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서른, 그러다 마흔

[Part1] 5화. 같이 걸었던 길을 혼자 걷는 법

by 유리사탕


비가 온 다음 날은 공기가 다르다.


축축하고, 깨끗하고, 어딘가 낯설다. 익숙한 길인데 처음 걷는 것 같은 기분. 헤어지고 나서 알게 된 건, 이별 이후의 세상도 그런 거라는 것이었다. 똑같은데 다른. 다른데 똑같은.


스물넷, 첫 연애가 끝났다.


길었다고 하기엔 짧고, 짧았다고 하기엔 꽤 많은 것이 바뀌어 있었다. 일 년. 그 시간 동안 나는 혼자 먹던 밥을 둘이 먹는 사람이 됐고, 영화를 보면 옆자리를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고, 잠들기 전에 "잘 자"를 보내는 게 하루의 마지막 루틴이 됐다.


그런 것들이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이별은 갑자기 온 게 아니었다. 돌이켜보면 신호는 있었다. 대화가 줄었고, 웃는 횟수가 줄었고, "오늘 뭐 했어?"가 "아, 그래"로 바뀌었다. 나는 그게 편해진 거라고 생각했다. 편해진 게 아니라 멀어지고 있었다는 걸, 사람은 늘 나중에야 안다.


"우리, 여기까지인 것 같아."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놀라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마음 어딘가에서 이미 준비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붙잡지 않았다. 울지도 않았다.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라는 말이 입에서 나왔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집에 돌아와서도 울지 않았다.


다만 할 일이 없었다. 저녁 아홉 시. 평소라면 전화를 하거나 메시지를 보내고 있을 시간인데, 손이 핸드폰에 갔다가 돌아왔다. 텔레비전을 켰다가 껐다. 냉장고를 열었다가 닫았다. 채울 수 없는 시간이 거기 있다.


이별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비어지는 거였다.


며칠 후, 우연히 그 길을 걸었다. 둘이 걷던 골목. 벚꽃이 피면 사진을 찍고, 눈이 오면 발자국을 남기던 길. 나는 그 길을 혼자 걸었다. 걸음이 빠르다. 예전엔 그 애 보폭에 맞추느라 천천히 걸었는데, 혼자가 되니 원래의 속도로 돌아왔다.


그게 좀 쓸쓸했다.


누군가에 맞추느라 느려졌던 걸음이 원래의 나였다는 걸, 이별이 알려줬다. 함께라는 건 속도를 바꾸는 일이었구나. 보폭을 맞추고, 방향을 조율하고, 가끔은 멈춰 서서 기다리는 일. 그걸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편하기도 하고 허전하기도 하다.


한 달쯤 지나서 괜찮아졌다.


정확히 말하면, 괜찮은 척이 자연스러워졌다. 친구들이 물으면 "응, 뭐, 괜찮아" 하고 넘겼다. 술자리에서 누가 연애 얘기를 해도 웃을 수 있게 됐다. 새벽에 깨는 횟수가 줄었고, 핸드폰을 보는 횟수도 줄었다.


잊은 건 아니었다. 익숙해진 거다.


사람은 부재에도 익숙해진다. 빈자리가 원래 비어 있던 자리처럼 느껴지기 시작하면, 이별이 끝나가는 거다. 그 과정에 이름을 붙이자면 아마 '성장'이 아니라 '적응'일 것이다. 스물넷의 나는 성장할 만큼 어른이 아니었다. 다만 적응할 만큼은 젊었다.


지금도 그 길을 가끔 걷는다.


벚꽃이 피면 걷고, 눈이 오면 걷는다. 혼자. 그런데 이제 그게 외롭지 않다. 내 보폭으로, 내 속도로 걷는 것. 그것도 나쁘지 않다는 걸 알게 됐다.


첫 이별이 가르쳐준 건 그런 거였다.


함께 걷는 법이 아니라, 다시 혼자 걷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