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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진슬 Oct 30. 2017

시각장애아줌마의 TOEIC 시험후기

Vertical reading에 대한 갈망.

최근, 우리 사회에서 TOEIC의효용성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이 많이 있기는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아직 우리 나라 젊은이들은 TOEIC에 목을 매야 하는 것이 현실인 듯 하다.


내가 한참 공부를 하고 직업을 찾을 때, 우리 나라에서는 시각장애인이 TOEIC에 응시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정작 나는 치열하게 TOEIC을 공부하거나 시험을 치루어 본 경험이 없다. 대신에, 내가 직접 ETS와 편의지원 협상을 해야 하는 경우가 다반사일 정도로많이 힘들고 시간이 오래 걸리기는 했어도 TOEFL은 볼 수가 있었기에 TOEFL이나 TSE(말하기),TWE(쓰기) 시험 등은 경험한 적이 있다.


그런데…

얼마 전, 육아와 바쁜 회사일로 자신이 영어공부도 못하고 실력도 감퇴되는것 같아 자극이 필요하다는 남편의 제안에 따라 함께 10만원을 걸고 TOEICBattle을 하게 되어 결코 적지 않은 나이에 처음으로 그 핫한 TOEIC시험을 쳐 보게되었다.



시각장애인인 나는 미국 ETS 본사에서 공수된 점자 문제지를 가지고시험을 보았다.


점자는 손으로 읽어야 하기에, 일반문자를 읽는 것과는 달리 Vertical reading(수직적 읽기) 같은 입체적 읽기는 꿈도꿀 수 없다. 아무리 점자가 빨라도 시각과 달리 촉각은 상하나 대각선 등을 동시에 인식할 수 없기에무조건 한 줄을 따라 horizontal reading(수평적 읽기)만이가능할 뿐이다.


이런 한계는 대학수학능력시험은 물론, PSAT, LEET 등의 각종공무원시험에서부터 TOEIC, TOEFL 등에 이르기까지, 시각장애수험생들에게는 엄청나게 불리한 특성으로 작용한다. 


읽기 속도가 훠어어얼씬 느릴 수 밖에 없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지문의길이가 매우 길고 고난이도일 경우, 문제나 선택지를 보다가 본문으로 돌아가서 표시해 둔 키워드를 찾아보는 등의 공간적 읽기가 시험 성공에 필수적인 요소인데, 시각장애인들은 수직적 읽기가 불가능하니 풀이속도에서부터 정확성에 이르기까지 엄청나게 불리한 상황에서 시험을 치르게 되는 것이다. 그나마, 요즘은 전자문서로 시험지를 제공하기도 하여, 이러한 불리함과 어려움을줄여가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점자 문제지로 모든 공부를 하고 있는 나는, 고등학생 때부터 아이들이 사용하는 칭찬스티커 같은 걸 사용하여 지문 속 원하는 키워드에 붙여 가며 시험을 치르곤했었다. 오죽하면 이게 하도 답답해서, 한창 공부를 열심히하던 시절에는, Vertical reading만 할 수 있다면 내 영혼이라도 팔고 싶은 심정이었을 정도로힘들었다.


공부를 못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시험 시간이 절대적으로 모자라 억울한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더 슬픈 사실은, 지금껏 살아 오면서 나보다 점자를 빨리 읽는 사람을단 한 명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결국, 점자를 사용하는시각장애인이라면, 그 누구도 내가 겪는 어려움과 불리함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뜻이다. 이러한 어려움 때문에, 기본적으로 TOEFL, TOEIC에 점자로 응시하는 경우에는 두 배의 시간을 제공해 준다.다행히, 나처럼 점자가 엄청나게 빠른 사람이라면, 적어도Reading section은 이 정도의 시간이면 점자를 읽는 것에 따른 불리함을 어느 정도 상쇄할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Listening section이다.

비장애인들은 짧은 단어로 구성된 a에서 d까지의 선택지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겠지만, 시각장애인들은 그것이불가능하여 절대적인 시간 부족을 겪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Vertical reading이 전혀 안 되는데, 오디오 문제와 문제 사이의 Term이 일반 응시자들과 같은 길이로진행되다 보니, 내용도 다 알아 들었기에 제 시간 내에 선택지만 다 읽으면 풀 수 있는 문제들임에도시간이 모자라서 종종 놓치는 것이었다.


그나마 답이 a나 b 쯤에서나와주면 너무 고마운데, d가 답인 경우, 내 손가락이 d에 도달하기도 전에 이미 다음 문제가 나오고 있는 상황이 제법 잦은 빈도로 발생했다.


이렇게 조금은 당황스러운 TOEIC 시험을 마치고는, 예전 ETS가 주관하는 다른 시험경험들을 떠올려 보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다른 시험에서는 똑같이 점자 시험을 보았음에도불구하고, Listening 파트에서 시간이 절대적으로 모자라는 경험이 없었다. 그래서 나 나름으로 열심히 원인을 생각해 보았다.


