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규칙

by 유리사탕

스크린에 불빛이 번졌다.


하얀 배경. 검은 글씨가 한 글자씩 나타났다. 누군가 실시간으로 타이핑하는 것처럼. 글자가 찍히는 간격에는 읽는 자를 초조하게 만드는 리듬이 있었다.


열두 명은 로비 중앙에 서서 스크린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로비 어딘가에서 시계가 째깍거렸다.


[규칙]


1. 이 섬에 모인 12명은 각자 세상이 모르는 죄를 지고 있다.

2. 72시간 동안 서로의 죄를 밝혀라.

3. 매 24시간마다 심판이 열린다.

4. 심판에서 죄가 밝혀진 자는 '고해'의 기회를 받는다.

- 고해를 수락하면: 격리. 생존.

- 고해를 거부하면: 퇴장. 방식은 심판자가 결정한다.

5. 72시간 종료 시 밝혀지지 않은 죄가 남아 있으면, 해당 죄인은 섬에서 사라진다.

6. 야간통제: 자정~오전 6시, 객실 밖 이동 금지. 위반 시 즉시 퇴장.

7. 각 참가자에게 다른 참가자 한 명의 죄에 대한 단서가 주어진다.

8. 단서의 교환, 공유, 파기는 자유.

9. 물리적 폭력은 금지. 위반 시 즉시 퇴장.

10. 심판자의 결정은 최종적이다.


글씨가 사라졌다. 스크린이 다시 하얀 빛만 토해냈다.


정적.


열두 명의 숨소리가 높은 천장 아래서 겹쳐 울렸다.


"이거 몰카죠?"


송민호였다. 가벼운 척하고 있었다.

"몰래카메라. 어디서 찍고 있는 거예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묻고 있잖아요."

천장의 CCTV를 올려다보며 소리쳤다.

"야, 거기! 재미있어? 이런 거 불법인 거 알지?"


스피커가 다시 켜졌다.


"이것은 몰래카메라가 아닙니다. 여러분의 72시간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백서연이 앞으로 나섰다. 구두 굽이 대리석 바닥을 또렷하게 울렸다. 등을 곧게 세웠다.


"주최 측에 묻겠습니다. 당신이 말하는 '퇴장'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리고 이 상황은 명백한 불법 감금입니다. 참가자 전원의 동의 없이 이루어진 격리는 형법 제276조 체포 및 감금죄에 해당합니다."


"여러분은 자발적으로 이 섬에 왔습니다. 초대장에 '72시간'이라고 명시되어 있었습니다."


"72시간의 감금에 동의한 적은 없습니다."


"동의는 탑승 시점에서 성립되었습니다."

변조 목소리가 잠깐 멈추었다.

"하지만 법적 논쟁은 무의미합니다, 백서연 변호사. 지금 이 섬에서 대한민국 법률은 적용되지 않으니까요."


백서연의 입술이 떨렸다. 서진은 다른 것을 잡아냈다. 스피커가 백서연의 직업을 알고 있었다. 초대장에는 직업이 적혀 있지 않았는데.


정태호가 입을 열었다. 낮고 무거운 목소리.


"이 규칙이라는 것. 우리 모두에게 죄가 있다고 했나?"


"네."


"근거는?"


"각자의 양심에 물어보시죠."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서진은 보았다. 오른손 검지가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양복바지 옆선을 두드리듯 꿈틀거리는 손가락.


"한 가지 더." 정태호가 말했다. "우리 열두 명이 무작위로 모인 것은 아니겠지. 선별 기준이 무엇이오?"


스피커에서 찰칵, 하는 소리가 났다. 마이크가 꺼지기 직전의 소리. 다시 켜졌다.


"여러분의 죄는 독립된 것이 아닙니다." 변조 음성이 한 음절씩 또렷하게 끊었다. "하나의 인과 사슬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누군가의 죄가 다른 누군가의 비극을 만들었고, 그 비극이 또 다른 죄를 낳았습니다. 72시간 안에, 그 사슬의 전모를 밝혀야 합니다."


인과 사슬.


열두 명의 죄가 연결돼 있다고? 단순한 고해 강요가 아닌 건데. 누가 이걸 전부 파냈지. 열두 명의 과거를, 연결고리까지.


