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첫 번째 밤

by 유리사탕

카드를 침대 위에 놓은 채 가방에서 노트를 꺼냈다.


빈 페이지를 펼치고, 볼펜 뚜껑을 열었다. 뚜껑이 침대 아래로 굴러갔다. 주워서 테이블에 올렸다. 천장의 CCTV 렌즈가 빨간 불빛을 깜박이고 있었다. 노트를 몸 가까이 기울였다. 카메라 각도에서 글씨가 보이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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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 기록 — Day 1]


참가자 12명. 직업 분포: 의사, 판사, 변호사, 기자, 간호사, 건설업, 유튜버, 프로그래머, 요리사, 교사, 탐정, 대학원생.


단서 카드 내용 (내 것): '수술대 위의 손이 멈추었다. 살리지 못한 것이 아니라, 살리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그 손을 가려준 자가 있다.'

→ 1차 추정: 윤재하 (외과의사). 수술대 + 살리지 않은 = 의료 과실 또는 의도적 방치.

→ 차민경이 읽은 단서도 '하얀 가운 아래 숨겨진 손' — 윤재하와 일치.

→ 같은 인물을 가리키는 두 장의 카드. 심판자가 의도적으로 윤재하를 첫 타겟으로 설정했을 가능성.

→ 문제: 마지막 문장 '그 손을 가려준 자.' 은폐자가 있다는 뜻.


주요 관찰:

1. 윤재하 — 두 장의 카드가 가리키는 인물. 만찬 중 가장 여유로움. 과도한 침착.

2. 정태호 — '자기 죄를 아느냐'는 자기 질문에 스스로도 손이 떨림. 자각하고 있음.

3. 이수아 — 과도하게 침착함. 카드를 읽고 아무 반응 없이 노트북에 끼워넣음. 심리학 전공이라면 감정 통제에 능할 수 있지만, 이 상황에서의 침착함은 '준비되어 있었다'는 의미일 수도.

4. 김준영 — 만찬 불참. 노트북 3대. 시스템 접근 시도 가능성.

5. 오하늘 — 카드를 읽고 손 떨림. 단서가 자신의 죄와 관련 있는 것으로 추정.

6. 백서연 — 법률적 대응을 시도. 정보를 통제하고 싶어 하는 성향.

7. 박도현 — 가장 격렬한 반발. 그러나 탈출 불가능 확인 후 침묵. 분노 뒤에 두려움.


인과 사슬:

- 심판자가 '여러분의 죄는 하나의 인과 사슬로 연결되어 있다'고 했음.

- 12명의 죄가 독립적이 아니라 연쇄적. 누군가의 죄가 다른 누군가의 비극을 낳았다.

- 내 죄도 그 사슬의 일부.


율도 사건과의 연결:

- 초대장에 동봉된 사진과 메모. 심판자는 내가 3년 전 여기 왔었다는 것을 알고 있음.

- 3층 끝 잠긴 문 → 지하로 통하는 계단으로 추정.

- 지하 B3층 접근 필요.


우선순위:

1. 다른 참가자들의 단서 내용 파악

2. 윤재하의 '의료 과실'이 무엇인지 탐색

3. 지하 접근 경로 확보

4. 심판자의 정체와 동기 추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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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펜을 멈추었다. 노트 위의 글자들을 바라보았다. 적지 않은 것을 떠올렸다.


'그 손을 가려준 자가 있다.'


을지로 사무실의 잠긴 서랍. 3년 전, 서진이 한 일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건 윤재하의 은폐자를 가리키는 건가. 아니면 나를. 척추 사이로 냉기가 스며들었다.


노트를 덮었다.


노크 소리가 그 생각을 끊었다.


문을 열자 강다은이 서 있었다. 잠옷 위에 가디건을 걸친 차림. 복도 끝에서 환풍기가 돌아가는 소리가 낮게 울렸다. 손에 수첩.


"아직 안 주무셨네요." 복도 양쪽을 살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천장의 CCTV를 흘긋 보았다. 강다은도 같은 방향으로 시선을 보내며 어깨를 으쓱했다.


"어차피 보고 있잖아요. 들어가서 이야기하죠."


방 안으로 들어온 강다은은 발코니 쪽 의자에 앉았다. 서진은 침대에. 두 사람 사이에 테이블 하나.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수첩을 펼쳤다. "한서진 씨, 이 상황에서 살아남으려면 정보가 필요해요. 탐정이시니까 그건 아시잖아요."


"제안이 뭔데요?"


"정보 동맹. 서로 가진 단서를 공유하고, 관찰한 것을 나누는 거예요. 내일 심판 전에 최대한 많은 퍼즐 조각을 맞추는 게 유리하잖아요."


