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신년 목표를 세우며
나도 원래는 '생산적'이라는 수식어에 질색하는 낭만종자였다. 지금도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내 인생을 '생산적'이라는 차갑고 무시무시한 언어로 수식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단 돈 몇푼이라도 매달 벌면서 자살하지 않을 정도의 정신 상태를 유지하려면 싫어도 '생산적'이 되어야 하는 세상에서 나는 살고 있다. 나라고 뭐 처음부터 좋아서 루틴만들기를 비롯한 각종 자기계발에 몰두한 건 아니다.
내가 굶어본 적 없는 세대인 것도 맞고 요즘은 돈이 없어도 소위 가성비템이 많아서 생활에 큰 불편은 없다. 그렇지만 나는 '굶어본 적은 없지만 언제 굶을 지 모르는 세대'다. 내 경우 수입이 적은데 매달 월세를 내다간 돈도 모으지 못하고 평생 내 공간을 갖지 못할 것이 두려워 전세로 갔다가, 그 전세금조차 지켜지지 못하는 세상인 것을 깨닫고 빚을 내어 30년된 빌라를 샀다. 요즘은 이런 낡은 빌라조차 고작 1년 전 내가 샀던 돈으로는 살 수 없고, 그 돈으로는 반지하도 겨우 살 수 있을까 말까 하다. 내가 집을 사기 전에 살았던 (서울 중심가의 직장과 비교적 가까운) 1억짜리 전세 매물은 아예 찾아볼 수도 없다.
일자리는 또 어떤가. 2015년인가 16년인가 졸업하고 보니 인문+예술 계열의 전공자가 갈 만한 사무직 일자리가 하나도 없었다. 전공을 살려 업계로 들어가자니, 업계 자체도 매우 불황이고 연봉도 적은데다 인력이 고인물로만 돌아간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았기에 쉽지 않았다. 신입을 뽑는 곳이 없었다. '신입 혹은 경력'을 적어놓고 낮은 연봉을 감당할 수 있는 경력이 지원하면 경력을 뽑는 식이었다. 사실 내가 사장이어도 그럴 것 같다. 조금만 돈을 보태면 이미 업무에 익숙하고,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것이 보증된 경력을 쓸 수 있는데 왜 신입을 뽑겠는가? 더군다나 닳고 닳은 경력자들은 시키면 네~하는데 요즘 90년대생이란 것들은 노동법에 그렇게 관심이 많다. 내가 종사하는 우-아하고 고상한 문화예술 업계에는 대기업 규모의 회사가 없다보니 중소기업의 기준에서 얘기하자면, 회사가 신입을 뽑는 경우는 딱 하나다.
공짜로 쓰다가 버릴 수 있을 때.
업계에 따라 다르겠지만 요즘은 이런저런 정부 지원금이 많아서 아주 싼 값에 신입을 고용할 수 있다. 잘은 모르지만 들은 얘기로는, 정부의 취업지원 프로그램과 연결해 신입을 뽑으면 그 월급의 많은 부분을 정부 지원금이 감당하는 식이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안그래도 아둥바둥하는 회사들이 신입을 뽑을 이유도 없고 뽑지도 않는다나. 내 업종은 신입자리가 다른 업종보다는 많은 편인데 그 이유는 하나다. 없다고 회사가 안돌아가는 건 아니지만 다른 돈 많은 업계들에서 한다니 본인들도 해보고 싶은 자리를 하나 만들어서 그 자리에 그런 공짜 신입을 뽑는 거다. 그 자리에서 오래 버티기는 쉽지 않다. 사장의 비위를 잘 맞추었거나 타업계 동향을 얕게 파악해 이런저런 것들을 시도한 덕에 사장의 허영심을 충족시킨 경우가 아니고서는, 길게 버텨봤자 정부 지원금 기간이 끝나는 기간까지 겨우 버틴다. 그리고 보통은 퇴직금을 정산해줘야 하는 시기가 오기 전에 압박을 줘서 내보내는데, 이 경우도 운이 좋은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요즘은 이렇게 질나쁘고 먹튀하는 '공짜 자리'를 연결시켜주는 취업 프로그램에 합격하는 것도 쉽지 않아졌다. 내가 취업준비를 할 때도 그 프로그램에 합격하기 위해 재수, 삼수를 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로 들어가기 쉽지 않았지만 요즘은 지원자가 더 많아졌다고 한다. 전반적으로 취업이 되지 않으니 내 업계의 전공과는 아무 상관없는 졸업 예정자들도 일단 '일자리'를 목표로 지원하는 것이다.
