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타공인 취미 부자다. 국민 아재 취미인 등산부터 소녀취향 키덜트 취미의 정점인 디즈니 베이비돌 모으기까지, 유행했던 취미 중 재밌어 보이는 건 죄다 한번씩은 푹 빠져본 전력이 있다. 국민체조도 제대로 못따라하는 몸치인 주제에 발레나 폴댄스처럼 고난이도 댄스에 도전하거나, 내 이름 석자도 똑바로 못쓰는 똥손 주제에 프랑스 자수에 도전한 적도 있다. 다행히 '몸쓰는 취미'는 등산에, '손쓰는 취미'는 레진아트에 정착한지 오래다. 지금은 허공에 돈을 흩뿌리고 다니던 취미 유목민 생활은 청산하고 매달 소소한 돈과 시간을 취미로 소모하는 건전한 취미생활인이 되었다.
취미를 '취미'로 이어나가기 위한 몇 가지 조건이 있다. 우선 취미를 유지할 만한 최소한의 돈벌이가 있어야 하고, 취미에 소모할 만한 최소한의 여유시간 또한 있어야 한다. 이 두가지가 없는 사람은 애초에 취미 따위를 가지겠다는 사치스러운 생각조차 하지 못할 테니, 언급할 필요도 없겠다. 사실 이 두 가지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지금 내가 가장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있는 두 가지 취미, '등산'과 '레진아트'는 이 중요한 조건을 슬플 정도로 완벽하게 충족시킨다. 등산을 예로 들어보자. 몸 움직이는 데 있어 나는 사지가 멀쩡한 게 부끄러울 정도로 최악의 능력치를 보유하고 있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태어나서 단 한번도 달리기에서 꼴찌를 안해본 적이 없다. 학창시절 공을 던지거나 무언가 맞히거나 하는 체육 실기시험들에서도 단 한번도 0점을 면해본 적이 없다. 과장도, 농담도 아닌 진짜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학창시절까지는) 몸은 유연한 편이었다는 것 정도? 이렇게까지 몸쓰는데 능력치가 낮다면 최소한 대단한 미인이거나, 아니면 다른 어떤 분야에서는 천재적인 재능을 가져야 공평한게 아닌가 싶어 어디 하나 잘난데 없는 나 자신이 부끄럽고 원망스럽기도 했다.
레진아트로 말할 것 같으면, 몸쓰는 것 만큼은 아니지만 손재주에도 자신이 없는 편이라 언제나 마감이 허술하다. 그나마 다른 수공예 취미에 비해 레진아트는 이미 만들어진 실리콘 몰드에 조색한 레진을 부어놓고 굳히는 게 주 과정이라 간단한 편이다. 자수나 그림그리기만큼의 섬세한 손재주가 필요하지는 않다. 재료빨도 한 몫 하는 분야라 기포가 덜 생기는 레진과 흠없는 몰드를 사용해 천천히만 작업하면 눈살 찌푸려지지 않을 정도의 결과물은 나온다. 다만 판매가 가능할 정도로 매끄럽게 마감하려면 그때부터는 진짜 손재주 싸움이라, 나같이 손재주 없는 사람은 주변에 나눠주는 수준으로 만족해야 정신건강에 좋다. 이 분야 역시, 손재주의 한계 덕에 죽었다 깨어나도 판매로는 연결되지 않기 때문에 '취미'로서 영원히 유지될 수 있겠다. 그리고 재능없는걸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또 하나의 장수 취미기 있었으니. 그건 바로 '자기계발'이다.
자기계발이란 뭘까? 우아하게 말하면 자신을 갈고 닦아 성장시키는 일일거다. 물론 SNS를 가득 채운 자기계발인들은 이미 충분히 잘났으면서 더 잘나지고자 고군분투하는 욕심쟁이들로밖에 안보이지만 말이다. 내가 하는 자기계발은 이런 잘난사람들의 자기계발과는 아주 거리가 멀다.
과식과 야식하지 않고 적당한 체중 유지하기
영양제와 채소 챙겨먹기
매일 속눈썹 영양제 바르기
제때 빨래하고 청소해 생활의 질 유지하기
돈이 되든 안되든 그나마 할 줄 아는거(글쓰기) 꾸준히 하기
부지런한 사람이라면 당연한 일상인 이 정도도 내게는 자기계발이다. 여기에 의욕이 넘치는 시기에는 영어공부나 헤어와 네일 관리 등의 몇가지가 더 추가되기도한다. 언제나 연초가 되면 올해는 꽉 채워 의욕적으로 살아 자기계발 여신으로 재탄생하겠다 결심하지만, 한 해를 정산해보면 절반 정도는 열심히 살고, 절반 정도는 아무 생각없이 허비한 경우가 많았다. 입시공부가 전부였던 고등학생 때도 주말은 꼭 챙겨 놀았으니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그렇다보니 매일 새벽 4시반에 일어나고 언제나 새로운 도전을 하는 김유진 변호사 같은 사람들을 보면 그저 존경스럽고, 너무 아득히 멀어 질투조차 나지 않는다. 그런 슈퍼맨들이 있어 나같이 평범한 게으름뱅이들의 귀여움이 더욱 돋보이는 것 아닌가! 하고 주장해본다. (원래 치명적인 귀여움의 필수 조건은 '하찮음'인 법.)
올 초의 의욕만땅 시기 이후 곧바로 자기계발 정체기에 진입해 반년을 놀고난 지금, 나는 또 '자기계발 라이프'를 시작하려한다. 몸에 나쁜 것 하지 않고 매일 글을 쓰고 빨래와 설거지를 미루지 않는 정도지만, 그조차 내게는 굉장한 자기계발이다. 수없이 실패를 반복하며 우당탕탕 살아왔지만 오늘도 나는 포기하지 않고 나의 오랜 취미인 자기계발을 시작한다.
눈을 감고 '열심히 살며 스스로를 성장시키는 나'를 상상한다.
집을 항상 깨끗히 유지하는 나. 매일 그린스무디로 식이섬유와 비타민을 보충하고, 깔끔히 정리된 손톱을 갖고 있는 나, 삶을 아무렇게나 흘려보내지 않고 소소한 일상이나마 꾸준히 기록으로 남기는 나. 지금보다 영어를 잘하는 나(그나마 오래배운 외국어가 영어이기 때문에 영이인 것이지 별 이유는 없다.)
이렇게 어제보다 오늘이 더 나은 나를 상상하다보면 어느새 기분이 좋아진다. 포기하고 실패해도 언제나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이유다.
언젠가 자기계발이 가장 오래된 '취미'가 아닌, 삶의 자연스러운 일부가 되는 날을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