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시아에서 아이 치과 수술 하다 생긴 일
코로나가 창궐하기 직전, 우리 가족은 약 1년 여 간의 계획 끝에 말레이시아에서 한달살기를 했었다.
아이는 오전에 어학원에 가서 영어를 배우고 우리 부부는 시각장애를 가진 만큼 아이와 수업 마치고 함께 가기로 계획한 곳들을 미리 돌아보기도 하고 페트로나스 트윈 타워 같은 경합이 제법 치열한 유명 관광지의 티켓팅을 미리 해 두기도 하였다.
며칠 관광이 아닌, 한 달을 사는 것이었기에 생필품이나 식자재 등을 사기 위해 마트장을 보기도 하고 잠깐이라도 짬이 나면 남편과 단 둘이 어학원에 아이를 데리러 가기 전에 꿀같은 오붓한 점심 데이트를 하기도 했다.
코로나로 해외 여행이 자유롭지 못한 지금 상황에서 돌아보면 새삼 꿀같이 달콤하고 귀한 시간이 아니었나 싶다.
지금은 이렇게 그 시간이 달콤하고 그립다고까지 말할 수 있지만, 사실 우리의 말레이시아 한달살기는 마냥 즐겁고 신나는 일들로만 채워진 건 아니었다.
쿠알라룸푸르 도착 4일째 되는 날 아이가 크게 다쳐 응급 치과 수술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 후로 아이는 수영장이 있는 콘도에 살면서도 수영 한 번 할 수 없었고, 죽이나 망고, 바나나, 오트밀 등과 같은 부드러운 음식만 먹으면서 귀국할 때까지 치료를 받아야만 했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무려 1년 6개월 간 세브란스 어린이치과에서 완치가 될지 안 될지를 맘 졸이며 치료를 받아야 했으니 아이가 얼마나 심하게 다쳤는지 짐작이 될 것이다.
사고가 있던 날 아침, 아이 등원 후 어른들은 국제학교 답사가 예정되어 있어 온 김에 이런 것도 봐 두면 좋겠다 싶어 평소 단체 활동에 잘 참여하지 않는 우리 부부이지만 이날은 참여하게 되었다.
영국의 앱솜칼리지는 외국 영화 같은 곳에서 나오는 서구 학교들의 환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전형적인 영국 사립 기숙학교의 모습이었다.
구경하면 할수록 해리포터의 호그와트마법학교가 떠올랐다.
연습실도 20명당 1개(아! 학교 다닐 때 연습실 잡느라 고생했던 엄마는 뜬금없이 이 부분에서 엄청 부러웠음), 3d프린터에 넓고 쾌적한 도서관, 운동장 4개, 수영장, 실내 스포츠활동을 할 수 있는 공간에 그럴싸한 공연장까지...
카페테리아에서 식사도 했는데 어설프지만 한국 음식부터 서양식, 말레이식에 베지테리안을 고려한 섹션까지 맛이 뛰어나진 않았지만 제법 그럴싸했다.
설립 5년도 안 됐으니 그야말로 최신식 깔끔한 시설이었다.
남편과 나는 이 때부터 이 학교를 해리포터에 나오는 호그와트마법학교라고 불렀다.ㅋㅋㅋㅋ
나름 흥미롭고 재미있게 앱솜 국제학교 답사를 마치고 조금씩 다른 스타일의 두 학교를 더 돌아본 후 아이들 수업 마치기 전까지 어학원으로 돌아가려는데 차가 막혀 수업 종료시간보다 조금 늦게 어학원에 도착하게 되었다.
부랴부랴 학원에 도착하여 아이를 데리러 가려니 아이가 울면서 나온다. 한 아이는 앞니에 붕대를, 아인이는 입에 거즈를 물고 나오면서 울고 있다.
충격!
워낙 남자 치고는 조심성이 있는 아이라 지금껏 어디가 부러지거나 찢어지거나 하는 등의 큰 외상을 한 번도 입은 적이 없었기에 더 충격적이었다.
어학원쪽 한국인 관리자의 차를 타고 마음 졸이며 근처 퉁신병원 응급실로 갔다.
응급실에서 의사들이 와서 아이들에게 사고 경위를 묻고 여러 문진을 하면서 초진을 했다.