만 5년 넘게 회사생활을 하고 이제 겨우 대리급인 나는 매달 안정적인 월급을 받지만 좋은 차나 서울 아파트는 꿈도 꾸지 않는다. 그저 서울에서 간신히 생존하는 이 삶을 살기 위해 나는 학창시절 밤잠을 아껴가며 공부하고, 20대를 아둥바둥하며 보냈던 것이다. 그러나 내 뒤의 세대들은 이 최소한의 안정을 획득하기가 더 어렵다는 것을 알기에 내가 힘들게 살아왔다 내세울 수도 없다. 지금도 뭐라도 하나 더 배우고 건강을 유지하지 않으면 이 자그마한 안정조차 언제 사라질 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마음 속 깊은 곳에 무겁게 자리하고 있다. 잘 달래지 않으면 점점 커지고 커져 우울증을 비롯한 각종 정신적 문제를 일으키는 불안이다.
이 불안은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는 것으로 겨우 달랠 수 있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생산적으로 살 수 밖에.
삶의 신비와 낭만은 일단 다음 생으로 미뤄두고 내 정신건강을 위해 올해는 200일 이상의 생산적인 날을 보내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생산적인 날이라고 하지만 사실 대단한 건 없다. 아래의 3가지 중 2가지라도 하면 생산적인 날로 치기로 했다.
1. 영어공부
영어공부는 일단 토익 기출보카를 다 외우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토익은 텝스나 토플에 비해 높은 점수를 받기 쉽지만 그만큼 실생활이나 비즈니스에 쓰이는 기본 단어들이 많이 쓰인다. 처음엔 아무 생각없이 익숙하고 만만하다는 이유로 토익 보카 책을 사서 공부했는데 여기 나오는 단어들이 미드를 볼 때 계속 귀에 꽂히는 것을 보고 생각이 달라졌다. 아직 책의 1/4도 공부하지 못했고 사실은 벌써 지루해져서 그만두고 싶었지만 생산적인 루틴을 만드는데 '100일'이라는 시간 제한을 둔 턱에 며칠 쉬다가 '그래도 100일은 채워야지' 하면서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아예 '1년에 200일'이라는 제한을 걸어놓는다면 중간에 포기하고 싶어져도 '200일은 채워야지' 하는 마음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2. 글쓰기
매일의 글쓰기는 정말 내 정신건강을 위해 하는 일이다. 나는 글을 씀으로써 잠깐이라도 회사원으로서의 나자신을 버리고, 회사의 이익이 아닌 다른 것들을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갖는다.
3. 운동
몸 건강을 위해 하는 운동에는 내 몸을 바늘 구멍같은 사회적 미의 기준에 끼워맞추고자 하는 허영심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특정한 사이즈의 몸은 이 세상에서 노력해서 가질 수 있는 몇 안되는 것 중 하나다. 나는 확실히 가질 수 있는 한 가지를 완전히 포기할 수 있을 만큼 많은 것을 가지지 못했기에, 이거 하나만은 추구하려 한다. 물론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도덕적 부채감이 없는 건 아니지만 내가 어린 시절부터 깊이 박혀온 걸 제거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이렇게 제도에 순응한 평범한 직장인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영어공부, 글쓰기, 운동.
2022년의 내 목표는 이 세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내년에는 자격증에 도전해볼까, 하는 생각까지 어느새 하고 있는 걸 보니, 의욕이 차고 넘치는 연초이긴 한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