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발 세 시간 전. 탑승권을 발권하고, 짐을 부치고, 보안 검색을 통과하고 나면 남는 것은 시간뿐이다. 보안 검색대를 지나는 순간, 벨트를 다시 매고 신발을 다시 신고 가방을 다시 어깨에 올리면서, 몸이 한 단계 가벼워진 느낌이 들었다. 짐을 부쳤기 때문이기도 하고, 무언가를 통과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면세 구역의 긴 복도에 서서 전광판을 올려다보았다. 도시 이름들이 세로로 줄지어 있었다. 도쿄, 방콕, 싱가포르, 파리, 런던. 각 이름 옆에 게이트 번호와 탑승 시간이 표시되어 있었고, 내 항공편은 아직 게이트가 배정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 빈칸이 어쩐지 마음에 들었다. 아직 어디로 갈지 정해지지 않은 것 같은 착각을 주니까. 전광판의 글자가 한 번 깜빡이며 갱신되었지만, 내 항공편의 빈칸은 그대로였다.
공항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장소다. 출발지를 떠났지만 도착지에 닿지 않은, 사이의 공간. 출국 심사를 통과한 순간부터 비행기에 오르는 순간까지, 나는 어떤 나라에도 있지 않다. 여권은 가방 안에 있고, 발 아래의 땅은 아직 이 나라의 것이지만, 법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이미 떠난 상태. 이 애매한 위치가 주는 자유로움이 있다. 아무 데서도 연락이 오지 않을 것이라는, 아무도 나를 찾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물론 와이파이는 터지고 폰은 작동하지만, 그래도 이곳에서의 부재는 면죄부 같은 것이다. 공항에 있어요, 라고 말하면 대부분의 요청은 멈춘다. 그것은 비행기를 타지 않아도 누릴 수 있는 여행의 혜택이다.
면세점을 지나갔다. 향수 코너에서 올라오는 냄새가 공기 중에 무겁게 떠 있었다. 수십 가지 향이 뒤섞인 것인데, 개별 향을 구분할 수는 없고 전체가 하나의 면세점 냄새를 이루고 있었다. 달콤한 것과 화한 것과 나무 같은 것이 겹쳐진, 공항에서만 맡을 수 있는 고유한 향. 진열대의 조명은 밝고 균일해서 모든 것이 반짝거렸다. 유리 표면, 금속 뚜껑, 액체가 담긴 병의 곡면에서 빛이 반사되었다. 시향지를 뿌려주는 직원의 손목에서 다른 향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지나쳤다. 오늘은 아무것도 사고 싶지 않았다. 사는 것은 도착 후의 일이다. 지금은 그냥 걷고 싶었다. 면세점의 밝은 조명 구역을 지나면 복도의 빛이 한 톤 낮아지는데, 그 경계를 넘을 때마다 눈이 살짝 편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게이트 근처 좌석에 앉았다. 공항 의자는 어디에서나 비슷하다. 금속 프레임에 검은 가죽 혹은 인조가죽, 팔걸이가 좌석을 나누고 있어 눕지 못하게 한다. 등받이 각도는 살짝 뒤로 기울어져 있지만 편안하다고 할 수는 없는 각도. 이 의자는 잠을 자라고 만든 것이 아니라 기다리라고 만든 것이다. 앉으면 엉덩이가 차가운 것이 먼저 느껴지고, 등을 기대면 셔츠 너머로 금속의 단단함이 전해진다. 팔걸이의 스테인리스에 손을 올리면 차갑고 매끈한 감촉. 수천 명의 손이 닿은 자리인데도 늘 차갑다. 하지만 이십 분쯤 지나면 체온이 의자를 데우고, 엉덩이 아래의 가죽이 몸의 형태로 살짝 눌리고, 그때부터는 나쁘지 않다. 바로 내 자리가 만들어지는 시간이다.
안내 방송이 울린다. 영어와 한국어가 교대로 흐르는데, 내 항공편이 아니어서 단어가 의미를 잃고 소리로만 남았다. 여성의 목소리, 일정한 높낮이, 마지막에 올라가는 억양. 게이트 번호와 탑승 시간이 숫자로 들리다가 사라진다. 그 리듬이 공항의 배경 음악 같았다. 방송 사이사이에 다른 소리들이 채워졌다. 캐리어 바퀴가 대리석 바닥을 구르는 소리, 구두 굽이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 아이의 웃음, 멀리서 들려오는 커피머신의 증기 소리, 면세점 방향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의 잔향. 이 소리들이 겹겹이 쌓여 공항의 소리 풍경을 만든다. 소란하지만 소란하지 않은, 흰 소음에 가까운 것. 귀가 하나의 소리에 집중하지 않고, 전체를 하나로 받아들이는 상태.
