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보통인 서른 한 살의 뜬금없는 인생정산
올 한 해도 거의 절반이 갔다. 생산적인 삶을 살겠다는 올 초의 결심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나는 당장 손에 잡히는 즐거움들만을 좇으며 되는대로 살았다. 새로운 물건, 새로운 취미, 새로운 사람. 영원하지 않을 것들로 시간을 욕심껏 채우며, 석달 넘게 책도 읽지 않고 기록도 하지 않고 자기계발 비스무리한 것도 하나도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후회하지는 않는다. 지난 석 달, 내 인생 그 어느때보다 나는 현재에 충실했다. 되돌아보면 내가 열심히 글을 쓰거나 책을 읽고 기록을 남기거나 자기계발을 하던 때에 나는 현재에 만족하지 못했다. 외로웠거나, 현 상황에 만족하지 못하거나, 아무 이유없이 우울한 시기에 나는 무언가 열심히 했던 것 같다.
독립해서 월 200만 안정적으로 벌고 저녁이 있는 삶을 살 수 있다면 어느 정도 만족할 것 같아.
취업준비에 한창이던 24살의 나는 이런 생각을 했었다. 그건 내가 살면서 가져본 가장 누추한 소망이었고, 내가 살면서 그려본 미래중 가장 소박한 것이었다. 어떤 마지노선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자살하지 않고 계속 살아갈 수 있는 삶의 마지노 선'. 그게 월 200대를 벌며 어느 정도 자유시간이 있는 삶이었다. 물론 그 때에도 서른이 넘어서까지 월 300을 못 벌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지금 나는 내 삶에 만족하는가?
24살 때의 작은 소망을 이룬 지금의 나는 이 질문 앞에서 작게나마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불행하지 않다. 우울하지 않다. 이따금씩 아주 행복하고 이따금씩 사소한 것에 분노하지만 감정의 오르내림이 크지는 않다. 매일 사람들과 대화하고 주기적으로 연락을 나누는 이들이 있으며 가족과도 2주에 한 번은 만난다. 연애는 할 때도 있고 안 할 때도 있는데, 누군가 한 번 만나기 시작하면 최소 6개월은 지속되는 어느정도 건전한 관계를 만든다. 평범하디 평범한, 보통의 삶을 나는 지금 살고 있다. 만약 20대 초반의 야망에 가득찬 내가 지금의 미래를 봤다면 절망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했을 거다. 내가 뭐라고, 참. 그때는 나자신에 대해 기대하는 게 많았고, 조금은 내가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내게 있어 어른이 된다는 건, 나 자신이 객관적으로 남들보다 크게 우월하거나 특별하지 않은 평범한 사람이라는 걸 받아들이는 과정이었다. 이런 말을 6개월 정도 만났던, 본인이 아주 똑똑하다고 믿었으며 실제로도 꽤 머리가 좋았던 전 애인에게 한 적이 있다. 그는 내게 이렇게 되물었다.
도대체 무슨 근거로, 너 자신이 그렇게 특별하다고 생각했어?
그 질문 앞에 나는 한없이 작아지고 말았다. 그걸 한 번도 그렇게 객관적으로 분석해보려고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 나는 그 작업을 해보려고 한다.
내가 특별하다고 믿었던 이유들은 아래와 같다.
1. 똑똑함
나는 내가 똑똑한 편이라고 믿었다. 어릴 때부터 항상 똑똑하다는 소리를 들었고, 학교 성적도 좋았기 때문이다. 특히 학교 성적이 내 착각을 더욱 단단히 한 것 같다. 나는 가난한 지방 소도시에서 배치고사 1등으로 중학교에 입학해 쭉 전교 1,2등을 다투다 특목고에 진학했다. 고등학교 내신이 별로였던 건 다른 학생들이 목동으로, 강남으로, 저녁마다 엄마 차를 타고 비싼 과외를 받으러 가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게 아예 근거없는 핑계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느 정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실이기 때문에 시골 중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내던 것 역시 내 똑똑함의 증거로는 부족해진다. 왜냐하면 그 가난한 도시에서는 대학 나온 부모를 가진 아이 자체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환경은 정말 중요하다. 아무리 말로만 공부하라고 부모가 잔소리를 해도, 부모가 책상에 앉아 무언가 집중하거나 책을 읽는 걸 본 적 없는 아이들이 무슨 수로 공부를 하겠는가? 차곡차곡 지식을 쌓아나가는 즐거움을 집에서 배우지 못한 아이들이 암만 학원을 다니고 과외를 받는다고 어떻게 스스로 공부에 재미를 느낄 수 있겠는가? 만약 내 부모님이 다른 아이들의 부모님처럼 대학교육을 못받고 몸 쓰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었다면 나는 정말 똑똑한 아이였을 수 있다. 하지만 내 부모는 책상에 앉아 집중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은행의 대출서류 앞에서는 '농부'와 동급으로 분류되는 직업이었지만, 직업 세계의 대분류에서는 '지식인'으로 분류되는 이상한 직업, '작가'였으니까. 중학교 동기들 부모의 직업은 엘리트여봤자 그 지역 공무원이었고, 돈을 많이 벌어봤자 삼겹살집 사장이었다. 포주나 그 포주에게 고용된 자, 무당 같은 흔치 않은 직업도 있었다. 그들의 자식들 사이에서 대학나온 작가 부부의 딸이 공부를 잘하는 건 너무나 당연했다. 물론 대학을 나오지 않은 부모들도 교육열은 대단해서, 먹고살 형편만 되면 학원이니 과외니 아낌없이 투자하기는 했다. 나는 사교육을 전혀 받지 않고 혼자 공부했기 때문에 내가 다른 아이들보다 우월하게 똑똑하다고 믿었던 것 같다. 하지만 사교육이 결코 이길 수 없는 '가정 환경의 차이'를 십대의 나는 간과했었다.(아 정정, 지방 소도시에서 가능한 사교육이 이길 수 없는, 이 더 맞는 것 같다.)