그러다 보면 불가피하게 어쩌다 그랬냐, 누가 잘못했냐 등등의 이야기를 하게 되는 어른들도 많은데, 그건 아무리 속상해도 이 상황에서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아이들도 다치고 아픈 이 상황만으로도 당황스럽고 힘들고 무서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건 지금 이 상황에서 절대 중요치 않다. 아이들을 안정시키고 무사히 치료를 받는 것만이 지금 우리 어른들이 바라봐야 할 유일한 목표여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응급실에서 아이들에게 나는 절대 누가 먼저 놀자고 했냐 따위의 질문은 절대 하지 않았다. 이제 와서 의미도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런 걸 따져서 뭘 어쩌겠는가? 아주 나이스한 인상이었던 **이 엄마조차 응급실에 누워 있는 아이들에게 그걸 묻는 걸 보고는 그 맘은 이해가 가지만 어른의 마음씀이 좀 아쉽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내가 응급실에서 이응이에게 딱 하나 물었던 건 그저 너희들 4명이 그러고 놀때 어학원에 선생님이 그 자리에 있었느냐는 것 뿐이었다. 그것은 사실 매우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관리 원칙에는 부모가 아이를 픽업하기 전까지 elc는 아이들을 밖으로 내보내지 않고, 돌보는 것이 원칙인데, 교사가 없었다는 건 옳지 않은 것이 사실이었기에 병원에서 수술 마치고 수납과 약 처방 등의 절차 중에 담당자에게 조용히 그 부분은 좀 아쉽다고 어필했다.
한편, 응급실 초진 후 아이들의 상태를 들어보니 한 아이는 전신마취를 하고 이마를 꿰매야 한다고 했고, 이응이는 응급실 초진 의사가 이야기할 때는 큰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고 했는데, 나중에 치과전문의 탄위키 박사님에게 가서 진찰을 받으니 사태가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것이었다.
나도 사고 경위를 잘 몰랐기에 응급실에서부터 의사의 질문들을 아이에게 통역하고 다시 아이의 답변을 내가 통역하는 식으로 정신 없이 문진이 이루어졌다. 박사님은 아이에게 다시 어떤 물리적 충돌로 이가 다치게 되었는지를 상세히 물으시고는 아이의 이도 꼼꼼히 진찰하셨다. 그리고는 촬영해 온 엑스레이를 보니 상악부 앞니 3개의 뿌리까지 손상되어 겨우 한 가닥 정도의 실오라기같은 뿌리들만 각각 살아 있어 지금 바로 응급으로 수술을 하긴 하겠지만, 그 후 예후가 어떨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만약 뿌리와 치조직, 신경 등이 제대로 다시 잘 연결된다면 이가 아물면서 조직이 살아날 것이고, 실낱같이 남겨진 뿌리가 연결에 실패한다면 치아 조직이 검게 변하며 죽어 버릴 거라고 하셨다. 박사님은 내가 말레이시아에 언제까지 머무는지를 물으셨고, 나는 앞으로 약 3주 조금 넘게 더 머물 예정이라고 말씀 드렸다. 아무래도 우리가 외국인이기 때문에 치료 계획상 가장 중요한 질문이었을 것이다. 나 또한 응급 수술 후 아이를 여기서 케어하는 것이 나을지, 혹시 비행이 무리가 되지 않는다면 한국으로 돌아가서 치료를 받는 것이 나을지 여쭤보았는데, 아무래도 수술 직후 비행을 하면 기압이 낮아 출혈 등의 위험이 크니 될 수 있는 한 말레이시아에서 어느 정도 안정될 때까지 치료를 받고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고 하셨다.
당시에 아이와 의사 사이 이야기를 통역하랴 중요 결정 사안들은 남편에게도 다시 설명하랴, 아이 불안 다독이랴 속으로 눈물을 삼키며 냉정하려 애쓰느라 정신 없던 엄마는 얼마나 맘 아프고 힘들었는지 모른다.
게다가 시각장애인 입장에서 대형병원에 가면 언제나 겪는 불편이지만, 여기 가서 수납해라, 저기 엑스레이실로 가서 촬영해라, 2층 치과에 있는 탄위키 박사님 진료실로 가라 등등의 태스크들은 아이가 크게 다쳐 더없이 당황하고 있는 시각장애 엄마에게 더 크고 힘겨운 부담으로 여겨질 수 밖에 없었다.
그나마 그 힘들고 당황스런 와중에도 딱 하나 내게 위로가 되었던 사실은 내가 잘 안보여서 어리버리해도 말은 잘 알아듣고 영어를 편안하게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 아이 케어에 있어 취약점으로 작용할 수 있는 시각장애를 꽤 훌륭하게 상쇄시켜주었다는 것이었다.
이토록 심각한 절체절명의 상황 속에서도 내가 의사의 모든 말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잘 알아 듣고 있다는 사실에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이렇게 위급하고 심각한 상황에서는 잘 알아들어야 최선의 판단과 결정을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드디어 수술이 시작되었다.
