남과 후회와 절망과 미소와 원망과 ..과 ..과 ..과 ..과 .....
영화에 대해 생각하니까 무언가가 많이 떠오른다. 떠오르는 단어들을 나열하다 보니 그냥, 이게 삶이구나 싶기도 해. 우리의 삶. 인간의 삶.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어서 누군가와 함께 사회를 이루어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안타까운 우리 인간들의 삶. 어쩌면 나의 삶.
수많은 느낌 중에서도 나는 [이터널 선샤인] 속의 색채가 정말 인상적이었어. 그 색감을 느끼기 위해서 영화를 보고 또 봤는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흐르고 세세한 부분이 기억나지 않는데도 색의 그 느낌만은 생생하거든. 하얀 눈밭, 케이트 윈슬렛의 빨강, 파랑 섞인 보라, 그리고 초록색 머리, 지지 지직 흔들리는 화면의 무채색. 무채색 안에 담겨 있는 짐 캐리의 지친 표정. 아무리 도망을 가도 그들을 지독하게 따라다니던 까만 배경에 동그란 노란 조명. 선명한 색은 하나도 없었어. 조금씩 섞여 있고 희미하고 오래된 색이었어. 기억 속의, 추억 속의, 회상 속의 그런 색들이야. 밝음도 빛도 햇살도 바다도 파도도 모두가 다 한 꺼풀이 위에 덮여 있어.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어 정아야? 너는 이해하는 거야? 아니, 너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미아, 또 시작이다. 그러고 있겠지.
정아야, 나는 그를 사랑했어. 표현도 서툴렀고 모든 것이 어색했지만 그를 많이 아꼈고, 다정하게 살펴주고 싶었어. 그러면서도 두려운 마음이 강했지. 내 마음이 더 깊고 진해져서 그가 나를 가볍게 여길까 봐.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은데. 그래서 불안했어.
[이터널 선샤인]의 영어 제목은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야. 뒤에 스폿리스 마인드가 더 붙어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이터널 선샤인]이라고 정한 거지. 영원한 햇살, 영원한 행복. 영원한 사랑을 의미하는 걸 거야. 사랑할 때의 그 밝음, 그 따뜻함, 그 변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녹아들어 있는 말, 이터널 선샤인. 하지만 삶이 있으면 죽음이 있듯이, 우리에게 영원한 건 존재하지 않잖아. 더구나 spotless 라니. 오점하나 없다니. spot 없는 사람이 있을까. 우리는 누구나 다 작은 점은 가지고 있지, 작은 얼룩을 가지고 있지, 큰 오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많고, 작은 스폿으로 시작해서 인생이 엉망이 된 사람도 있을 거야. 영화 속의 짐 캐리가 무너지고 주저앉는 것처럼. 내가 남긴 얼룩들이 지워지지 않고 살아서 움직여. 내가 만들지 않은 자국들도 내 곳곳에서 얼룩덜룩해.
모든 것을 기억하기, 어떤 기억을 잃어버리기, 부분적으로만 기억을 선택하기, 어떤 게 옳고 어떤 게 좋은 걸까? 행복과 불행은 또 기쁨과 슬픔은 한 곳에서 동시에 발생해서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 같아 정아야. 좋은 쪽으로만 생각하고 싶은데 그 옆에는 늘 다른 게 서 있어서 그쪽을 바라보는 게 무서워. 지워지지 않는 것들이라도 품고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어.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니라 그것들이 희미해지도록 노력하며 살아가는 걸 거야. 완벽하게 지워지지는 않더라도 희미해지면서 조금씩 무뎌지고 자신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사는 삶. 주위의 도움도 필요하겠지. 난 말이야, 아직은 그런 삶이 상상이 되지는 않아.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
기억에서 도망치지 마.
내가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야. 용기를 내라고 다독이는 말이기도 하고 약해빠진 나를 꾸중하는 말이기도 해. 너도 나에게 지금 이 말을 하고 있을 것 같아. 하지만 정아야, 난 도망치고 싶어. 도망치고 묻어두어야, 한 순간이라도 내가 눈물을 덜 흘릴 것만 같아서. 만남과 이별.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시작과 출발을 축하해 주어야 하고, 누군가에게는 헤어짐과 마무리를 위로해 주어야 하지. 또 애도가 필요할 때도 많이 있어. 그런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나에게 닥쳐서 나는 자면서도 울고 있을 수밖에 없는 거야. 기뻐도 울고 슬퍼도 울고. 하지만 눈이 붓지 않으니까 나는 괜찮아 보일 것이고, 눈이 아파서 나는 오늘도 눈을 꽈악 감고 있어야겠지.
오늘밤에는 눈이 아파도 [이터널 선샤인]을 한번 더 봐야겠어. 펑펑 울게 될지 무덤덤하게 바라보고만 있을지 미소 지으며 가슴 아파할지 어쩌면 일말의 희망을 발견하게 될지도. 이번에는 또 어떤 느낌이 나에게 다가올지 왠지 궁금해진다.
미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