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의 엄마, 그리고 나
1.
지구가 많이 아프긴 한가 보다.
날씨가 요 며칠 사이에 널을 뛴다.
그리고 오늘,
에어컨 바람이
청량하게 다가오는 계절이
오고야 말았다.
그동안 아침저녁으로 쌀쌀해서
오늘도 아침에 그러려니 하며
좀 두께감 있는 옷을 입고 나왔는데,
이런....
한증막이 따로 없다.
2.
오늘 모처럼 엄마와 점심을 함께 했다.
종종 나와 점심을 먹으며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엄마를 위해,
시간을 내어 드린다.
무뚝뚝한 딸이라,
엄마에게 살갑게 대하지는 못한다.
그래도 이젠 제법 엄마 앞에서
이러쿵저러쿵 시답잖은 말도 많이 한다.
오늘의 밥상 주제는
사춘기 큰 딸이다.
나는 오늘 나의 엄마 앞에서
나의 딸 흉을 좀 보기로 한다.
딸을 이해할 수 없다고 칭얼대는 나와
그런 나를 달래는 엄마.
엄마는 자식복이 많아서 좋겠다고 빈정대는 나와
그런 말을 들으며 민망해하는 엄마.
오늘은 계속 이런 구도이다.
오늘은 계속 이래 보기로 작정했다.
그래도 한참 쏟아내고 나니
마음이 좀 낫다.
엄마는 내 기분전환을 시켜주겠다며
맛있는 커피도 사주셨고,
입은 옷이 더워 보인다며
여름 셔츠도 하나 사주셨다.
오늘은 그냥 모른 척
다 받기로 한다.
어떤 죄책감도 없이.
3.
사무실 앞으로 나를 바래다주며
엄마가 갑자기 그런다.
지난 주말,
친정에서 안방 장롱 정리를 하다가
먼지가 소복이 쌓인 앨범 하나를 발견했다.
그 앨범에는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인 1995년,
너무나도 젊디 젊은 엄마 아빠가
미국 여행을 가서 찍은 사진들로 가득했다.
광활한 미국 땅에서 멋들어지게 포즈를 취하는
엄마 아빠의 사진들 사이로,
앨범 주제와 맞지 않는(?)
그 시절의 내 사진 하나가 보였다.
당시 중학교 1학년인 내가,
엄마와 거실 소파에서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사진을 물끄러미 보는데,
기분이 좀 이상했다.
내 얼굴에서
작은딸의 표정이 보이는 듯도 했다.
생각해 보니,
지금 중학교 2학년인 큰 딸보다도
더 어린 나이였더라.
1995년의 나와 엄마를 보고 있자니,
2025년의 딸과 나를 보고 있는 것도 같았다.
나는 그 앳되고 말간 모습에 그만 울컥했다.
그래서 얼른 사진을 넘겼다.
대수롭지 않은 척,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꾸역꾸역 정리를 했다.
그런데 그런 마음이 들었던 건
나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4.
엄마의 입을 통해
그때의 적나라한 속마음을 듣고 나니
마음 둑이 또 터지려 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여긴 회사니까.
나는 무너지려는 마음 둑을
애써 누르며,
또 아무렇지 않은 척,
매우 대범한 척,
또 엄마에게 건조한 말 한마디 내뱉는다.
하아..
이게 뭐람.
참 멋없구먼...
아니야.
이건 내 탓이 아니야.
오늘 날씨가
너무 더워서 그래.
그래...
지구가 많이 아픈 게
틀림없어...
<끝.>
<덧.>
오늘은
엄마와의 에피소드를
단편소설처럼 써 보았습니다.
이러저러한 형식으로
'엄마 그리고 나'를
틈틈이 엮어보려고 합니다.
이것 또한
내 안의 그 아이를
잘 배웅해 주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쓰다 보니
이런 것들도 보이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