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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속 그 아이

by 유리알구슬

그런데,

내 안에 잔뜩 버티고 있던 벽이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다.


공부라는 성 안에 들어가,

꽁꽁 닫고 외면하던 나의 감정들이

작은 틈으로 비집고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덩그러니 놓인 엄마의 편지를 보며,

소리 내어 울지도 못했던

14살의 그 아이가

나에게 걸어오고 있었다.


그때 안아줬어야 했는데...

그 아이를 그때 마주했어야 했는데...


난 또 나를 돌봐주지 못했다.




- 니 애미는 아직도 그런 맘인 거니..

- 아빠가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다.


내 옆에서 위태롭게 서 있는 아빠를 보며,

아빠가 편안해야 내가 편안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내가 뭘 좋아하는지,

내가 뭘 힘들어하는지 따위를 생각하는 건

그때 나에게 사치였다.


친구들은 내게 물었다.

넌 우리랑 노는 게 싫냐고..

왜 맨날 집에 일찍 가냐고..

같이 거리응원도 하고 늦게까지 놀다 가면 안 되냐고..


속으로 수백 번을 외쳤다.

나.. 너무 그러고 싶어..

근데.. 아빠가 혼자인걸 싫어하셔..


아빠가 퇴근하시고

행여나 빈집에 들어오시면 외로우실까 봐,

그러면 또 어두워지실까 봐,


친구들에게 애써 웃어 보이며

신촌지하철역으로 뛰어내려 가던 내가

아직도 생생하다.


아프다.

그게 뭐라고.

그냥 다른 딸들처럼,

아빠한테 큰소리로 한번 대들어나볼걸.

아빠한테 나 놀고 올 거라고 한번 얘기나 해볼걸.


왜 그땐 그게 그렇게도 미안했는지...

아빠는 슬픈데

나만 행복하게 웃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렇게 난,

또다시

내 안의 나를 외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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