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이라는 권력

(웹소설 1화) 갑질세대 을질세대

by 유리갑옷


제목: 우리는 일하기 위해 살아가는가


1화. 갑질과 을질 사이, 그 어딘가에서


팀장으로 산다는 건

매일, ‘너는 갑이야’ 라는 의심을 받는 일이다.

하지만 정작 나는, 위에서 쏟아지는 이메일 한 줄에

숨도 못 쉬고 일정을 수정하는 사람인데.


갑일까?

을일까?


그 사이에 낀 사람은 누구에게 하소연해야 하나.


퇴근 후 9시 57분.

카톡 알림이 떴다.

평소 말도 적고 조용한 후배 직원, 세진이었다.


"팀장님, 부처에 보낼 자료인데 확인해주세요. 지금 그 쪽 담당자가 이 자료 받으려고 퇴근도 못하고 기다리고 있어요. 확인하고 의견 주시면 보낼게요."

(파일첨부)


순간, 휴대폰을 떨어뜨릴 뻔했다.

부처에 보낼 자료인데 이제야 나에게 보낸다고? 지금 밤 열시인데 그쪽 담당자가 퇴근도 못하고 기다리고 있으면 내가 검토해서 의견을 준다고 해도 고쳐서 보낼 시간이 있을텐데 이걸 나보고 검토를 하라는 것인가 아니면 그냥 나를 통했다는 정당성만 얻으려는 것일까.

지금은, 밤 열 시인데?


‘퇴근 후 업무지시는 갑질’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내가 이런 시간에 업무와 관련된 문자를 보낸다면 분명히 갑질로 신고를 당할 일이다. 신고가 아니어도 익명게시판을 뜨겁게 달구거나 운이 좋으면 그냥 삼삼오오 모인 뒷담화 자리 소재가 되는 정도가 될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 시간에 문자를 받아도 갑질이라고 항의할 수도 없다.

왜냐면 세진은 공식적으로는 나의 갑이 아니기에.


둘째 숙제를 오랜만에 봐주던 시간에 여러가지 생각과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느꼈다.

아이에게 짜증스럽게 "너 스스로 해"라고 말하고는

문자에 답을 쓸까 말까 고민을 한다.

계속 화가 치밀어 오른다.


'이렇게 급한 일이라면 퇴근 전에라도 양해를 구했어야지'

'상사에게는 몇시에 연락하든 상관없다는 것일까?' 내가 무서운 상사였다면 이렇게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세진은 나와 일하기 시작한 지 오래되진 않았다. 세진은 전에 나와 같이 일했던 직원들과 친하게 지내고 있다. 내 생각에 나와 함께 일했던 직원들에게 내가 그리 어렵지 않은 사람이라고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다.

하지만 이 것은 정도가 지나쳤다.

나는 망설이다 문자를 남겼다.

'이 시간에 부처에 보낼 자료를 보내는데 담당자가 퇴근도 안하고 기다리고 있다고 하면, 내가 검토해서 의견을 줄 시간이 없지 않나요.'

나로서는 평소보다 단호한 말투였다

세진은 '그러면 이대로 보내고 내일 팀장님 의견 받겠습니다'


그 답장은 나를 더 화나게 했다.

이미 보낸 이후에 내 의견을 받는 건 아무 의미가 없다. 원래 부처로 나가는 자료들은 충분히 검토하고 잘 다듬어 보내야 하는 자료이다. 하지만 세진은 애초부터 내 의견을 받을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팀장 확인받고 보냈다'라는 것이 필요했을 뿐.


다음 날.

세진에게 나와의 의사소통 방식에 대해 전달했다.

"세진씨, 앞으로 나와 오해없이 일하기 위해 나의 소통방식을 좀 말해주고 싶어요. 나는 회의를 들어가기 전에 회의자료를 꼼꼼히 보는 편입니다. 외부에 나가는 자료는 담당자가 작성을 했더라도 내가 반드시 검토를 해야 하는 것이고요. 결재를 하기 전에는 충분한 검토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나는 여러명의 업무를 관리하고 있어요. 세진씨 업무만을 기다리고 보내자마자 확인할 수 없는 상황들이 있으니 중요한 자료는 꼭 시간을 확보하고 말해주세요."