내 생각에, 이런 근본적인 문제가 발생하는 원인은, TOEIC이라는 시험의 국제적 범용성이 떨어지고 언어시험으로서의 국제적 가치가 별로 없는 현 상황 때문이 아닌가싶다.


생각해 보자. TOEIC 점수에 청춘을 걸고 절박하게 매달리는 나라는우리 나라나 일본 정도밖에 없으니, 장애인에 대한 시험편의 제공에 대한 욕구나 논의가 TOEFL이나 GRE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었을 것이라는 걸 짐작해볼 수 있는 것이다.


뒤늦게, 남편과의 내기로 시작된 시각장애 아줌마의 TOEIC 응시 경험은, 예전부터 관심을 가지고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던 시각장애인들의 시험편의 제공에 관해 다시금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솔직히, 나야 이제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아줌마이고, TOEIC 점수에 전전긍긍, 일희일비 할 상황이 아니기에 조금 불공정하고불합리한 시험편의 상황을 겪더라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저 남편이 만점 맞으면 10만원 준다고 꼬셔서 본건데, 10만원을 못 받은 것이 다소 아쉬울뿐…^^)


하지만, 여느 젊은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스펙을 쌓고 취업준비나 공무원시험 준비 등을 하고 있는 시각장애인들은 어떻겠는가?


아무리 영어실력이 출중하고, 열심히 공부를 하여 좋은 성적을 얻을만한 시각장애 친구들이라도, 같은 수준의 비장애인 친구들이 기대하는 고득점에 도달할 수는 없을 거라는것이, 이번 TOEIC 응시 경험으로 내가 얻게 된 결론이었다.


TOEIC점수가 취업이나 공무원 시험 등 너무나도 많은 곳에서 적지않은 영향을 미치는 한국 사회에서, 시각장애를 가진 후배들은, 교재준비나 자유로운 학원 수강 등에서부터 훨씬 더 많은 어려움을 겪으며 학습과 취업을 준비하고 있다. 이런점을 감안할 때, 시각장애 아줌마의 우연한 뻘짓을 통해, TOEIC시험에서불공정하고 불리한 점이 하나 더 생기는 것을 발견하게 되니, 선배로서 너무 마음이 아팠다.


얼마 전, 이 문제에 대해 글을 쓰려고 다른 감각장애 영역의 시험편의문제에 대한 자료들을 조사하던 중, ‘라일라’라는 청각장애웹툰작가가 연재했던 ‘나는 귀머거리다’라는 웹툰 속의 청각장애인으로서의수능 듣기평가 및 TOEIC 등의 응시 경험에 대한 내용을 발견했다.


청각장애인이야말로 Reading과 Listening이반 반인TOEIC에서, 아예 들을 수가 없으니 Listening 섹션은 시험 자체를 치르는 것도 불가능하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본적으로 수학능력 시험에서는 청각장애인들에게듣기평가 지문 Script를 제공하여 읽고 문제를 풀 수 있도록 시험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작가는 청각장애인으로서의 자신의 이러한 수능시험 경험을 웹툰의 에피소드로 다루고 있었는데, 젊은 친구들에게 친숙한 소통 방식인 웹툰을 이용하여 장애와 그에 따르는 에피소드들을 가벼운 터치로 이야기 하는것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웹툰 속에는 장애인 선배로서 마음이 짠하고 불편한 내용도있었다. 자신이 수능 듣기평가 시험 편의 제공으로 스크립트를 받아 읽고 푸는 것을 당시 일부 친구들조차도 역차별이라고 했다는 내용이었다. 고등학생들에게 삶의 전부와도 같은 수능이기에 아직 어린 친구들이깊은 생각 없이 그렇게 느낄 수도 있겠다고 이해하면서 좀 아쉽다고 생각하며 웹툰을 보는데…


웹툰에 달린 일부 댓글들이 나를 한층 더 서글프게 하는 것이 아닌가?

아무리 장애인이라도 스크립트를 주고 푸는 건, 그냥 점수 준다는 거다,

이건 너무 불공정하다,

역차별이다, …


댓글을 달기 전, 영어 듣기평가를 수행하는 데에 있어, 귀가 들리지 않는 사람에게 어떤 다른 옵션이 있을지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도 없음이 거의 확실한 일부 댓글들이내 맘을 참 씁쓸하게 했던 것이다.

어쩌면, 이 친구들이 이렇게 반응하고 행동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든우리 나라의 치열하고 경쟁적인 교육 시스템이 더 큰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최근 들어, 청각장애인들에게 듣기평가가 50%인 TOEIC 능력 평가를, 비장애인들과같은 기준에서 평가하는 것 자체가 형평성에 문제가 있다는 인식에 따라, 일부 대학원이나 공공기관 전형에서는아예 듣기평가를 제외한 Reading 파트만을 다시 환산하여 평가하는 경우가 점점 늘고 있는 추세다. 스크립트를 제공해 주는 것 보다는 젊은 친구들에게 훨씬 덜 역차별적으로 느껴질런지는 잘 모르겠다.