창밖으로 활주로가 보였다. 거대한 비행기들이 줄을 서 있었고, 그 사이로 작은 차량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짐을 싣는 차, 급유 차량, 견인 트럭. 형광 조끼를 입은 사람들이 비행기 아래에서 손짓을 하고 있었다. 이 풍경에는 소리가 빠져 있었다. 두꺼운 유리창이 엔진 소리와 바람 소리를 차단하고 있어서, 눈에 보이는 것은 분주한데 귀에 들리는 것은 고요했다. 무성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비행기 하나가 활주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느리게, 점점 빨라지다가 앞바퀴가 들리는 순간이 보였다. 지상에서 떨어지는 그 순간. 보고 있으면 언제나 비현실적이다. 저렇게 큰 것이 뜬다는 것이. 기체가 기울며 방향을 틀자 날개 아래로 도시의 풍경이 작아졌다. 삼십 초 만에 비행기는 점이 되었다.
커피를 사왔다. 공항 커피는 밖과 특별히 다른게 없지만, 공항에서 마시는 커피에는 다른 가치가 있다. 기다림의 동반자. 종이컵을 손에 감싸 쥐고 자리로 돌아와 다시 창밖을 보았다. 컵의 열기가 손바닥에 전해지고, 뚜껑의 구멍에서 김이 올라왔다. 커피의 김이 올라오면서 뚜껑 위에 작은 물방울을 맺혔다. 한 모금 마시면 뜨거운 것이 먼저이고, 맛은 그다음이다. 이 시간에는 맛보다 온도가 중요하다. 손을 따뜻하게 해주고, 뱃속에 무게를 만들어주고, 입 안에 무언가가 남아 있다는 감각을 주는 것.
주변 사람들을 보았다. 공항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어딘가로 가는 중이거나, 어딘가에서 온 중이다. 맞은편 좌석에 앉은 여자는 책을 읽고 있었는데, 몇 분째 같은 페이지에 머물러 있었다. 읽는 것이 아니라 책을 펼쳐 든 상태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리라. 손가락이 페이지 모서리를 무의식적으로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옆 좌석의 남자는 노트북을 열어 무언가를 타이핑하고 있었고, 키보드 소리가 그의 주변에만 작은 영역을 만들고 있었다. 가족 단위의 일행은 아이에게 과자를 주며 시간을 달래고 있었는데, 아이의 입 주변에 과자 부스러기가 묻어 있었다. 모두가 같은 시간을 기다리고 있지만, 그 기다림의 내용은 저마다 다르다. 만남을 기다리는 사람, 출장을 앞둔 사람, 돌아가는 사람, 떠나는 사람. 그 모든 기다림이 이 공간에 겹쳐져 있다.
해가 기울면서 활주로의 빛이 바뀌었다. 낮의 하얀 빛이 물러가고, 활주로 유도등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다. 파란색과 흰색의 줄이 활주로 양옆에 길게 이어졌고, 비행기의 날개 끝에서 빨간 불과 초록 불이 번갈아 깜빡였다. 공항은 밤이 되면 더 아름다워진다. 이상한 말이지만, 콘크리트와 철과 유리로 이루어진 이 기능적인 공간이 밤의 불빛 아래서 어떤 낭만을 갖는다. 활주로의 불빛 줄이 먼 곳까지 이어지다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풍경은, 끝을 알 수 없는 길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유리창에 실내의 빛이 반사되기 시작해서, 창 밖의 풍경과 창 안의 내 모습이 겹쳐 보였다. 활주로 위에 내 얼굴이 떠 있는 이상한 합성.
전광판에 게이트 번호가 떴다. 내 항공편 옆에 숫자가 채워지는 것을 보았다. 빈칸이 채워지는 순간, 이 시간이 끝나고 있었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이 기다림의 시간이. 커피를 마저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캐리어 손잡이를 올리면 바퀴가 돌아가면서 바닥에 작은 마찰음을 낸다. 게이트를 향해 걷기 시작하면 안내 방송이 다시 울린다. 이번에는 내 항공편이었다. 탑승이 곧 시작됩니다. 줄이 길어지기 전에 게이트 앞에 도착했다. 유리창 너머, 내가 탈 비행기가 보였다. 날개 아래 불빛이 켜져 있었고, 탑승 브릿지가 연결되어 있었다. 여기서 저기까지, 짧은 복도 하나를 지나면 다른 곳으로 가는 시간이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