의사 선생님은 아이에게 영어로 지금부터 자신이 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쉽게 설명하였으며 내가 아이에게 잘 전달할 수 있도록 적절히 기다려 주는 배려도 잊지 않으셨다. 비록 아이가 얼마나 알아들을 수 있을지 모르는 영어임에도 지금 너무 아프고 두려운 아이의 마음을 너무나도 다정하고 따뜻하게 보듬어 주려고 진심을 다해 노력하는 모습이 보여서 엄마로서 무척 감동했다.
이미 너무 큰 외상에 너무 아팠던 아이는 마취주사를 놓자마자 더 크게 자지러질 듯 울었다.
당연히 이미 극심한 통증에 수술 과정이 시작되니 아이는 반사적으로 자꾸 입을 다물려 했다.
그 때마다 선생님은 아이에게 괜찮아 괜찮아를 되뇌이며 "Open the mouth.", "Open the mouth."라는 말을 반복하셨다.
그런데 모국어가 영어가 아닌 내 입장에서 그 발음이 버겁고 혀 끝에 턱턱 걸리는 느낌이 영 힘들게 느껴지는 건 당연한데, 이상하게도 영어가 공용어인 말레이시아인인 선생님이 그 말을 하는 것도 참 버겁게 들렸다. 이런 내 마음을 읽으신 걸까?
아니나 다를까, 갑자기 선생님이 나에게 이렇게 물으셨다.
"How can I say 'Open the mouth' in Korean?"
나는 기다렸다는 듯 의사선생님의 고단한 혓바닥에 안식을 드리고 수술에만 집중할 수 있게 하기 위해 냉큼 이렇게 말했다.
"Just say Ah!"
"Oh! good!"
선생님은 뭔가 신세계를 마주한 듯 신선하고 신기한 반응을 보이셨다.
아이가 수술을 받고 있던 와중에도 평소 언어에 관심과 흥미가 많은 나는 덧붙여 한국 치과의사들은 언제나 이렇게 말한다고, 매우 자연스럽게 문제가 해결되지 않느냐고 덧붙이기까지 했다.
힘든 수술을 마친 단위키 박사님은 최선을 다해 겨우 한 가닥 정도씩 남아 있는 3개의 앞니 뿌리들을 연결하고 심하게 찢긴 잇몸을 꿰맨 후 브레이스로 지지했다고 하셨다.
만약 며칠 안에 이가 검게 변색되어 보인다면 뿌리가 정착하고 신경들과 연결되어 영양 공급이 이루어지는 것에 실패한 것이고 그 때는 다른 치료 대안을 고려해야 할 거라고 하셨다.
이 때부터 아이와 나의 말레이시아 생활 3주 반은 죽 쑤는 인생 그 자체였다. 수술 후 처음 며칠은 오트밀이나 각종 수프에 식빵을 적셔 먹이거나 매시드 에그 샐러드 등을 먹여 보았지만 아이가 맛이 없다며 잘 먹지 못했다. 그나마 준비성 투철한 내가 한국에서 가져간 미역과 육수팩, 참치 등이 각종 야채, 달걀 등과 만나 다양한 죽으로 변신하여 이 때 얼마나 큰 도움이 됐는지 모른다.
아이는 그 이국적인 날씨, 그 좋은 콘도에서 수영 한 번 못 했으며, 여행의 백미인 미식도 못 해보고 생과일 주스, 수프, 죽, 부드러운 빵 정도만 겨우 먹을 수 있었다.
수술 후 바로 설 연휴가 있어 집에서 쉬면서 경과를 지켜 본 후 정해진 날에 병원에 두근두근 맘 졸이며 방문했다.
그 때까지 다행히 아이도 열이 오르고 아픈 날들을 진통제와 항생제 등으로 잘 견뎌 주었고 힘든 식사 제한도 잘 따라주었다. 맘 졸이며 매일 체크하고 잘 안 보이고 불안하니까 아이에게 물어보기 바빴던 치아에 변색도 보이지 않아 희망을 가지고 엑스레이 사진을 살펴보고 아이를 진료하는 탄위키 박사님 말씀을 판결을 기다리는 죄수라도 된 듯 기다렸다.
다행히 뿌리가 잘 안착하기 시작하고 영양분도 공급되는 것으로 보인다고, 이제 큰 고비는 넘겼으니 앞으로 치료 과정만 잘 따르면 괜찮을 거라고 하셨다.
얼마나 감사하고 또 감사했는지 내가 아는 가장 진심어리고 진정성 있는 감사하다는 영어 표현을 바꿔가며 앵무새처럼 몇 번이고 반복했는지 모른다.
귀국 전에 치료와 진료 차트 등을 받고 추후 치료 계획에 대해 조언을 듣기 위해 박사님께 두 번 정도 더 진료를 받고 한국에 돌아왔다.