사실, 시각장애인들도 TOEIC 듣기평가첫 파트의 사진 보고 문제 풀기 부분은 아예 풀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에 이 부분을 제외한 듣기평가의 나머지 부분만을 가지고 점수 환산을 한다.



TOEIC시험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솔직히, 그림 문제는 어느 정도 점수 주려고 내는 쉬운 난이도라는걸 잘 알 것이다. 그런데, 시각장애인들은 그림을 볼 수없고, 그림이 단서가 되는 문제가 아니라 답이 되는 언어 문제이다 보니, 그림설명 등을 달아 주어 풀게 할 수도 없어, 배제하고 풀게 되는것이다. 이렇게 되면, 듣기평가 한 문제를 틀렸을 때의 시각장애인들의데미지는 더 커지게 되는데, 이런 상황이 시각장애인들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저 웹툰 밑에 달려 있던, 일부 팍팍하고 경쟁적인 삶에 찌든 젊은친구들이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한 번쯤 묻고 싶어진다.


마흔 살 아줌마가, 다 늦게 지적 유희 삼아 본 TOEIC 시험에 대해 굳이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쓸 데 없는 후기를 남기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대학생이 된 이후부터 한 아이의 엄마가 된 지금까지, 그 때 그 때 내가 겪었던 많은 일들, 그 속에서 장애로 인해 야기되는많은 불합리하고 불평등한 문제들을 분석하고 협상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글을 쓰는 등의 과정을 통해 크고 작은 것들을 조금씩 바꾸어 왔던 내 삶의경험은, 이 나이에도 이런 일을 멈추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사실, 이 글이 그리 쉽게 써지지는 않았다. 아줌마인 내게는 이제 그리 절실하고 간절한 문제가 아니어서였을까? 문장도영 매끄럽지 못하고, 글 쓰는 사람으로서 여간 마음에 들지 않는 글이다. 그럼에도, 결국엔 늘 후배들에게 마음 속 빚을 갚는 기분으로 오늘도이 글을 쓰고 있다.


사람들이 쉽게 알 수 있는 문제도 아니요, 그래서 누구도 쉽게 다루어줄 수 있는 일도 아니기에…

무언가를 학습한다는 행위는, 기본적으로 보고 듣는 것을 통해 이루어진다. 


강의는 들어야 하고, 책은 보아야 한다.

언젠가, 기술이 어마어마하게 발전하여 이런 직접적 배움의 과정이 필요없어지고, 지금까지의 인류 지식의 집적물과 같은 데이터를 나의 뇌 속에 직접 심어 줄 수 있는 기술이개발되기 전까지, 우리는 이렇게 공부해야만 한다. 


학습의 이러한 특성은, 볼 수 없고,들을 수 없는 감각장애(시각장애와 청각장애)를가진 사람들에게, 극한의 노력을 요구한다.


사람의 입모양을 읽어서 언어를 알아 듣는 신공을 발휘하게도 만들며, 4성, 5성에 이르는 바흐의 평균률 성부를 조각 조각 떼어서 따로 따로 외워 다시 조립하여 연주하는 신공을 발휘하게도만든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결과만을 보고 장애를 극복했다는찬사만 보낸다. 그 뒤에 숨겨진 잠 못들며 치열하게 노력한 날들의 고통은 모르는 것이다.


마치, 물 위에 고고한 자태로 떠 있기 위한 백조의 보이지 않는 발버둥처럼…

고백하자면, 어린 시절의 나는, 장애로인해 이러이러한 점에서 내가 공부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으니 이러저러한 점을 배려해 주세요 따위의 말은 하지도 못했다. 괜히 잘못 어필했다가, 내 무능력을 장애를 핑계 삼아 감추어 보려고한다는 오해를 받을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그래서 아무리 불합리하고 불공정한 상황에 놓여도, 그냥 내가 몇 주씩 잠 못 자가며 감수하곤 했었다.


하지만, 이제 나는 나이 든 아줌마이다.

그래서 그렇게 치열할 것도, 남들을 의식할 것도 없다.

그러니, 우리 후배들을 위해서라도 좀 뻔뻔하게 대신 말해 주고 싶다.

듣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듣기평가의 지문을 제공해 주는 일,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에게 시험 시간을 늘려 제공하는 일은,

절대, 결코, Never, ever특혜나 역차별이 아니라고…

그게 정 납득이 안 간다면…

딱 하루만, 귀를 막고, 눈을감고  등교하여 공부해 보기를…


P.S: 시각장애인이 응시할 경우,TOEIC 듣기평가 문제 간 시간 간격을 좀 더 넓게 조정해 주었으면 정말 정말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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