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 커튼을 열기 전

by 유리사탕

카드키를 대면 초록 불이 켜지고, 잠금이 풀리는 소리가 난다. 딸깍, 하는 그 기계적인 소리가 호텔 복도에서 유난히 크게 울린다. 카펫이 깔린 복도는 소리를 흡수해서 발소리조차 나지 않는데, 그 속에서 문 잠금 풀리는 소리만 또렷하다.

문을 열고 한 발짝 들어서면 호텔방의 고유의 냄새가 느껴진다. 세탁된 시트의 냄새, 카펫의 냄새, 에어콘이 순환시킨 공기의 냄새, 그리고 그 아래 깔린 나무와 직물과 세정제의 냄새들. 모든 호텔 방은 비슷한 냄새가 나면서도 조금씩 다른데, 그 차이를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는거 같다.

다만 문을 여는 순간 코끝에 닿는 그 첫 공기가, 이곳이 내 집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려준다. 그리고 그것은 불쾌한 감각이 아니다. 오히려, 내 집이 아니라는 것에서 느껴지는 어떤 가벼움이 있다.


캐리어를 문 옆에 세우고, 코트를 침대 위에 던졌다. 코트가 스프레드 위에 떨어지면서 내는 푹, 하는 소리. 신발은 벗지 않았다. 호텔 방에서는 신발을 바로 벗지 않는 습관이 있다. 방을 한 바퀴 돌아보고, 화장실을 확인하고, 미니바를 열어보고, 창가까지 걸어갔다가 돌아와서, 그제야 침대 모서리에 앉아 신발을 벗는다. 이 순서가 바뀌면 어쩐지 불안한데, 그 이유를 스스로도 설명하지 못한다. 아마 낯선 공간에 나를 들여놓기 전에, 그 공간을 먼저 내 눈으로 훑어야 한다는 나만의 본능 같은 것일까.

신발을 벗으면 카펫의 감촉이 발바닥에 닿는다. 호텔 카펫은 대체로 짧은 모에 단단한 감촉인데, 이 방의 카펫은 조금 더 푹신한 편이었다. 발가락을 움직이면 카펫 올이 그 사이에 끼는 감촉이 느껴졌다.


침대에 앉으면 매트리스의 탄성이 몸을 받아들인다. 호텔 침대는 대개 내 침대보다 단단하다. 그 단단함이 등을 바르게 세워주는데, 집에서는 느끼지 못하는 자세의 차이를 여기서 발견한다. 시트는 팽팽하게 당겨져 있고, 이불 모서리는 매트리스 아래로 단정하게 밀어 넣어져 있다. 손가락을 시트 위에 대고 쓸어보면 면의 직조가 촘촘하게 느껴진다. 실 수가 높은 시트 특유의 매끄러움. 이 정돈된 상태가 나를 위해 준비된 것이라는 사실이, 이상하게 위안이 되는 밤이 있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도시에서, 이름 모를 누군가가 이 시트를 다리고 이 이불을 갠 것이다. 그 손길의 흔적이 팽팽한 시트의 주름 없음 속에 남아 있다.


커튼은 두 겹이었다. 안쪽의 얇은 레이스 커튼과 바깥쪽의 두꺼운 암막 커튼. 두 겹 모두 닫혀 있었고, 방 안에는 간접 조명만 켜져 있었다. 침대 머리맡의 조명이 베이지색 벽에 부드러운 원을 그리고 있었고, 욕실 쪽에서 새어 나오는 작은 빛이 복도에 길을 만들었다. 방 전체가 어둡지도, 밝지도 않은, 그 사이의 어딘가에 머물고 있었다. 커튼을 열면 이 도시의 밤이 보일 것이다. 하지만 열지 않았다. 아직은..

커튼의 천을 손으로 만져보았다. 두꺼운 폴리에스터, 그 안에 차광 코팅의 빳빳한 감촉이 섞여 있었다. 이 천 한 겹이 나와 바깥 세계 사이에 놓여 있다.


체크인 후 커튼을 열기 전까지의 시간을 좋아한다. 그 시간 동안 이 방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서울일 수도, 오사카일 수도, 방콕일 수도 있다. 커튼 너머에 어떤 풍경이 있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이 방은 세계 어디에든 존재할 수 있는 중립적인 공간이 된다. 침대가 있고, 탁자가 있고, 텔레비전이 있고, 옷장이 있는, 전 세계 어떤 호텔 방과도 교환 가능한 공간. 그 모호함이 일종의 자유를 준다. 창문 너머의 현실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나는 정해진 목적지에 도착한 사람이 아니라 아직 어딘가를 향하고 있는 사람일 수 있다. 여행의 가장 좋은 순간은 도착이 아니라, 도착하기 직전의 정지 상태일지도 모른다.