등줄기를 차가운 것이 타고 내렸다.


박도현이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쿵. 봉투들이 튀어올랐다. 유리잔 하나가 바닥에 떨어져 깨졌다.


"개소리 집어치워. 나는 나갈 거야. 배를 불러. 지금 당장."


"배는 72시간 후에 돌아옵니다."


"그럼 수영해서라도 나가지."


"선착장에서 해안선까지 최단 거리 14킬로미터입니다. 3월 남해안 수온은 섭씨 8도. 저체온증까지 약 15분." 잠깐 쉬었다. "시도는 자유이지만, 권하지 않습니다."


박도현의 얼굴이 목까지 붉어졌다. 윤재하가 조용히 다가가 팔에 손을 얹었다.


"진정하시죠. 흥분하면 판단이 흐려집니다."


"손 치워." 팔을 뿌리쳤다. 더 이상 소리를 지르지는 않았다.


차민경이 핸드폰을 들어올렸다. 전파가 잡히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도 카메라 앱을 열었다.


"대박. 이거 콘텐츠감이다." 낮게 중얼거렸다.


*


테이블 위의 봉투들을 바라보았다. 열두 개. 자기 이름이 적힌 것을 찾아 집어 들었다.


하나씩, 다른 사람들도 봉투를 집어 들기 시작했다. 차민경이 가장 먼저 열었다. 작은 카드 한 장.


"뭐야 이거." 카드를 들어 읽었다. "'하얀 가운 아래 숨겨진 손.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손.' 이게 뭔 소리예요?"


자동으로 한 사람을 향했다. 윤재하. 턱 아래 근육이 수축했다. 눈동자가 찰나 동안 카드 쪽을 스치다 돌아왔다.


봉투를 열었다. 카드 한 장.


'수술대 위의 손이 멈추었다. 살리지 못한 것이 아니라, 살리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그 손을 가려준 자가 있다.'


수술대. 살리지 않은. 의료 과실이거나 의도적 방치. 시선을 들었다. 테이블 맞은편, 윤재하가 자기 카드를 읽고 있었다. 정중한 표정을 유지한 채 카드를 양복 안주머니에 넣었다.


차민경이 받은 카드도 윤재하를 가리키고 있었다. 서진이 받은 카드도. 두 장이 같은 사람을 가리키고 있다. 우연일 리가.


마지막 문장이 걸렸다. '그 손을 가려준 자가 있다.' 의사만이 아니었다.


카드를 주머니에 넣었다.


주변을 살폈다.


이수아는 카드를 읽고 아무 반응 없이 노트북 사이에 끼워 넣었다. 너무 아무렇지 않았다.


오하늘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카드를 쥔 손가락이 하얗게 질렸다.


김준영은 카드를 한 번 보고 후드 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후드 그림자가 얼굴 윗부분을 가리고 있었다.


류지원은 안경을 벗고 카드를 눈앞에 바짝 가져다 댔다. 읽은 뒤 잠시 창밖의 바다를 바라보았다. 카드를 접어 재킷 안주머니에 넣는 손이 천천히 조심스러웠다.


강다은은 카드를 읽자마자 가방에서 수첩을 꺼내 뭔가를 적기 시작했다.


스피커가 다시 켜졌다.


"단서를 확인하셨으리라 믿습니다. 이제 객실로 안내하겠습니다. 로비 왼쪽 복도를 따라가시면 문에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오늘 밤 여덟 시에 식당에서 만찬이 준비됩니다. 참석은 자유이나, 권합니다."


"서로를 알아야 서로의 죄를 찾을 수 있으니까요."


"첫 번째 심판은 내일 오후 네 시입니다."


*


객실은 복도 끝에서 두 번째였다.


문을 열었다. 호텔 스위트룸 수준의 공간. 킹사이즈 침대. 미니 바. 욕실. 발코니. 절벽 위에 위치한 방이라 고도가 높았다. 아래서 파도가 바위를 때리는 소리가 쉬지 않고 올라왔다. 어딘가에서 배관 지나가는 소리가 벽 속을 울렸다.


문을 닫고 방을 돌았다.


침대 아래. 빈 공간. 먼지 없음. 최근 청소.