세진은 부처 담당자가 자신에게 갑질에 가깝게 요구를 했고, 자신은 그 요구를 맞추기 위해서 퇴근시간 이후에도 일했다는 것, 그리고 그 부처 담당자는 직위가 낮은 사람인데도 자신에게 그런 요구를 하는 것에 대해 우리 회사를 다니는 것에 대한 자괴감이 느껴졌다는 하소연을 했다.


나는 세진의 어려움을 이해한다고 말하고, 회사생활이 어려운 점이 있으니 조금 이해해가자고 이야기했지만 사실은 세진이 매우 자기 중심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격려하고 다독이는 말로 이야기는 마무리되었다.


다음 날, 블라인드에 글이 하나 올라왔다.

익명.

하지만 나를 향한 말이라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밤마다 피드백 달라고 지시하는 팀장, 진짜 갑질 아닌가요?”

“요즘 시대에 저런 일도 있네요.”

“시간이 지나니 그냥 팀장되는 자리에 있게 되는 건데 월급루팡아닌가요”

"지가 뭘 안다고 검토할 시간을 달라고 해. 내가 어련히 알아서 잘 안했을까봐. 꼴에 일하는 척은 하고 싶은 모양"

"그 부서에 일하는 애들 여럿 울렸다는 그 여자, 아직도 그러고 지내나 보죠? 같이 일해보면 다들 치를 떠는 사람이에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미영은 손에 들고 있던 머그컵을 내려놓았다.

손이 떨렸다.


'내가 시켰던가?'

‘아니, 나는 그저 밤 10시에 자료를 받았을 뿐인데…’


블라인드는 설명할 수 없는 공간이었다.

누가 올렸는지 모르고,

누가 읽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명확한 건 하나 있었다.

사람들은 진실보다 감정에 반응한다는 것.


나는 친절한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언성을 높이거나 인격모욕을 하는 발언 커녕 거절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다

늘 정당하려고 노력한다.

그건 배운 것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생존법이었다.


성의를 들이지 않아 품질이 엉망인 산출물을 좋은 게 좋다고 웃으며 '수고했어요.'라는 말을 하지 못한다

그 말 속에 진심이 없다면

오히려 나 자신이 부끄럽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 건으로 야단을 치거나 직설적으로 부정적아 피드백을 주지 못한다.

주로 그냥 내가 하고말지 하는 게 미영의 스타일이다


친절하진 못하더라도

미영은 누군가를 괴롭히려는 의도는 없었다.

정말로, 없었다.


퇴근 후에도 업무에 붙잡히는 나.

‘지시’와 ‘요청’ 사이를 헷갈려 하는 팀원들.

블라인드의 익명 폭로.

그리고 진실을 들여다보려는 사람 하나 없는 회의실.


이 모든 것이

한 사람의 목소리보다

‘여론’이라는 이름으로 정리된다면,

나는 어디에 있어야 하는 걸까.


‘나는, 그냥 일했을 뿐인데.’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내용은 사실이 아니다.

하지만 그들이 나를 향해 쏟아내는 미움과 증오는 내 존재의 잘못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내가 한 말들을 하나씩 곱씹어 보고, 내가 한 행동들과 상황들을 되짚어 보면서 어디서 무엇을 잘못했는 지 끊임없이 생각해본다.


그냥 그 순간

'그래요 수고했어요. 밤 늦게까지 고생했네요. 보내세요.'라고 답했다면

나도 편하고 그녀도 편하고, 내가 이렇게 욕먹을 일도 안일어났겠지.


하지만 그 자료는 중요한 자료였고, 나는 확인할 책임이 있는 사람이고, 나는 늘 책임감 있게 일해왔다.

세진의 자료를 다 신뢰하기엔 아직 그녀의 능력은 부족하다고 느껴왔었다.

그시간에 나에게 자료를 확인하라고 말하지 말았어야 했다.


내 잘못과 그녀의 잘못 사이 나는 계속 되짚어보며 괴로워했다.

하지만

그 글을 올린 것은 분명한 잘못이다.


다음 화: 내가 갑이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