"기자분이 탐정에게 정보 동맹을 제안하는 건 드문 일이군요. 보통은 받는 쪽이 이득이니까."


강다은이 입꼬리를 올렸다. "맞아요. 기자는 원래 받는 쪽이죠. 하지만 지금은 달라요. 여기선 정보를 혼자 쥐고 있으면 죽을 수도 있어요."


자연스럽게 내뱉었다.


"좋아요. 대신 조건이 있어요. 일방적이면 안 돼요. 주는 만큼 받아야 해요."


"당연하죠." 수첩에서 페이지를 찢어 서진 앞에 내밀었다. "먼저 줄게요. 내 단서 카드 내용."


종이에 적힌 글씨. '법의 이름으로 묵인된 죄. 망치를 든 자가 눈을 감았다.'


카드를 내려다보았다.


"정태호를 가리키는 것 같죠?" 강다은이 말했다. "전직 판사. 법의 이름으로 누군가의 죄를 묵인했다는 뜻이에요."


고개를 끄덕이며 자기 카드를 꺼내 테이블 위에 놓았다. 강다은이 읽었다.


"수술대. 윤재하." 낮게 중얼거렸다. "두 장의 카드가 같은 사람을 가리키고 있어요. 차민경이 읽은 것도 윤재하를 가리키고요."


"윤재하가 첫 번째 타겟이에요. 심판자가 의도적으로 가장 많은 단서를 풀어놓은 인물이에요. 내일 심판에서 첫 번째로 지목될 가능성이 높아요."


"그런데 마지막 문장이 마음에 걸려요." 카드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그 손을 가려준 자가 있다.' 윤재하만이 아니라 은폐자가 있다는 거잖아요."


대답하지 않았다. 발코니 너머로 바다가 검게 출렁이고 있었다.


"내일 아침에 다시 이야기해요. 오늘은 여기까지."


강다은이 일어서며 수첩을 접었다. 문 앞에서 돌아보았다.


"한서진 씨. 아까 규칙에서 '퇴장'이라는 말, 어떻게 해석하세요?"


"최악의 경우를 가정하고 행동하는 게 맞을 거예요."


"최악이라면."


"커피 한 잔 더 마시고 싶네요." 아무 말이나 했다. 그리고 강다은을 보았다. "말 그대로요."


강다은이 서진의 눈을 바라보았다.


문이 닫혔다.


*


야간통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불을 끄고 발코니로 나갔다. 밤바다가 까맣게 펼쳐져 있었다. 달이 없는 밤이었다. 별만 흐릿하게. 바람이 짠기를 실어 왔다. 발코니 난간에 소금기가 끈적하게 묻어 있었다.


저 바다 건너편 어딘가에 목포가 있다. 더 먼 곳에 서울이 있다. 을지로 사무실과 식은 커피와 불륜 사진들.


그 일상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아니. 3년간이 비현실이었지. 묻어두고 아무 일 없던 척 살아온 건데.


아래층 발코니에서 불빛이 새어 나왔다. 누군가 아직 깨어 있었다. 작은 소리가 들렸다. 울음소리. 누군가 방 안에서 울고 있었다.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누웠다. 베개에서 빨래 냄새가 났다. 처음 맡는 브랜드였다. CCTV 렌즈가 어둠 속에서도 빨간 점으로 빛나고 있었다.


잠이 오지 않았다.


자정.


스피커에서 짧은 알림음이 울렸다.


"야간통제가 시작되었습니다. 오전 여섯 시까지 객실 밖 이동을 금합니다."


변조된 음성이 끊겼다. 건물 전체가 조용해졌다. 복도의 조명이 비상등 모드로 전환되는 것이 문틈 아래 빛의 색깔로 알 수 있었다. 밝은 백색에서 붉은 주황으로.


눈을 감았다.


*


한참 뒤.


뒤척이다가 소리를 들었다. 미니 바 냉장고가 꺼지면서 방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복도. 발소리.


야간통제 시간이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다가갔다. 문에 귀를 대었다.


발소리가 방 앞을 지나갔다. 가볍고 조심스러운 발소리. 운동화 바닥이 카펫을 밟는 소리. 복도 끝으로 향하고 있었다.


잠금장치에 손을 대었다. 열 수는 있다. 하지만 밖으로 나가면 규칙 위반이다. CCTV가 있다.


손을 내렸다.


누군가 야간통제를 무시하고 움직이고 있다. 어디로. 왜?


야간통제 깨면 즉시 퇴장인데. 그 위험을 감수하고?


뭔가를 확인하려는 건가. 아니면 심판자 쪽 사람이라 야간통제가 적용 안 되는 건가.


일단 다시 눈을 감았다. 아침에 확인해야 할 것이 늘었네.


먼 곳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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