욕실. 표준 호텔 구조. 어메니티에 브랜드명 없음. CCTV 없음.

옷장. 빈 행거. 금고 하나. 비밀번호 방식.

미니 바. 물, 음료, 스낵. 주류는 빠져 있음.

발코니. 난간 높이 1.2미터. 아래는 수직 절벽. 탈출 불가.

문. 안쪽 잠금 가능. 카드키 방식.


그리고 천장 구석. 작은 카메라. 렌즈가 방 전체를 커버하는 각도. 욕실에는 없음.


침대에 앉아 가방에서 3년 전 개인적으로 남겨둔 노트를 꺼냈다.


'지하 B3층. 도면에 없는 공간. 약 50평. 내부에 소형 방 6개. 각 방에 잠금장치 (외부에서만 개폐 가능). 벽면 긁힌 자국 — 손톱에 의한 것으로 추정. 바닥 배수구에서 혈흔 수거 (미분석 상태로 폐기 처리).'


노트를 다시 밀어 넣었다.


겉을 바꿔도 뼈대까지 바꾸진 못한다. 지하는 아직 거기 있을 거다.


노크 소리.


파일을 재빨리 가방 속에 밀어 넣고 지퍼를 올렸다. 문을 열자 오하늘이 서 있었다. 어깨가 움츠러들어 있었다.


"안녕하세요. 옆방이에요." 미소를 지었지만 입가가 떨렸다. "혼자 있으니까 좀 무섭더라고요. 괜찮으시면 같이 건물 좀 둘러볼래요?"


"좋아요."


*


오하늘과 함께 건물을 돌았다.


지상 4층. 1층에 로비, 식당, 라운지. 2층과 3층이 객실. 복도마다 두꺼운 카펫이 깔려 있어 발소리가 흡수되었다. 4층은 옥상 정원과 수영장이었지만, 수영장에 물은 없었다. 빈 타일 바닥에 낙엽이 몇 장 말라붙어 있었다. 각 층의 비상구에는 전자 잠금장치. 특정 구역은 카드키로도 열리지 않았다.


3층 복도 끝. 잠긴 문 앞에서 오하늘이 멈췄다.


"막혀 있네. 이쪽으로는 못 가나 봐요."


문 틈에 눈을 갖다 댔다. 좁은 틈 사이로 보이는 것.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 콘크리트 벽. 지하로 통하는 길이었다.


"간호사세요?" 시선을 문에서 거두며 물었다.


오하늘이 살짝 놀랐다. "어떻게 아셨어요?"


"손이요. 소독제를 자주—" 말을 멈추었다. "아, 실례됐으면 죄송해요."


"아뇨, 괜찮아요. 맞아요."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등이 거칠고, 손가락 사이가 갈라져 있었다.


"서울 중앙병원 내과에서 일했어요." 잠깐 멈칫했다. 과거형. "지금은 좀 쉬고 있어요."


"힘든 일이죠."


"네." 시선이 복도 끝 창밖으로 향했다. "환자를 돌보는 게 힘든 게 아니에요. 환자를 보내는 게 힘들어요.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떠나는 사람은 떠나니까."


말끝이 가늘어졌다. 동시에 규칙의 첫 번째 조항이 떠올랐다. 열두 명 모두에게 숨겨진 죄가 있다.


"한서진 씨는요?"


"사설탐정이에요."


"탐정이요?" 눈이 커졌다. "진짜요? 그럼 이런 거, 추리 같은 거 잘하시겠네요."


"잘한다기보다. 직업이니까요."


"솔직히 말하면." 오하늘이 창밖을 보며 말했다. "저는 돈 때문에 왔어요. 5억이면 어머니 병원비를 다 내고도 남으니까. 그런데 이게, 이런 상황일 줄은."


"다들 비슷할 거예요."


"한서진 씨도 돈 때문에 오신 거예요?"


잠깐 입을 다물었다. "아뇨. 다른 이유가 있었어요."


오하늘이 더 묻지 않았다.


*


해가 진 뒤. 식당.


열두 명 중 열한 명이 자리에 앉았다. 김준영만 없었다.