2. 예술적인 취향
어릴 때부터 항상 집에는 인쇄된 것이나마 감각적인 미술작품들이 장식돼 있었고 세계 각국의 훌륭한 그림책들과 동화책들을 읽고 자랐다. 소위 '작품성 있다'고 평가되는 국내외 영화들을 부모님과 함께 수없이 보았으며 중학교 입학선물로는 민음사의 세계문학전집 전종을 받았다. 내 컴퓨터도 내 휴대폰도 없어서 주구장창 책만 읽었다. 컴퓨터가 없다보니 포르노를 접할 곳이 없어 세계문학전집이 가장 자극적인 콘텐츠였다. (물론 어떤 측면에서는 문학이 급조된 영상물보다 더 야할 수 있다.) 화가, 작가, 영화감독... 보고 자란게 그런 것 뿐이니 장래희망도 항상 예술 쪽이었다. 그게 아닌 다른 삶은 상상할 수 없었다. 어릴 때는 부모님의 취향에 영향을 많이 받다가 내 컴퓨터가 생긴 중학교 중반 부터는 내 예술적 취향이 부모님을 앞서 나갔다. 도시에 살지 않는다는 열등감 때문에 최신 예술, 문화에 굉장히 민감해서 서울의 소위 '예술적인' 20,30대가 향유하는 취향을 따라가고자 발버둥쳤다. 바야흐로 미국 힙스터 문화 전성시대였던 2000년대 중 후반, 나는 부족한 영어실력으로 피치포크 미디어(지금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 당시 인디음악 비평이 실리던 미국 웹진이었다.)를 뒤적거리며 온갖 음악을 찾아 들었고 그 취향에 딥하게 몰두해 서울사는 30대 직장인들과 예술전공 대학생 등등으로 구성된 음악 동호회 활동도 했다. 서울에 사는, 교육받은, 소위 강남 좌파들 중에서도 예술적인 부류의 취향을 나는 동경했다.
3. 정치적인 '취향'
이것 역시 2번과 이어진다. 강남좌파의 예술적 취향에 깊게 몰두하다 보면 결국 자본주의 비판에 직면한다.(고전문학도 마찬가지다.) 상업적이지 않은 '인디 음악', 상업적이지 않은 '인디 영화'. 그 향유자들과 생산자들이 읽는 인문학 서적을 찾아읽다보면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발터 벤야민이니 들뢰즈 같은 사람들이 무슨 소리를 한건지 궁금해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철학서에 손이 가고, 그게 어려우니까 입문자를 위한 교양서에 손이 간다. 그러다보니 어째선지 강남좌파의 힙함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철학과 굴뚝 청소부>같은 책까지 읽게 되는 것이다. 나는 그냥 멋들어진 이름의 외국 철학자 이름을 읊으며 잘난척을 좀 하고 싶었을 뿐인데 어느 순간 마르크스 어쩌고를 논하고 있는 '반자본주의자'들의 모임에 풀메이크업을 하고 참석해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냥 모든 것에 대한 반항이자 예술가 행세를 하기위한 수단으로의, 나이브한 반자본주의자 워너비였던 나는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발을 빼기엔 너무 늦어버렸고, 비대한 자아만큼 부풀려놓은 나의 고오급진 음악취향으로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데모용 행진곡을 따라부르며 현실 자각 타임을 가졌다. 그러나 이미 다른 종류의 '정치적 취향'을 갖기엔 너무 세뇌되어 버린 후였다. 내가 20대 전반을 세뇌되어 있던 이런 '정치적 취향'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건 소위 '미투운동' 덕분이었던 것 같다. 대학시절에도 예술계의 온갖 더러운 이모저모를 봐왔고, 공감능력이니 인권이니 자본주의 전복이니를 외치던 고결한 아저씨들의 로맨스 타령이 나에게만 더럽게 느껴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그 더러운 로맨스 타령의 희생자가 되지 않았던 것은 순전히 먼저 문화예술계에 발을 담그고 있었던 내 부모 덕이었지 내가 다른 여자애들보다 특별히 더 '순수'(우웩)하거나 '정숙'(우웨에에에엑)한 여성이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남자에게 성적으로 인식된다는 게 뭔지 잘 모르는 진짜 '순수하고 순진한' 여자애들이 희생양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뭔가 이상하고 싫은데 상대의 권위와 같잖은 로맨스 타령에 휘둘려 장난감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당한 여자애들 일부는 흑화해 여러 남자를 갖고 노는 팜므파탈이 되는 경우도 있었으나, 아마 지금은 다 강성 페미니스트가 되어있지 않을까 싶다.
어떻게 생각하면 내 30년 인생의 대부분은 치기 어린 사춘기였다. 지금의 나는 수입도 적고 자산도 적은 주제에 자본주의에 완벽히 사육된 '깨어있지 못한 자'이며, 한 때 자부심을 가졌던 예술적 취향은 대부분 잊어버렸고, 업데이트 또한 점점 느려지다 2016년 경에 완전히 멈춰버렸다. 가까운 친구들에겐 사랑받는 편인데 유일한 매력은 백치미인 것 같고. 부족하고 평범하기 짝이없는 나지만 스스로를 귀여워하며 되는대로 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