욕실에 들어가 세면대의 수도를 틀었다. 호텔 수도는 집의 수도와 수압이 다르다. 이곳은 세게 나왔다. 손에 닿는 물줄기가 살짝 아플 정도였고, 세면대의 대리석 위에 물이 튀었다. 물 온도가 따뜻해지기까지 시간이 조금 걸렸는데, 그 동안 거울에 비친 욕실을 둘러보았다. 타일의 색, 수건의 접힌 방식, 어메니티가 놓인 순서. 샴푸와 컨디셔너, 보디워시가 일렬로 놓여 있었고, 작은 보디로션 병이 그 옆에 세워져 있었다. 이런 것들의 배치에도 누군가의 매뉴얼이 있을 것이다. 비누는 직사각형의 작은 것이 종이 포장 안에 들어 있었다. 포장을 벗기면 종이가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비누 고유의 향이 올라오는데, 이 호텔의 비누는 유칼립투스에 가까운 시원한 향이었다. 손을 씻고, 얼굴을 씻고, 수건으로 물기를 닦았다. 수건은 두껍고 뻣뻣했다. 새 수건 특유의 까슬까슬한 감촉이 볼에 닿았다. 내 수건과 다른 냄새. 세제가 아닌 섬유유연제, 혹은 호텔 세탁실의 냄새. 거울 속의 내 얼굴은 여행의 피로가 약간 묻어 있었지만, 눈은 아직 깨어 있었다. 낯선 곳에서의 첫 밤은 늘 그렇다. 피로와 각성이 동시에 존재하는 상태로.


미니바에서 작은 생수를 꺼내 마셨다. 병뚜껑을 돌리면 플라스틱 고리가 끊어지는 짧은 소리가 난다. 차가운 물이 목을 타고 내려갈 때, 이 방에 도착했다는 감각이 몸 안에 자리 잡았다. 물을 마시는 것이 일종의 정착 의식인 셈이다.

침대에 다시 앉아서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텔레비전을 켜면 이곳이 어디인지 바로 알게 될 것이다. 채널의 언어, 뉴스 앵커의 얼굴, 광고의 분위기로. 아직은 그 고요함 속에 조금 더 있고 싶었다. 공조 소리만 낮게 흐르는 이 방의 정적. 복도에서 가끔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 엘리베이터가 이 층에 멈추는 소리, 옆방의 문이 닫히는 소리, 어디선가 텔레비전의 잔향처럼 들려오는 웅웅거림. 이 호텔에 나 말고도 사람들이 있다는 증거들이, 벽 너머에서 희미하게 전해진다.


창가로 걸어갔다. 커튼 앞에 서면 두꺼운 천 사이로 빛이 새어 들어온다. 도시의 불빛인지, 달빛인지, 가로등인지. 그 빛의 색으로 바깥 세계를 추측해본다. 주황빛이면 도심의 번화가일 것이고, 파란빛이면 바다가 가까운 곳일 것이고, 어두우면 산이나 들에 둘러싸인 곳일 것이다. 오늘 밤 커튼 사이로 새어 드는 빛은 푸른 기운이 감도는 하얀색이었다. 높은 층이라는 것은 엘리베이터에서 알았으니, 아마 도시의 스카이라인이 보일 것이다. 빌딩의 유리창에 반사된 불빛들, 먼 곳의 신호등, 도로 위를 흐르는 차량의 헤드라이트. 그런 것들이 있을 것이다. 상상 속의 풍경이 커튼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다.


침대 위에 잠시 누워보았다. 뒤통수가 베개에 닿는 감촉, 호텔 베개의 부피감이 집의 것과 달랐다. 좀 더 높고, 좀 더 단단한. 천장을 올려다보면 조명이 둥근 빛의 원을 만들고 있었고, 그 원의 가장자리는 점점 흐려지다가 어둠과 섞였다. 이 방에서 잠들면 어떤 꿈을 꿀까. 낯선 방은 낯선 꿈을 부르기도 한다.


커튼 끈을 잡았다. 아래로 당기면 커튼이 양쪽으로 갈라지며 풍경이 열릴 것이다. 손에 힘을 주기 전, 마지막 1초. 이 방이 아직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마지막 순간. 숨을 한 번 들이마시고, 천천히 끈을 당겼다. 커튼이 레일 위를 미끄러지며 잘그락, 소리를 내고, 천이 양쪽으로 갈라지며 유리창이 드러났다. 유리에 비친 내 얼굴이 잠깐 보였다가, 눈이 밖의 빛에 적응하면서 투명해져 사라졌다. 거기, 밤의 도시가 있었다.

토,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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