긴 테이블에 열두 명분 자리가 세팅되어 있었다. 백색 리넨 테이블보. 은식기. 각 자리에 이름표. 서진의 자리는 테이블 중앙. 맞은편에 윤재하, 양옆에 이수아와 강다은.


좌석 배치까지 정해져 있었다.


의자를 당기자 양쪽에서 각각 다른 방식의 인사가 왔다. 이수아는 턱을 미세하게 끄덕이는 것으로. 강다은은 직접적으로 손을 내밀었다.


"강다은입니다. 기자예요. 한서진 씨, 탐정이시라고요? 나중에 인터뷰 좀 할 수 있을까요?"


"상황이 좀 정리되면요."


"아, 그건 안 되는데." 강다은이 수저를 내려놓았다. "기자는 상황이 정리되기 전에 움직여야 해요. 정리된 다음엔 늦거든요."


맞은편에서 윤재하가 와인잔을 가볍게 들었다. 식당에는 와인이 준비되어 있었다. 객실 미니 바에 주류가 없던 것과 대조적이었다. 잔을 들지 않았다.


요리가 나왔다. 누가 만들었는지 보이지 않았다. 주방 쪽에서 접시 부딪히는 소리만 간간이 새어 나왔다. 전복 크림수프의 진한 냄새가 올라왔다.


송민호가 숟가락을 들기 전에 수프를 들여다보았다. "와, 이거 레벨이 장난 아니네. 전복 크림수프에 트러플 오일? 이 조합 누가 짠 거야?"


이런 상황에서도 음식에 반응하는 놈이라니.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식사가 진행되며 대화가 시작되었다. 겉은 자기소개. 속은 탐색전이었다.


류지원이 부드럽게 제안했다. "이왕 모인 거, 돌아가면서 이야기합시다. 서로 이름이라도 알아야 하지 않겠어요?"


박도현이 불쾌한 표정을 지었지만, 반대하지는 않았다. 포크로 스테이크를 찌르는 힘이 필요 이상으로 강했다.


서로 돌아가며 이름과 직업을 밝혔다. 건설회사 대표. 외과의사. 유튜버. 대학원생. 전직 판사. 간호사. 변호사. 요리사. 은퇴 교사. 기자. 사설탐정. 열한 개의 직업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누군가 물 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났다. 창밖에서 바람이 유리를 훑고 지나갔다.


"다양하네요." 류지원이 수첩에 메모하며 말했다. "완전히 다른 분야의 사람들이에요. 접점이 없어 보이는데."


"접점이 없다고?" 백서연이 와인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우리를 한 곳에 모은 사람이 있잖아요. 그게 접점이죠. 문제는 왜 하필 우리 열두 명이냐는 거예요."


인과 사슬. 그 말이 포크와 나이프 사이를 떠돌고 있었다. 수프가 식어가고 있었다.


"각자의 죄라는 것." 정태호가 포크를 내려놓았다. 테이블 전체를 한 번 둘러보았다. "여기 있는 분들 중에, 자기 죄를 알고 있는 분이 있습니까?"


포크를 든 손이 멈추고, 와인잔을 기울이던 팔이 멈추고, 대화가 멈췄다.


열한 개의 얼굴을 읽었다. 하나씩.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누구도 "무슨 죄"라고 반문하지 않았다.


*


방에 돌아와 카드를 꺼내 침대 위에 놓았다.


'수술대 위의 손이 멈추었다. 살리지 못한 것이 아니라, 살리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그 손을 가려준 자가 있다.'


윤재하.


만찬 중의 그를 떠올렸다. 와인을 홀짝이며 여유로운 미소를 짓던 외과의사. 박도현이 분노할 때 차분하게 팔을 잡던 손.


저 여유가 진짜일까.


시선이 카드의 마지막 문장에 머물렀다. '그 손을 가려준 자.' 윤재하의 죄를 덮어준 누군가. 열두 명 안에 있나.


을지로 사무실의 잠긴 서랍을 떠올렸다.


그 손을 가려준 자.


카드를 주머니에 다시 밀어넣었다.


발코니 너머로 바다가 검게 출렁이고 있었다. 파도 소리가 방 안까지 올라왔다. 먼 곳에서 새 한 마리가 울었다. 이름 모를 새.


72시간의 첫 번째 밤이 시작되고 있었다.

월, 수, 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