바로 기록을 들고 가장 권위 있는 세브란스 어린이치과 외상치과 선생님을 찾아 최대한 빠른 진료를 예약하여 방문했다.
한국 박사님께서는 다행히 현지에서 수술을 잘 해서 아주 예후가 나쁜 건 아니지만 외상이 심했었기 때문에 지금부터 1년 6개월은 주의 깊게 모니터링을 주기적으로 하면서 치아 사용 등도 제한해야 확실한 완치 여부를 알 수 있다고 하셨다.
그래서 아이는 1년 6개월 간 앞니로 음식을 절단하는 것도 하지 말아야 했기에 내가 맨날 가위로 고기나 단단한 음식들은 모두 잘게 잘라 먹여야 했다. 마치 유아기로 돌아간 듯한 느낌? 그 좋아하는 돈가스, 탕수육도, 이에 좋지 않은 다양한 과자, 아이스크림 등도 자제하며 살았다. 무엇보다 운동을 좋아하는 아이임에도 충돌이나 강한 안면 충격을 받으면 안됐기에 과격한 스포츠 활동 등은 할 수가 없었다. 다행히 단독으로 하는 쇼트트랙은 마우스피스 등의 보호장구를 착용하고 해도 된다고 하셔서 그만두지 않고 지속할 수 있어 숨통은 좀 틔었다.
그렇게 힘든 1년 6개월을 보낸 후 작년 10월 드디어 아이는 세브란스에서 완치 판정을 받았다.
현지에서 너무 크게 다쳤고, 관리자나 어학원 쪽 대응도 너무 부적절해서 마음 고생도 많았지만 아이 치료가 먼저였기에 꾹꾹 눌러 참으며 정신 없이 아이 치료에만 매달리며 지냈던 현지 생활이었다.
하루는 엘리베이터에서 디렉터랑 마주쳤는데 내가 영어가 안 되는 것도 아니고 이 사람이랑 영어로 맞장 뜨고 싶은 마음이 목 끝까지 차올라왔다.
하지만 다른 학생들과 학부모들도 있었기에 겨우 이 악물고 참았다.
당시에도 한 엄마가 나더러 정말 침착하고 냉정하고 대단하다고 했을 정도였다.
암튼 이런 고생 끝에 받은 완치 판정이었으니 아이와 남편과 내 마음이 어땠을지는 부모라면 얼마든지 공감이 가능할 것이다.
사실 아이에게는 큰 어려움이 남아 있기는 하다.
외상이 너무 커서 완전히 신경이 재생된 게 아니기 때문에 혹시나 이 치아들이 썩게 되면 신경치료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이가 썩어도 치료를 받을 수 없다는 얘기다.
그래도 우리는 이나마 치아를 살리고 정상적으로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했다.
어차피 잃어버린 것에 대해 안타까워해 보아야 소용이 없으니까.
앞으로 이를 더 깨끗이 관리하자고 아이와 다짐하며 긍정적으로 완치판정 받은 날의 기쁨을 만끽했다.
아이가 2020년 1월 설 연휴 직전에 현지에서 다쳤으니 그 후로 이렇게 글을 쓸 수 있게 되기까지 무려 2년 9개월 남짓의 시간이 필요했을 만큼 여러 모로(아이의 아픔과 고통을 지켜보는 것과 옳고 그름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도) 내게는 소화하기 힘든 과정이었다.
힘들고 안 좋은 일이었지만 그래도 될 수 있는 한 긍정적인 쪽으로, 좋은 마음으로 마음 속 앙금들과 속상함을 정리하고 싶었기에 <Just say Ah!>라는 에피소드를 발판 삼아 그간의 심경을 정리해 본 것이다.
그래도 영어에 관한 에피소드로 시작했으니 결론도 관련 주제로 훈훈하게 마무리해보자.
안 보여도 영어를 잘 듣고 말할 줄 아는 시각장애 엄마가 영어 울렁증 있는 비장애인 엄마보다 외국에서 이런 비상 상황에 맞닥뜨리면 아이를 더 잘 돌볼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왜냐하면 어떤 언어를 원활하게 말하고 듣지 못한다는 것 역시 장애와 그 본질이 크게 다르지 않기에 내 시각장애와 별 다를 바 없는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는 오늘도 20년째 영어 공부 삼아 매일 루틴처럼 듣는 NPR Morning Edition을 끊을 수 없는 것이다.
자! 그러니 우리 모두 영어 공부 열심히 하자.
이 웬수같은 영어가 언젠가 궁지에 몰린 나를 크게 도와줄지도 모르니까.